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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느린 종이’가 전하는 지속가능한 삶

2019-06-08

나무로부터 만들어지는 종이에는 기나긴 시간이 담겨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까지의 수백년의 시간과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기까지의 수천 년의 시간. 

 

그래서인지 종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각거리는 촉감과 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특유의 냄새에 둘러싸일 때는 안정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빠르고, 풍부해진 요즘 시대에 종이가 사용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뚝딱하는 찰나에 생겨난 흔하디흔한 물건 같다. 필요 이상으로 큰 포장상자를 위해 더 많은 나무들이 베어지고, 화학적 가공이 더해진 종이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으니, 그런 종이를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레이프랩의 지스탠드. 재생지와 비목재지가 사용됐다. 

 

 

그레이프랩은 이런 종이의 이야기와 깊은 연관이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최소한의 자원과 기술을 사용해 제품의 소재, 제작 과정, 탄생부터 쓰임이 다해 버려질 때까지의 모든 라이프사이클을 디자인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 실험실로 재생지와 비목재지를 소재로 한 친환경 제품을 선보일 뿐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가진 발달장애 청년들을 고용, 아트 에디션 제품을 통해 수익을 배분하고 있다. 


 
대표적인 제품은 휴대용 거치대 지스탠드와 지플래너. 커팅이나 접착 없이 손으로 종이를 접는 오리가미 방식으로 제품을 제작해 종이의 쓰임을 최대한 연장하고, 발달장애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상생을 실천한다.

 

소외계층을 위한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연구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며 소외된 여성들과 수공예 장인들을 만나 ‘The brunch of grapes(포도송이들)’이라는 논문을 쓴 그레이프랩의 김민양 대표는 글로벌 피라미드식 경제구조를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 상생하는 포도송이 이론을 선택했다. ‘그레이프랩(포도실험실)’이라는 이름은 다른 송이와 함께 성장하는 포도처럼 서로 연결되어 결집되는 구조를 이상적이라 생각한 김민양 대표가 장애인, 여성들과 함께 이런 포도송이를 만들어가고자 붙인 이름이다. 

 


인더페이퍼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레이프랩의 ‘느린 종이’전

 

 

그레이프랩이 추구해온 환경적, 사회적 가치를 보여주는 전시 ‘느린 종이’가 두성종이의 인더페이퍼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버려진 것들을 되돌아보면 얼마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새로운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전시의 제목 ‘느린 종이’에는 환경을 위해 조금 느리더라도 천천히 함께 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버려지는 상자들로 만든 전시 포스터. 조금씩 다른 크기, 다른 모양이지만 무척 매력적이다. 

 

 

전시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실천한다. 조금씩 다른 크기와 모양을 하고 있는 전시 포스터는 버려지는 상자들을 재활용한 것이고, 잉크 대신 레이저 커팅으로 글자를 표현했으며, 리플릿은 접어서 스마트폰 및 패드 거치대로 사용할 수 있다. 전시 오프닝에서는 바나나 잎을 접시로 활용하고, 텀블러를 지참하게 해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한 오프닝 파티를 진행했다. 

 


‘버려지는 것에 새로운 시간을’. 다섯 가지의 재생지 및 비목재지를 소개한다. 

 

 

‘느린 종이’는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섹션은 ‘버려지는 것에 새로운 시간을’을 주제로 두성종이의 다양하고 새로운 재생지와 비목재지를 선보인다. 달콤한 초콜릿을 만들기 위한 카카오 콩을 제외하고 버려지는 많은 양의 카카오 껍질을 활용한 종이, 내부 코팅 성분 때문에 재활용되지 못하고 버려질뻔한 테이크아웃 커피컵이 영국의 특수한 시스템을 통해 아트지가 된 이야기, 짧은 생을 마감하는 택배 상자의 재탄생, 나무 대신 나뭇잎과 천연재료로 만들어져 나뭇잎의 색과 향을 머금고 있는 종이, 맥주를 생산하고 남은 맥아 찌꺼기와 맥주병 라벨에서 재탄생한 독일의 종이 등을 만날 수 있다. 

 


‘종이 한 장의 기하학’. 그레이프랩의 최소한의 자원과 적정기술이 전시된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그레이프랩의 최소한의 자원(재생지와 비목재지)과 적정기술(손으로 접는)을 볼 수 있다. ‘종이 한 장의 기하학’은 그레이프랩의 접는 기술을 의미한다. 전시장 가운데 펼쳐져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지스탠드로, 그레이프랩의 오리가미라는 적정기술을 통해 탄생한 견고한 이 구조물은 10kg 이상의 무게를 버티고 지지하게 된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그레이프랩의 제품들이 완성되기까지 수없이 그리고 접었을 과정들이 전시된다. 

 


그레이프랩이 쌓아온 종이에 대한 연구들을 라이브러리 형식으로 전시한 g. library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재생지와 비목재지를 만날 수 있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주제로 지스탠드, 지플래너 등 그레이프랩의 제품들이 나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접기에 관한 수많은 고민의 흔적과 함께 종이와 손으로 접는 기술만으로 완성된 오브제들이 전시돼 있다. 벽에 설치된 g. library는 친환경 종이로 제품을 제작하는 그레이프랩이 그동안 쌓아온 종이에 대한 연구와 자료들로, 재생지와 비목재지를 총망라한 페이퍼 라이브러리다. 두성종이의 다양한 재질과 색의 친환경 종이들을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전시했다. 

 


‘느리지만 함께하는 가치’에서는 그레이프랩의 궁극적인 목표를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 섹션에서는 발달장애 청년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한 발달장애 청년 작가 에디션을 전시, 그레이프랩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느리지만 함께하는 가치’를 전한다. 맞은편에는 작가들의 그림이 들어간 종이봉투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스탠드를 만드는 과정에 버려질 뻔한 종이를 재활용한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끈을 손잡이로 활용한 디테일도 인상적이다. 

 

그레이프랩이 ‘느린 종이’를 통해 전하는 것은 종이로 만드는 지속가능한 삶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디자인과 상생을 위한 컬래버레이션은 의미 있는 제품을 넘어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조금 느리더라도 함께 하는 가치를 알려주는 그레이프랩과 함께 종이, 환경, 지속가능, 그리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보면 어떨까. 전시는 6월 29일까지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인더페이퍼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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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종이 #지속가능 #그레이프랩 #인더페이퍼갤러리 

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이야기,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의 모습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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