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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공간을 걷듯, 책을 읽듯

2014-06-12


열린책들은 책뿐 아니라 책을 통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출판사다. 이는 한 작가를 소개할 때 그의 모든 작품을 출간함으로써 작가의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전작 출간’ 방침을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외에도 국내외 유수의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책의 표지, 삽화 등 예술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예술적 작업들을 아트상품과 전시 등으로 연계해 나가고 있다. 이것은 열린책들의 출판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엿볼 수 있다.

2005년 본격적인 예술 전문 출판을 위해 미메시스를 만든 이후에는 미술, 디자인, 건축, 만화, 영화, 사진, 문헌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아울러 ‘예술적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책들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2009년도에 파주 출판단지에 대지 1,400평에 전체 면적 1,100평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개관하면서 ‘책과 문화’를 공간에 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루 시자(Álvaro Siza)’가 디자인 하였고, 자연광과 곡면을 통해 구획 된 전시공간과 북앤아트숍, 카페는 건축 자체가 장소성을 만들어 냄은 물론 ‘미메시스’라는 브랜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글, 사진│구선아 객원기자
자료제공│열린책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 들어서면 작은 담장과 나무 때문인지 공공의 오픈 스페이스임에도 아늑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작은 마당을 걷다 보면 지난 3월에서 5월에 전시되었던 박찬용 작가의 조각품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을 지나 큰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면 공간 깊숙이까지 자연광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카페와 북앤아트숍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북앤아트숍은 책 자체가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 역할을 한다. 이 공간은 미메시스의 디자인 제품과 함께 책들이 전집, 작가, 디자인, 건축, 영화, 사진 등 분야별로 전시되어 있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획 전시 못지않게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편, 일반 서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도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공간인가.

북앤아트숍을 지나면 기획 전시가 열리는 전시공간으로 이어진다. 전시공간은 하얀 곡선의 벽면이 특징이며, 다양한 크기로 1층과 3층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전시는 대부분 출판되는 책과 연계되어 있는 편이며, 1년에 4회에서 5회 정도 전시가 기획되어 진행된다. 현재는 미메시스에서 출간된 수집광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오연경의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 삽화 원화들이 1층에 전시되어 있고, ‘BOOK+IMAGE’ 전시의 일환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바 있는 쿠바 출신 작가인 알베르토 아후벨의 『로빈슨 크루소』 삽화와 『로베르토 볼라뇨 선집』 표지화의 원화들은 3층에 전시되어 있다. ‘BOOK+IMAGE’는 출간된 책과 관련이 있는 예술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로 이번 전시로 4회 째를 맞이했다. 지난해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표지로 쓰였던 이혜승 작가의 그림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1층 전시장에서는 오연경의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 책에 담긴 700여 개의 일러스트레이션 삽화들의 원화를 만날 수 있다. 벽면에 정리된 듯 다소 흐트러지게 배치된 그림들은 그림과 같은 공간에 놓여 있는 실제 사물들이 마치 한 프레임 안에 담긴 그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원화들을 보고 있으면, 오연경 작가가 얼마나 집요하며 성실한 사람인지 또한 섬세하면서 놀랄 만큼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으로 볼 때는 몰랐던 디테일과 색감을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전시장 한켠에는 오연경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는 책상과 색연필, 마커, 사이펜, 연필, 지우개와 같은 도구들이 놓여져 있어, 작가만의 공간을 훔쳐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선생님은 <스스로 알아낼 것> 의 다음 단계로 <많이 그릴 것> 을 요구하였다. 3년간 그렇게 물건을 그리며 졸업 때는 도쿄에서 산 물건들만 모아서 일러스트 포스터로 만들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은, 매일 그릴 것, 그리고 도망가지 말 것이었다. 여기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에 나온 온갖 물건들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후, 사거나 모으거나 선물로 받거나 어디선가 주워 왔거나 한 것들이다.
-본문 중-


3층에는 화가이면서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알베르토 아후벨’의 『로빈슨 크루소』 삽화 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작품은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벽면에 한 장 한 장 배치되어 있다. 관람객들이 전시공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의 책을 읽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니얼 디포의 대표작이자 최초의 근대 소설인 『로빈슨 크루소』는 18세기 영국 문학계에 새로운 세계를 선사한 것에서 시작해 영화와 오페라 등 약 2백여 년 동안 중판, 번역, 번안되어 7백 여종의 창작물로 재생산된 고전 중 하나다. ‘알베르토 아후벨’의 『로빈슨 크루소』 책 역시 새로이 재탄생 된 작품들 중 하나로, 단 한 줄의 텍스트도 없이 기존의 삽화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체와 색채로 구성돼 있어 독자들의 시각을 자극한다. 전시공간에서는 그림 중간중간 주요 텍스트들을 함께 구성해 관람객들의 이해를 높이고 있다. 이 텍스트는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던 류경희 역의 『로빈슨 크루소』 의 문장들을 빌려 왔다. 소설을 보며 느꼈던 감정과는 달리 뚜렷하고 강렬한 색채로 구성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 참을 머무르게 한다. 스페인 아동 문학 최고 삽화상, 발렌시아 시립 문화상 최고 삽화 상, 볼로냐 국제 아동 도서전 최우수 상 등을 수상한 전력이 아깝지 않게 느껴진다.

이어지는『로베르토 볼라뇨 선집』표지화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같은 작가의 작품인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름을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보여질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이다. 대담한 스케치 가운데 드러나는 생동감은 어두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다가온다. 실제 책 표지를 양쪽에서 열어 보면 이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모든 표지에는 볼라뇨 작품 속에서 매우 상징적인 요소 중 하나인 달이 등장한다. 달은 우리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볼라뇨 작품들이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열린책들에게 볼라뇨 선집 기획과 출판은 새로운 모험이었다. 칠레의 대작가 볼라뇨는 국내 시장에서는 인지도가 없던 탓이다. 하지만 열린책들은 이 모험을 즐긴 듯하다. 쿠바의 화가 아후벨과 표지 디자인 작업을 하기로 하고 더욱 특색 있는 열린책들만의 볼라뇨 선집을, 책과 예술의 획기적인 만남이 된 것이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1988년 미스 반 데어 로에 유럽 현대건축상과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 2001년 울프 예술상, 2002년과 2012년 두 번에 걸쳐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한 스타 건축가 알바루 시자로 인해 개관 후부터 줄곧 건축에 모든 관심이 쏠려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소개한 것처럼 이 뮤지엄의 콘텐츠는 전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곳에서의 전시는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책이 출판되면서 가졌던 의미, 그 책만이 가진 특별한 구성 그리고 몇 달 혹은 몇 년간 그 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작가와 작가의 세계관까지 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출판문화, 출판 콘텐츠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콘텐츠를 하나의 공간에 잘 녹여 하나의 책을 보듯 만드는 전시, 이것이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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