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3
디자인 업계에서 ‘을’이라고 하면 대부분 디자이너 개인을 떠올린다.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수정 요구, 계약서 없는 작업, 불투명한 심사 구조… 모두 디자이너가 당하는 부당함의 목록이다.
그러나 이 구조의 가장 밑바닥, 혹은 가장 외로운 자리에는 또 다른 ‘을’이 있다. 바로 디자인 기업의 대표다.
대표는 겉으로 보기엔 ‘갑’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원을 채용하고, 계약을 따오고, 회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회의실에서는 직원들의 시선이, 클라이언트 자리에서는 발주자의 기대가 모두 그를 향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자리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립이 도사린다.
대표는 양쪽에서 밀려오는 압력 속에서 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디자인 기업 대표는 사실상 ‘을 중의 을’이라는 역설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위에서는 클라이언트, 아래에서는 직원
대표가 ‘갑’인 순간은 짧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혹은 면접에서 “합격입니다”라고 말할 때뿐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곧장 ‘을’로 내려앉는다.
클라이언트는 언제든 연락을 취해 디자인을 수정하라고 요구한다.
“이건 이렇게 고쳐주세요.”
“이 방향은 우리 취향에 맞지 않네요.”
마치 회사 대표가 디자이너 개인처럼 다루어진다. 일정이 변경되면 대표는 직접 밤을 새우거나 직원들을 설득해 주말 근무를 부탁해야 한다.
문제는 그 설득이 언제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압박이, 다른 쪽에서는 직원들의 피로와 불만이 쏟아진다. 대표는 그 중간에서 갈등을 완화해야 하지만, 결국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위에서는 갑질, 아래에서는 불만. 사장은 늘 죄인이죠.”
20년 차 디자인 기업 대표의 이 짧은 고백은 업계 구조의 본질을 꿰뚫는다.
수익과 인건비 사이의 계산법
대표의 고충은 감정노동만이 아니다. 가장 무거운 짐은 경제적 압박이다.
클라이언트는 언제나 가격을 낮추려 한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은 업계의 상투어가 됐다. 반대로 직원들은 합당한 보수와 처우를 요구한다. 이 두 축이 맞부딪히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대표 자신의 몫이다.
“대표니까 많이 벌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실제로 업계의 많은 대표들은 몇 달간 무급으로 버티며 회사를 지킨다. 계약이 취소되거나 대금이 밀리면, 직원들 월급은 제때 챙겨주면서 본인은 신용카드로 생활비를 돌려막는다. 회사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삶을 저당 잡히는 셈이다.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에게 월급 주고 나면 제 통장에는 항상 0원입니다. 그럼에도 다음 달을 위해 다시 뛰어야 합니다.”
이것이 디자인 기업 대표의 가장 현실적인 초상이다.
디자인 기업 대표들은 대체로 외롭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직원도, 클라이언트도 모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림: AI 생성)
직원들의 권리와 회사의 생존 사이
직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건 당연하다. 휴가, 근무시간, 안전한 작업 환경, 적절한 업무량. 모두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작은 디자인 기업 현실에서 이를 완벽하게 보장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공공기관 발주 프로젝트나 대기업 하청 구조에서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요구 조건은 세밀하고 일정은 빡빡하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회사 내부로 흘러들어오고, 결국 대표는 직원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이번 주말만 도와주세요.”
“조금만 더 힘내면 이번 프로젝트 끝납니다.”
대표 입장에서는 회사의 생존을 위한 간절한 요청이지만, 직원들 입장에서는 반복되는 희생 요구로 느껴진다. 회사와 직원 사이의 신뢰가 균열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대표도 감정이 있다
사람들은 대표를 흔히 강철 멘탈을 가진 인물로 생각한다. 결정을 내리고 조직을 이끄는 존재이니 당연히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의 대표는 다르다.
밤새 클라이언트의 전화를 받으며 마음이 무너지고, 아침 회의에서 직원들의 불만을 들으며 자책이 겹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감정은 뒷전이 된다.
“대표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기 힘듭니다.”
직원들에게 하소연하면 불안감을 줄 수 있고, 클라이언트에게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국 대표는 감정을 홀로 삼켜야 한다. 가장 많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고립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립된 대표, 그리고 필요한 연대
디자인 기업 대표들은 대체로 외롭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직원도, 클라이언트도 모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대표들은 같은 업계 사람들과도 거리를 둔다. 경쟁사의 대표와는 불필요한 정보 유출을 우려해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 결국 대표들이 찾는 건 인접 분야의 대표들이나 경쟁 관계가 없는 동료들이다.
이런 만남은 개인적 친분보다 협회나 네트워크 같은 조직적인 장에서 가능하다. 협회는 단순한 친목을 넘어서, 고립된 대표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는 ‘피난처’가 된다. 때로는 법적 자문을, 때로는 사업 노하우를 서로 나누며 고립을 덜어내는 것이다.
‘을 중의 을’이 바라는 것
대표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공정한 계약, 합리적인 일정, 상호 존중.
이 세 가지만 지켜진다면 업계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다.
클라이언트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후려치지 않고, 직원들이 회사의 재정 구조를 조금만 더 이해하며, 대표가 감당해야 하는 압박이 완화된다면 작은 디자인 기업의 생존율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함께 살아남기 위한 연대
<을의 눈물> 시리즈가 다루는 건 단순히 피해자의 하소연이 아니다.
디자인 업계의 모든 주체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서로를 소모시키는지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대표 역시 이 구조 속에서 ‘을’이다. 그들의 생존이 곧 직원의 생존이고, 직원의 생존이 곧 업계의 건강과 직결된다.
대표가 고립된 채 무너진다면 직원과 업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관계의 구조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그리고 대표가 동등한 파트너로 존중받는 구조.
그 길만이 디자인 업계가 지속 가능해지는 유일한 해법이다.
기획취재_ 정석원 편집주간(jsw0224@gmail.com) /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을의눈물 #디자인기업대표의외로운경영 #디자인산업의구조적문제 #지속가능한디자인 #디자인회사의현실 #직원과대표사이 #갑을의역설 #디자인정글기획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