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7
소소문구는 ‘쓰는 사람’을 이렇게 정의한다. ‘손으로 사소한 끄적임부터 구체적인 설계까지 나름의 목표를 위해 종이 위에 자유롭게 쓰는 사람’. 눈치챘겠지만 쓰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소문구는 그래서 쓰는 사람을 위한 문구를 만든다.
생각을 흩어지지 않게 모을 수 있도록 한 ‘생각집(생각集)’이나 누군가의 삶이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도와 독립출판을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커스터마이징 노트 ‘알책’, 컴퓨터의 로그 데이터를 이용해 버그를 해결하는 것처럼 사소한 기록들로 내일을 향한 방향을 찾도록 해주는 31일을 위한 ‘데일리 로그 노트’ 등이 눈에 띈다. 이 제품들에선 기능성을 넘어 쓰는 행위와 그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찾을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읽힌다.
소소문구의 디깅노트 (사진출처: sosomoongoo.com)
그중에서도 특히 눈이 가는 노트가 있다. 이름하여 ‘디깅노트’. ‘digging: 파다’라는 의미처럼 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아이디어를 모으고 정리해 나만의 관점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노트다. 디깅노트는 ‘작고 깊은 노트’라는 제품의 단점을 보완해 지난 8월 리뉴얼 출시된 것으로, 표지엔 파는 것을 상징하는 삽이 그려져있다.
내지는 화려하진 않지만 생각을 꾸준히 적고 모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디자인됐다. 디깅할 수 있는 그라운드의 개념으로 센티미터가 표시된 모눈을 넣었는데, 모눈 공간이 크게 하나로 구성된 원 그라운드 스타일과 작은 두 개의 모눈으로 구성된 투 그라운드 스타일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모눈이 디깅의 원본이 되는 내용을 적는 공간이라면 옆에 마련된 무제 공간은 그것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담는 공간이다. 괄호와 인덱스 태그 표기란은 메모를 섬세하게 완성하고 나의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컬러와 네이밍에도 땅과 디깅의 개념을 담았다. 컬러는 총 6가지로, 비옥한 토양, 촉촉한 풀밭, 붉은 흙, 숲속의 이끼색, 갯벌색, 밤의 사막 등이다.
'아임디깅' 전시 포스터 (사진제공: 소소문구)
디자인 문구 브랜드 소소문구는 이 디깅노트 출시를 준비하면서 전시를 함께 기획했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록을 쌓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전시 ’I’m Digging__. #아임디깅’이다. ‘관심을 관점으로 키우는 기록’이라는 부제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디깅을 보여준다.
특히, 디자이너, 아티스트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참여자들의 라인업이 눈길을 끈다. 참여자들은 디자이너, 운동, 독립서적, 브랜딩 등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지난 4월 스틸북스에서 열린 소소문구의 ‘나 해보려고’전과도 연결된다. ‘데일리 로그 노트 썬라이즈’의 ‘불광천 노을로부터 영감을 받아 디자인된 이야기’가 담긴 이 전시에서 소소문구는 일상의 관심사에 대해 설문을 진행했고, 관람객들의 관심사를 7가지 정도로 추려 디자이너, 아티스트, 크리에이터, 운동선수, 브랜드 전문가, 마케터 등 추려진 관심사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찾아 섭외했다.
전시에는 윤예지 일러스트레이터, 이미림 브랜드엑스 웹디자이너, 이현아 코사이어티 디자이너, 정효진 말리북 편집디자이너, 진준화 핀즐 대표, 이근백 마더그라운드 대표, 소호 모빌스그룹 대표, 민진아 키오스크키오스크 대표, 류윤하 스탠다드에이 실장, 김수연 에어슬랜드 대표, 김미래 쪽프레스 편집자, 김예지 독립출판작가, 이자람 음악가, 김지아 국가대표 요트선수, 올리부 페이스북 마케팅 상무, 류형규 카카오 기술이사, 강호준 오뚜기 마케터 등 17명이 참여해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자신의 디깅노트를 선보인다.
활동 분야는 다르지만 참여자들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지녔다. ‘무언가에 푹 빠져 깊이 파고드는 사람, 경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사람, 어른이 되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다.
17권의 디깅노트가 스탠다드에이 2층과 3층 곳곳에 전시돼 있다. (사진제공: 소소문구)
이들은 약 100일간 디깅노트를 써 내려갔고, 그 기록들이 담긴 디깅노트들은 스탠다드에이 2층과 3층 공간에 전시됐다. 스탠다드에이는 2014년 브랜드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소중하게 담아둘 만큼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브랜드라는 점에서 소소문구와 공통점이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해 디깅노트를 작성하기도 한 스탠다드에이는 전시를 위한 집기를 직접 디자인, 제작하기도 했다.
참여자들의 디깅노트를 채우는 작업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라는 조건 외엔 어떠한 디렉션도 없이 진행됐고, 그렇게 완성된 17권의 디깅노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아티스트의 드로잉, 작가의 일상, 국가대표 선수의 쉼과 노력 등 마음을 토닥이는 내용들과 브랜드를 이끄는 리더의 생각, 유명 마케터의 기획하는 방법 등 일에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하고 싶은 아티스트에 대해 기록한 진준화 핀즐 대표의 디깅노트
고양이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김예지 독립출판작가의 디깅노트
놀라운 그림 실력을 보여주는 이근백 마더그라운드 대표의 디깅노트
강호준 오뚜기 마케터의 디깅노트는 가장 인기가 높은 디깅노트 중 하나다. (사진: Design Jungle)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자리에 앉아 디깅노트를 한 권 한 권 꼼꼼하게 읽으며, 메모를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모든 디깅노트에는 참여자 제각각의 개성이 담겨있다. 꼼꼼한 기록으로 기록의 ‘정석’을 보여주는 노트, 러프하지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열정이 느껴지는 노트, 매일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네 컷 만화로 기록해 놓은 노트, 자신이 취미를 기록한 노트도 있다. 기록한 페이지보다 백지가 더 많은 노트도 있지만 이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다.
2층에는 원 그라운드 스타일의 디깅노트가, 3층에는 투 그라운드 스타일의 디깅노트가 배치돼 있는데, 노트를 가만히 살펴보면 텍스트적인 기록을 하는 참여자들의 특징과 디자인 및 일러스트를 하는 참여자들의 특징 등 각각의 기록 방식도 발견할 수 있다.
1층에는 관점카드를 작성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디깅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과 굿즈도 전시된다. (사진제공: 소소문구)
전시는 다른 사람의 디깅을 관찰하는 동시에 나의 디깅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한다. ‘디깅그라운드’라 이름 붙여진 리플릿에 영감을 주는 디깅노트의 도장을 찍으며 ‘디깅씨앗’을 심어볼 수 있고, 전시 관람 후엔 1층에서 ‘관점카드’에 디깅에 대한 소감을 기록할 수도 있다. 리플릿 도장 작업을 마치면 발급해주는 디깅카드 명함은 스스로를 위한 디깅을 다짐시켜주기도 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디깅노트들은 누군가에겐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고, 누군가를 슬럼프로부터 건져올리기도 한다. 이 디깅노트들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잊고 있던 나의 것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나를 디깅하는 것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일 테니까.
타인의 디깅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아임디깅’전은 11월 22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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