2011 한원미술관 하반기 기획전 투영: 은유의 유토피아
은유의 세계, 상상의 세상
은유는 곧 상상력이다.
은유는 비유법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시(詩)의 기술적인 방법이며 감성의 언어이다. 은유(metaphor)는 그리스어 etaphora에서 기원하였다. metaphora는 ‘넘어로’라는 의미의 ‘meta와 ’가져가다‘라는 의미의 pherein에서 연유하였다. 이것은 한 사람의 양상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넘겨 가져가‘ 두 번째의 사물이 마치 첫 번째의 사물처럼 서술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은유란 언어의 일상적인 양상에서 ’일탈된 것‘이며, 은유적 표현은 특별한 정신 행위라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고전시기의 은유는 ‘단순한 장식적 범주의 형용사 집단’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19세기 낭만주의의 시인들에 의하여 상상의 중심원리로써, 언어를 고정된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의미와 인식을 창조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은유가 창조적인 의미를 생성해 내고 확장시키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은유는 곧 상상력인 셈이다.은유는 유연한 사고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의미들의 연상적 의미들을 도출해 낸다. 또한 이러한 유연한 사고과정은 은유가 감성을 표현하는 언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은유는 사물의 관찰이후 경험하는 미적관조에서 도출되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양상을 비유법으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잔인한 운명의 화살”이나 “날아가는 시간처럼”,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대입하거나, 서로 다른 객체의 특성을 이입하는 것, 즉, 의인화(擬人化), 의물화(擬物化)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술이 상상계로 확장해 나가기 위해 거치는 창조적인 문학적, 시적 기술인 것이다. 따라서 상상력은 은유의 형태로 가시화 되며, 그 은유는 의인화, 의물화와 같은 비유법에 기댄 채 구체화되고, 뚜렷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은유는 상상력을 위한 방편인 것이다. 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의 서술에 의하면 상상력은 지각이 제공하는 실제적 복제물들을 변형하는 역동적인 힘이며, 재현의 법칙은 은유적이라 한다. 상상력은 기억이나 회상의 경험세계를 기초로 하여 그 경험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이며, 결정된 경험세계를 소재로 하여 시공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세계를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심상(心象, image)을 결합하는 과정이며, 경험세계의 이미지들을 서열화하고 양식화하는 작업인 동시에 창조적인 작업인 것이다.
은유로 드러난 5인의 작가
‘은유의 유토피아’는 이러한 은유로 만들어낸 상상세계의 이야기이다. 강미령, 김기범, 이슬기, 이효은, 임현희 5인이 펼치는 일상에서 정신계로, 기억에서 환상으로, 현실에서 신화로, 개별 작가마다 보여주는 빛나는 상상력은 현대인이 꿈꾸는 이상계로서의 유토피아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 세상은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인 지도 모르겠다.
