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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뉴스

양재천, 도심 속 유토피아

2011-06-17


‘양재’를 한문으로 하면 良才, 예로부터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문은 같더라도 ‘양재동’과 ‘양재천’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분명 다르다. ‘양재천’ 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일까?

글 | 김소연 d-페다고지 연구원
에디터 | 최유진(yjchoi@jungle.co.kr)


“나는 내 인생에서 꿈을 이룬 듯한, 마치 유토피아에서 사는 듯, 성공한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양재천을 달리고, 산책하며, 타워팰리스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는 그런 미래가 나에게 정말로 일어난다면 말이에요.” 한 후배의 말은 사전적 의미의 양재천이 아닌, 솔직하고 직접적인 욕망이지만 동시에 가상의 날들을 말하듯이 조금 멀게 느껴졌다. 그녀가 말하는 양재천은 아직 이루지 못한 그녀의 성공적인 미래가 함께 하는 곳, 그녀의 유토피아로 다가왔다.

유토피아란 16세기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처음으로 쓴 용어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나라를 일컫는다. 당시의 영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상적인 사회상으로 제시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후, 다른 면모를 지닌 이상향들이 여럿 만들어졌다. 모어의 유토피아가 정치적으로 완벽한 이상사회를 말하는데 비해, 평화롭고 전원적이며 목가적인 사회상을 그려낸 아르카디아가 있고 동양에는 무릉도원이 있다. 전자는 실제 중부 그리스 지역을 일컫는 반면, 후자는 꿈의 세계로서의 중국 호남성 동정호 지역이라는 가상의 지역을 토대로 설계된 이상향을 말한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파괴하는 모습에 분노하면서, 화폐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이상향을 꿈꾸었던 사회개혁가이자 철학자였다. 모리스는 그의 소설 『News from Nowhere』 에서 정치적 유토피아만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도심 속 유토피아를 동시에 제시했다. 주인공 윌리암은 환경을 오염시키는 오래된 공장들이 사라지고 멋진 집들이 늘어선 템즈 강가를 유유히 거닌다. 모리스가 제시한 2150년대의 유토피아적인 미래 사회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자본주의와 공장의 오염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곳이었다.

도심 속 유토피아. 19세기 후반 그가 간절히 바라고 꿈꾸었던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며 이상향이 실현되는 바로 그 공간이 21세기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재현되고 있다. 비록 한 이야기(story)로는 구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장면(scene)으로, 우리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 지명 사전에 따르면, 양재천은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강남구 대치동에서 탄천과 합류하여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과천시와 서초구, 강남구를 아우르며 흐르고 있는 양재천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양재천이 있는 곳은 강남, 그 중에서도 강남의 특정 지역이 떠오를 것이다. 초고층 건물의 상징이 되어버린 타워 팰리스. 자본주의 고도 성장의 상징이자 수많은 담론을 양산해 내는 마천루 주위로 높다란 나무들과 숲이 우거져있는 이미지는 양재천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처음부터 이러한 이상적인 지역이 아니었다. 박재길 국토 연구원은 양재천 일대는 ‘경부 고속도로의 부산물’이라 설명한다.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지 못했던 5급수의 양재천과 강남의 탄천은 숯을 만들던 곳으로 ‘숯내’ 라 불릴 만큼 오염된 곳이었다. 이 일대는 대부분 논이거나 개발되지 않아 버려진 땅으로 여겨졌었지만, 80년대 이후 개발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해서 1995년부터 5년에 걸친 하천정화사업의 결과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만들어지고 변화된’ 양재천은 악취가 풍겼던 옛 오명을 씻고, 이제는 전국 최초로 생태 하천을 되살린 모범적 사례로, 아르카디아의 풍광이 숨쉬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양재천, 도심 속 초현실주의적 공간


양재천을 걷다 보면 초현실주의 작품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황혼이 내려 앉을 즈음, 도심 속의 우묵한 공간을 흐르는 하천과 수풀들, 그리고 그 주위의 가로등과 벤치, 조형물들이 마치 데페이즈망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미술 운동인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데페이즈망, 즉 익숙한 환경 속의 사물을 어떤 논리적인 구조를 뛰어넘어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롭게 배치시키는 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러한 기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과 다른 낯설음과 함께 기이함, 신비로움, 당황스러움, 불편함, 혹은 일상적인 상식을 벗어난 충격과 함께 흥미로움을 준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니 쭈욱 시원하게 뻗어있는 길 옆으로 열대 나무의 잎사귀처럼 널찍하게 양 옆으로 벌어진 가로등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마치 수영장의 다이빙대를 연상하게 하는 은색 의자가 놓여져 있다. 독특한 모양의 가로등과 의자는 양 옆의 다른 평범한 가로등들 사이에서 당황스러운 기묘함을 선사해 줄 법도 하지만, 푸르른 나무들과 널찍널찍한 산책로에 의해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되어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조금 걷다가 이내 다시 만난 가로등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해바라기 모양의 이 가로등은 LED 를 이용한 하이브리드 태양광 방식으로 최첨단 시스템을 이용한 가로등이다. 바로 맞은 편의 마치 19세기 영국의 기차역을 연상케 하는 시계탑만 없었어도, 이러한 21세기 최첨단의 흐름에 주저 없이 발을 담글 수 있었겠지만, 나는 여러 가지가 혼재된 시간을 초월한 어떤 신비로운 공간에 들어온 듯 했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서 시계를 들고 뛰어가는 토끼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순간이었다.


