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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스토리×디자인] 저성장 디자인 - 에코 디자인 보다 더 급진적인

2018-09-28

‘성장은 이제 그만!(Stop growth!)’ - 데니스 매도우스(Dennis Meadows) MIT대 교수는 로마 클럽(Club of Rome)이라는 싱크탱크 모임의 의뢰를 받아 1972년 작성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각 분야 전문가와 과학자들이 전 세계 국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경쟁적으로 달려든 과도한 소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는 소비주의(consumerism) 문화의 희열과 행복감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1950년대에 이어 ‘광고의 황금기’로 불린 1960년대 이후, 디자인은 광고와 더불어 물질적 풍요와 무한히 낙관적인 후기산업사회 경제와 대량생산재를 더 보기 좋고 더 매력적으로 꾸미고 포장해 매출 성장에 기여하는 ‘자본주의의 꽃’으로 부상했다.

 


세심하게 계산된 심플함의 새 발견. 리케르트 퍼브(Rikkert Paauw)가 디자인한 선반과 오브제(Shelves and objects) © Rikkert Paauw © Galerie Valérie Traan

 

 

이를 바라보던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Viktor Papanek)과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도 1970년대부터 물질의 과잉생산과 소비자들의 무분별한 소비 행위는 언젠가 인류의 운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의 후기산업사회는 이 모든 불편한 경고를 카펫 밑으로 쓱싹 쓸어버렸고, 대량생산·대량소비·유행에 민감한 만 가지 일회성 디자인 제품들은 현대인의 환경과 일상 속으로 깊이 침투해 자연스러운 현대 환경의 일부가 됐다.

 

국제 경제는 결국 1987년 ‘블랙 먼데이’로 불리는 주식시장 폭락, 1995~2000년 닷컴 버블에 이어서, 특히 2008~2009년 국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알아볼 수 없게 달라졌고 희희낙락하던 분위기는 사그라들었다. 선진국들이 탈 제조업화와 지식 및 정보경제를 바탕으로 한 저성장 경제를 용케도 지탱해 오는 사이, 경제 신흥국들은 국제 경제와 정치 변동과 위기마다 리스크에 노출된채 에너지 공급자 및 싼 노동력에 기반한 세계 공장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하이테크 시대 로우테크(low tech) 용품을 지향하며 신 트렌드를 반영하는 스위스 로산 에콜(ECAL)의 두 학생 다미 엔 루디(Damien Ludi)와 콜린 펠렉스(Colin Peillex)의 공동 작품 〈개조한 흔들의자(Rocking-Knit)〉는 앞뒤로 흔들리는 의자의 움직임을 머리 위에 설치한 직물기로 연결시켜 옷감을 짤 수 있도록 고안됐다. © ECAL © Nicolas Genta

 

 

세상은 고령화되는 동시에 청년 실업률은 높아졌고 안정적 직장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이코노미스트〉지 2018년 9월 15일 자 특별호에 따르면, 유럽과 북미인들은 미래에 과거에서와 같은 고도의 경제성장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 내다보며 사회는 과거보다 불공평해졌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정서와 민심은 다르지 않다.

 

그런 작금의 21세기, 디자인은 20세기에 해왔던 기업 매출 향상을 위한 부가가치라거나 마케팅의 시녀(1990년대 경영학 콘셉트)로서 경제성장과 산업에 기여하는 직종이 아니다. 디자인 교육계 역시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 방법론을 빌어 디자인을 ‘문제 해결’을 위한 창조 과정이자 해결책 중심적 창의적 사고 기법으로 접근하라 가르치는 추세다.

 


저성장 디자인은 대량생산품에 내장된 계획된 노후화에 저항한다. 앙트완 모네(Antoine Monnet)가 디자인한 주방용 믹서와 물주전자는 유행이나 고장에 휩쓸리지 말고 재사용·재활용하자고 제안한다. © Floris Hovers © Goods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더 이상 대기업이 생산하는 대량생산품을 고안하고 설계하는 일만을 창조적 원동력으로 삼지 않는다. 저마다 깊이 관심 있고 열정을 쏟는 사회적 목적의식을 찾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환경적으로나 자원적으로 가장 피해가 적은 디자인 창조 과정, 작업 방식, 도구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 후 공정한 가격과 적정한 이윤 모델에 근거해 판매하는 방법론을 지향한다.

