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9
유럽의 소도시나 농촌 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단정한 붉은 지붕, 정갈한 담장, 화분이 놓인 창틀,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 거리 풍경. 이 정돈된 미관의 비밀은 의외로 ‘간판’에서 시작된다.
독일의 알프스 자락 마을, 오스트리아의 호숫가 마을, 체코의 언덕 도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간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령 있더라도 크고 요란한 간판 대신, 목재로 만든 입간판이나 건물 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수공예형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거리 풍경이 하나의 장면처럼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마을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주는 핵심 자산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방정부 차원의 강력한 경관 규제가 존재한다. 간판의 크기, 색상, 위치, 조도까지 법적으로 제한하며, 일부 마을은 사용 가능한 서체까지 지정해 놓는다.
둘째, 주민들의 인식 수준이 높다. ‘내 집의 외관이 곧 마을의 얼굴’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개인의 표현도 공동 경관 속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자발적으로 조율된다.
셋째, 마을 자체가 ‘관광자산’이라는 전략적 인식이 있다. 경관은 곧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경쟁력이자, 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인 것이다.
반면, 한국의 지방 소도시와 농촌의 현실은 어떨까.
덩치만 큰 입간판, 색깔만 현란한 현수막, 값싸 보이는 LED 간판들이 마을 골목과 도로를 어지럽힌다. 아무리 예쁜 집이나 정겨운 담장이 있어도, 간판 하나가 모든 것을 가려버린다. 그 간판들이 외치는 메시지는 대개 “제발 우리 가게에 들어오세요”라는 상업적 외침뿐이다. 마을의 이야기도, 건물의 개성도, 지역 주민의 감수성도 간판 뒤에 묻혀 버린다.
물론 지자체마다 ‘간판 정비 사업’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회성 공공디자인 예산으로 획일적 디자인을 강요하다가 오히려 주민의 반발을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규제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실행력이 부족하거나, 방향이 크게 어긋나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미관의 문제가 아니다.
지방 소도시와 농촌 마을의 경관은 곧 그곳의 정체성이자 브랜드다. 간판을 그대로 두면 마을이 가려지고, 간판을 걷어내면 비로소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건물의 얼굴, 마을의 표정은 간판이 아닌 그 자체로 빛나야 한다.
결국 한국 농촌 경관의 가장 큰 ‘문제아’는 간판이었다.
그 간판이 마을을 가리고, 건물의 아름다움을 덮어버렸다. 예쁜 건물과 정겨운 마을을 왜 굳이 간판으로 가리려 하는가. 간판을 조금만 줄여도, 예쁜 마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단순한 진실이야말로, 이번 유럽 한 달 살기 여행에서 얻은 가장 실용적인 수확이었다.
글, 사진_ 정석원 편집주간(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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