이규목은 도시에 대한 이미지 조사를 하는 방법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무엇이 보이는가(see question)’, 둘째, '무엇이 떠오르는가(remember question)', 그리고 셋째, ‘무엇이 중요한가 (important question)' 하는 물음으로 도시의 이미지를 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규목, 『한국의 도시경관』, 열화당) 그의 논지에 따르면 양재천에서 나는 영국풍의 고전적인 시계를 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고, 그것이 태양광 가로등과 나란히 죽 늘어선 공간에서 초현실적 지식을 상기하는 것이다.

다시 다리 위로 올라가니, 쭈욱 뻗은 마천루와 푸르른 나무가 그 공기를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그 자연스러우면서도 기묘한 모습이, 마치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작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푸르고 싱싱하게 올라오는 키 작은 풀들, 그 언저리를 흐르는 시냇물을 딛고 하늘 높이 솟은 단단하고 육중한 타워 팰리스는 누구나 한번쯤 꿈을 꾸는 공간이지만 쉽게 들어갈 수 없는 <피레네의 성> 작품 속의 성처럼, 현실과의 간극을 이루며 허공 위에 무심하게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까지.

19세기 근대 화가들이 상상한 초현실 속 공간을 마법과 원초적 생명의 아르카디아가 혼합된 애니메이션의 절정. 그것을 혹시 현실 속에서 찾는다면 바로 이 언저리 양재천 쯤이 아닐까. 1999년 세워진 타워펠리스와 1995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양재천이 어우러진 풍경은 오늘날 서울 시민들이 꿈꾸는 현실적 성공의 거대한 상징과 함께 도심 속 자연의 아르카디아적 풍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혹은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양재천만이 지닌 독특한, 초현실적이면서도 실제의 목가적 풍광이 어우러진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 공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르페브르는 공간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공간을 만든다고 하였다. 즉 공간을 제대로 만드는 일은 그 안에서 머물면서 세상을 탐험하고 성찰하는 삶을 디자인한다는 것이다. (박삼철, 『왜 공공 미술인가』, 학고재)

양재천 자체는 이미 과거로부터 있었던 장소이나, 그 안에는 많은 ‘만들어진’ 사물과 행위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인공적인 공간은 다시 그 안에서 거닐고, 뛰고, 휴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사실 양재천은 하천수 정화 기능이라는 본래의 목적뿐 아니라 빽빽한 서울 빌딩 속 한 가운데에서 지친 도시인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준다는 측면에서, 도시 행정 계획에 있어서 모범 사례로 소개되는 만큼 그 효용성 면에서 성공을 거둔 곳이다.

그러한 효용성은 양재천을 흐르는 물과 초록의 나무와 행정가의 배려가 낳은 여러 사물들과 더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활력에서 비롯된다. 양재천에 들어서 산책로로 향하면 그 입구에서부터 ‘애완견 위생 봉투함’ 이 비치되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숲길과 함께 파고라와 수면 테크가 설치되어 있다. 파고라는 중간 중간 쉬어갈 수 있게끔 만든 그늘막으로, 그 모양은 뻗어나가는 선의 모양이다. 이 곳에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나와있는 직장인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봄날의 휴식을 즐기며 앉아 있다. 조금 더 걸으니 한 어린이가 “개구리 알이다!” 라고 소리친다. 소극적이지만 친수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수면 테크 주위에는 자잘한 알들이 서로 뭉쳐있다.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수면 테크를 따라 조금 더 강가로 나아갈 무렵, 생태 공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양재천의 왜가리가 이 날도 어김없이 강가를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비단 수질 개선 자체뿐 아니라, 수질 개선으로 인하여 살아 숨쉬는 또 다른 생명체들을 보며 자연을 죽이고, 자연을 되살리고, 다시 자연을 만드는, 인공(人工)의 위대함 혹은 강인함이 다가왔다.


한창 흐드러지게 핀 벚꽃 주위로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 옆으로 나있는 다리를 본다. 다리 초입에 세워진 돌판을 보니 “양재천 보행자교” 라고 씌여 있다. 산책로와 산책로 사이의 연결 통로이자, 다리의 난간은 손에 적당히 잘 잡히는 매끄러운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리 위에서 난간을 잡고 팔 운동과 허리 운동을 하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간간히 눈에 뜨였다. 다리가 운동 기구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공시설물의 사려 깊은 배치는 다른 디자인 행정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하다.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쭉 뻗은 양재천 산책로와 그 옆 자전거 도로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 도로는 빨간색, 산책로는 진한 초록색으로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게끔 색 구분을 명확하게 해 놓았지만, 산책하는 이들과 자전거 타는 이들의 흐름은 길의 구분 없이 지켜지지 않으면서도 무리없이 뒤섞여진 모습으로 그 공간을 같이 흐르고 있었다.


양재천. 자연과 인공물들이 마치 데페이즈망 기법처럼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곳. 이러한 느낌은 어쩌면 전 근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하이테크놀로지가 가속도적인 흐름으로 진행되면서 배치된 우리 역사의 실제적인 단면을 진솔하게 노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오히려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재천은 일탈 공간이자, 유토피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사무실을 ‘탈출’ 하여 햇살을 받으며 거닐고 있는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일 낮 시간. 여러 걱정들로부터 ‘탈출’ 하여 운동을 하고 있는, 오십 중반의 중년의 뒷모습에서, 다분히 아르카디아적인 유토피아가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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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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