 

특히 지난 10~20년 동안 국제금융위기와 제로성장 경제 환경을 경험하며 성장한 젊은 디자이너들은 인류 사회가 당면한 문젯거리를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행동가로서 직업적 역할을 재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세계 인구에게 한정된 천연자원과 식량을 공급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처치 곤란한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을까? 새것을 만들기보다는 재활용하고 업사이클(www.jungle.co.kr/magazine/26929) 할 수는 없을까? 인간의 활동을 위해 여태까지 써오던 천연자원과 석유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원과 분배 방식으로는 어떤 대안이 있을까?

 

오드리 비고(Audrey Bigot)가 디자인한 시리즈는 전기 에너지나 값비싼 냉장고 없이도 식품을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는 로우테크 식품 쿨러를 제안한다. © Biceps Cultivatus

 

 

현대 젊은이들이 디자인한 디자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보다 더 서스테너블한 디자인’이다. 그 결과 이같은 디자인 과정을 통해 탄생한 디자인 창조물들은 일부러 세심히 사료된 심플함, 재활용가능성, 근거리 지역 생산 체제, 로우테크 정신, 계획된 제품 노후화(programmed obsolescence)에 대한 저항, 대량생산·소비 패턴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제 모형 추구 정신을 표현하며 디자인 제품의 개념을 전환하고 디자인 용품은 단순 소비재라는 인식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더 이상 소유에 집착하기보다는 공유한다. 코워킹 공간이나 공유 메이커스 공방에서 공간, 툴, 지식을 나누며 함께 작업하는데 개방적이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도전해 본다는 새 의자 디자인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싼 가격에 쉽게 구입하고 무심코 쓰고 버리는 대량생산된 이른바 ‘모조품(ersatz objects)’을 만들기보다는 오래 쓸 수 있는 우수한 품질의 수공품과 고쳐 쓰는 수선을 선호한다.

 


사물의 감소 또는 빼기(subtraction)는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는 형태를 드러내 주고 균형과 사색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마틸드 펠레(Mathilde Pellé)는 공간 속 사물을 줄이기에 골몰하는 공간 디자이너다. © Serge Anton © CID

 

 

인류의 역사는 자연 속에 던져진 천연 상태 보다 한결 안전하고 안락하고 편리한 환경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원동력으로 발전해왔다. ‘혹시 지속 가능성과 책임감을 윤리적인 당위로 내세운 저성장 디자인(No Growth Design) 운동은 궁상스러움과 불편함을 뜻하는 ‘구석시 시대로의 회귀’ 더 나아가 문명의 퇴행은 아니냐’는 회의적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2017년 기준 76억의 지구 인구가 오는 약 30년 후 1백억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UN의 예측이 적중한다면 저성장 디자인론은 선택이 아닌 인류 생존과 공존을 위한 필수 라이프스타일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저성장 디자인의 철학이 그러할진대, 그들의 창조물 또한 디자인과 아트, 실용과 순수 콘셉트, 대량생산 기성품과 수공예품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실험성을 앞세우기 때문에 제품의 완성도나 외형적 매력도 면에서 개선할 점도 많다.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거리들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성장 디자인과 에코 디자인은 80~90년대 이후 출생한 신세대 디자이너들이 주도되어 계속 진행 중(work-in-progress)인 사회운동이자 열정임에 분명하다.

 


혁신은 반드시 새로운 것의 창조나 전통의 파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저성장 에코 디자인의 첫걸음은 이미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기성품의 슬기롭고 기발한 재활용과 업사이클링에서 출발한다. 플로리스 호버스(Floris Hovers)의 〈빈 플라스틱병으로 만든 보트(Flessenbootjes)〉 © Floris Hovers © Goods

 

 

유럽의 신세대 에코 디자인 트렌드를 총정리한 기획전 ‘성장은 이제 그만(The Limits to Growth! – Design and No-growth)>’은 벨기에 그랑-오르뉘 혁신과 디자인 센터에서 10월 21일까지 계속된다. 

 

글_ 박진아(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사진제공_ All images courtesy: CID - centre d'innovation et de design au Grand-Hor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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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디자인 #저성장디자인 #성장은이제그만 

박진아 칼럼니스트
미술평론가, 디자인 및 IT 경제 트렌드 평론가, 번역가이다. 뉴스위크 한국판, 월간디자인의 기자를 지냈고,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뉴욕 모마,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미술관 전시 연구기획을 했다. 현재 미술 및 디자인 웹사이트 jinapark.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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