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6
<전업작가와 아마추어가 함께 전시하고, 서로 다른 인생이 예술로 연결되는 문화공동체>
전시는 흔히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는 자리로 생각된다. 작품을 걸고 관객에게 보여주며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전시의 중요한 목적이다.
그런데 전시가 꼭 그래야만 할까.
작품의 수준과 경력을 겨루기보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의 삶을 나누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계기로서의 전시도 가능하지 않을까.
충북 음성 바스엑스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예술이음’의 첫 번째 전시 〈여흔(餘痕), 생명을 창조하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전시에는 15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참여자 모두가 전업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와 사회생활을 마친 뒤 그림을 시작한 사람들이 한 전시장에 나란히 작품을 걸었다.
기업 CEO로 활동했던 사람도 있고, 무용가와 수학교사 출신도 있으며, 종교인의 길을 걸었던 사람도 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사람과 인생 후반전에 처음 붓을 제대로 잡은 사람이 같은 전시의 참여작가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이음’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드러난다.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경계를 낮추다>
미술계에서 전업작가와 아마추어 작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한다. 활동 경력과 전시 횟수, 작품 판매와 수상 실적 등 작가를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경력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나 ‘예술이음’은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만든다.
전업작가와 이제 막 작품활동을 시작한 사람을 구분하기보다, 예술을 좋아하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앞세운다.
그렇다고 전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수준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할 때 전문성은 새로운 역할을 갖는다.
전업작가는 오랫동안 축적해온 창작 경험과 시각을 나눌 수 있고, 뒤늦게 예술을 시작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전혀 다른 세계의 경험을 가져온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경험을 교환하는 관계다.
기업경영을 했던 사람에게는 기업인의 시선이 있고, 교사에게는 교육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이 있으며, 무용가에게는 몸과 움직임에 대한 감각이 있다.
그것들이 그림이라는 하나의 매개를 통해 만난다.
따라서 이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뛰어난 작품을 내놓았느냐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예술을 통해 연결되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번 전시에는 15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참여자 모두가 전업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와 사회생활을 마친 뒤 그림을 시작한 사람들이 한 전시장에 나란히 작품을 걸었다.
<전시는 결과가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번 전시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더 보인다.
전시를 모임의 최종 결과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동호회 전시는 일정 기간 함께 작품활동을 하고 마지막에 결과물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시가 끝나면 활동도 한 단락을 맺는다.
하지만 ‘예술이음’에서 전시는 오히려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매개에 가깝다.
함께 작품을 준비하고, 전시를 만들고, 서로의 작품을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만남과 교류를 이어간다면 전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이런 모임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더욱 필요해질 수 있다. 은퇴 이후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퇴직했다고 해서 한 사람의 경험과 능력까지 함께 은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생활의 부담에서 조금 벗어난 뒤 그동안 미뤄두었던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악기를 배우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취미 프로그램만이 아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함께 나눌 사람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관계망이다. ‘그림’은 그 관계를 만드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낯선 사람들과의 연결’은 은퇴한 디자이너들에게도 필요하다>
‘예술이음’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한 디자이너들을 떠올렸다.
수십 년 동안 디자인 현장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뒤 그림이나 사진, 공예, 조각 등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다.
디자인을 평생 업으로 삼아온 만큼 창작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다.
은퇴 이후에도 꼭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끼리만 만나야 할까.
디자인계에도 선후배 모임과 동문회, 각종 협회와 친목모임이 많다. 이런 관계 역시 소중하지만 오랫동안 같은 분야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다시 같은 사람들끼리만 만난다면 새로운 자극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인생 후반전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디자이너와 기업인이 만나고, 건축가와 무용가가 만나며, 교사와 사진가가 만나고, 전업작가와 은퇴한 직장인이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과거의 직함보다 지금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대표이사도, 교수도, 교사도, 디자이너도 한 사람의 ‘작가’가 된다.