강미령은 민화와 서구 팝아트의 결합을 시도 한다. 한국전통 미술과 1950년대 미국의 아방가르드에서 1960년대 팝아트까지,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을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미술의 자기역사성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의 이질적인 두 문명의 만남과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전복(顚覆)이라는 대립되는 항목은 작가의 기억이라는 제 3의 공간에 묶어 둔다. 그리고 조용하고 부유하며 성찰한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는 동시대인의 기억의 괘적 들이 반세기 그 이상을 아우르는 거꾸로 가는 시간의 거대한 소리와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저 먼 기억 속에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에서 작가는 다시 소녀 적 미령이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강미령의 작품이 시대의 아이콘이 된 예술적 흔적들에 빗대어 은유하고 구조화한 풍경이라면, 김기범의 작품은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의 흐릿한 기억들을 쏟아낸 잔상으로 채워 넣은 마음속 감정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사랑, 이별, 미움, 증오와 같은 작가의 잔상들은 뚜렷하게 화면으로 기억된다. 빼곡하게 쌓아올리고 구성한 새로운 도시 안에서 작가는 추억을 헤집듯, 아니면 추억을 채집하듯 마치 과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한다. 그 속에는 어릴적 행복한 수퍼맨, 베트맨과 같은 영웅의 꿈이 담겨 있고 젊은 그들의 상처 받은 영혼들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 꾸러미의 도시가 되기도 하고, 색색으로 치장한 무기로 가득한 도시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음속의 작은 알갱이들이 튕겨져 나온 확장된 세계이며, 작가의 머릿속에 남겨진 증폭된 거대한 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슬기는 브로컬리, 파, 고추, 오이 등을 구성하여 제 3의 자연을 만들어낸다. 초 식물성 환상특급이다. 사실, 이들은 모두 건강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식물성의 야채들인데, 자연의 유사성을 빗대어, 나무가 되고 산이 되고 숲이 되었다. 작가의 신선한 상상력이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한 푸른색 세상으로 변모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오이 보다 작고 브로컬리 보다 작겠다. 그 아래에서 집을 짓고 사는 반지의 제왕에서의 호빗족처럼, 꿈과 상상과 모험으로 가득한 작은 세상의 이야기. 어쩌면 이것은 걸리버화(gulliverisation)라 하여 걸리버가 간 소인국의 모습처럼 대상과 주체의 반전이나 미시와 거시의 반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 기호의 가치사회에서 아님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가득한 떠다니는 시뮬라크럼(simulacrum)들 사이에서 오롯한 본질적인 것, 우리의 기원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되찾기 위한 은유로 보여 지기도 한다.
이효은의 작품세계는 Paradox Utopia라 할 수 있다. 부풀어 오른 꿈과 희망은 세계로 향하는 문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 작가의 화면은 역설로 가득한 세계이다. 탁자위에 열려진 문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는 빠져 나갈 수 없다. 몸을 한껏 움크리고도 손톱만큼도 움직일 수 없는 그 작은 문은 루이스 캐럴의 “엘리스”에 나오는 역설의 세상과 닮았다. 신화속의 문은 통과의례로써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거나 지혜로운 높은 단계로 성숙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작가의 문들은 미로이거나 닫혀 있거나 작아서 길을 잃고 나갈 수가 없다. 즉 나가거나 들어와야 할 문이 소통과 교유의 단절과 불가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통의 단절,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작가의 선택과 현재 위치, 정체성에 관한 뚜렷한 고민이 드러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현실과 이상의 불합치와 괴리에 관한 적절한 은유가 아닌가 싶다.
이효은이 문이라는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를 끌어들이듯이, 임현희는 원형 이미지를 통하여 상상력이 어떻게 상징과 신화성으로 합치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나무, 새는 모든 문명이 공유하는 신화의 원형을 담고 있다. 나무는 우주목일 것이며 이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고 인간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것이다. 새는 하늘과 땅을 마음 것 날아다닌다는 본성에서 신의 전령이자 영혼을 천상계로 승천시키는 영물(靈物)이기도 하다. 생명이 움직이는 에너지를 하나하나의 선으로 표현하고, 마치 섬유다발을 보는 것처럼 살아있는 형상의 나무와 영혼과 새들이 신비한 숲속에 가득하다. 즉, 이곳은 신화의 땅일 수도, 천상의 그곳일 수도, 극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은유가 상상력과 창조를 위한 문학적 수사법이듯이, 상상력의 귀점은 무의식의 세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곧 신화 세계의 가시화이다. 따라서 신화는 상징의 의미구조이므로 은유는 상상력으로 가는 창의적인 방법이고, 상상력은 상징이해를 위한 연결물임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이 어떤 세계와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접촉이라 한다면 임현희가 그리는 기원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논리적으로 조합된 이상적인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5인의 작가가 그려내는 은유의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감지되는 문학적, 시적인 감성이 적절하게 드러나고 또 다른 세계로의 확장으로 완성된다. 불안정한 인간의 언어구조는 대상을 은유로써 구체화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인식한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무궁한 상상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박옥생,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