어쩌면 은퇴 이후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경력을 계속 확인해주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 새로운 친구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전시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시의 전부일 필요는 없다. 작품을 매개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다시 새로운 문화활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작품의 수준보다 ‘사람의 다양성’이 만드는 시너지>
전업작가와 아마추어 작가가 함께하는 모임에는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바로 ‘다양성’이다.
전문가들끼리 모이면 수준 높은 담론과 작품이 나올 수 있지만 생각과 경험의 범위가 비슷해질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서로 다른 직업과 세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예측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업경영을 했던 사람이 예술가의 생각을 듣고, 예술가는 기업인의 경험을 접한다. 무용가의 몸에 대한 감각이 회화와 만나고, 교육자의 경험이 전시 프로그램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이것이 단순한 친목을 넘어서는 문화적 네트워킹이다.
그렇다면 동호회의 가치 역시 회원 수나 작품 수준만으로 평가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있는가.
그 만남에서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관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이런 기준도 중요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좋은 전시공간이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
여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 있다. 바로 ‘공간’이다.
이번 전시가 열린 음성 바스엑스포 갤러리는 일반적인 화이트큐브형 상업 갤러리와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과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소파에 앉아 쉴 수도 있다. 작품을 보고 바로 돌아가는 전시장이라기보다 오래 머물면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에 가깝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곳이 임대료 부담 없이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취미로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울 인사동을 비롯한 상업 갤러리에서 몇 주씩 전시하는 비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전시장 대관료에 작품 운송과 설치, 도록과 홍보, 행사 비용까지 더하면 전시 자체가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된다.
그래서 지역에 이런 공간이 많아질 필요가 있다. 꼭 새로운 미술관을 크게 지을 필요도 없다.
지역의 유휴공간이나 기업의 문화공간, 오래된 창고, 사용 빈도가 낮은 공공시설 등을 작은 전시장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료 전시장’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전시하고,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함께 작품을 준비하고, 전시를 만들고, 서로의 작품을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만남과 교류를 이어간다면 전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지역 활성화란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만드는 일>
지역 활성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관광시설이나 축제, 대형 문화시설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지역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한 달 동안 한 동호회가 전시하고, 다음 달에는 사진동호회가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은퇴한 디자이너와 지역 청년들이 함께 전시한다고 생각해보자.
전시가 바뀔 때마다 참여작가와 가족, 친구들이 지역을 찾는다. 사람들이 만나고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주변을 둘러본다.
작은 전시 하나가 사람을 움직이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전시와 함께 작은 음악회, 작가와의 대화, 워크숍, 플리마켓 등을 결합한다면 전시장은 자연스럽게 지역의 문화 사랑방으로 발전할 수 있다.
대규모 축제를 한 번 개최하는 것보다 이런 작은 활동이 일 년 내내 이어지는 것이 지역에는 오히려 더 지속적인 활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예술이음’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결국 작품의 장르나 기법이 아니었다.
‘이음’이라는 방식이었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잇고, 현역과 은퇴자를 잇고, 서로 다른 직업을 살아온 사람을 잇는다. 작품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공간을 잇고, 다시 그 공간과 지역을 연결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시의 의미도 달라진다전시는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앞으로 자신의 인생 후반전을 예술과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들에게 꼭 전문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필요는 없다.
잘 그리는 것보다 계속 그리는 것이 중요할 수 있고,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작품을 걸고 서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지역 곳곳에 생긴다면 개인에게는 새로운 삶의 공동체가 생기고 지역에는 새로운 문화적 활력이 생긴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작품을 걸고,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예술을 핑계 삼아 계속 만나는 것.
이번 음성 바스엑스포에서 열린 ‘예술이음’의 첫 번째 전시는 우리에게 꽤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전시는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물론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전시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시의 전부일 필요는 없다. 작품을 매개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다시 새로운 문화활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쩌면 앞으로 지역에 더 많이 필요한 것은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를 넘어, 작품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전시인지도 모른다.
글, 사진_ 정석원 편집인(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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