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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궁궐과 도시 이야기

2013-05-14


역사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부터, 고대시대로부터 시작된 역사시대에 걸친 건축의 역사는 집권자와 가진 자의 건축이 주축이 되어 기술되어진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역사적 건축물은 대부분이 왕실의 공간인 궁궐과 귀족과 관리들로 구성된 집권층의 주거건축, 그리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은 종교건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궁궐은 세계 모든 나라의 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크며, 각 나라의 대표성을 가진다.

글 |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기사제공 | 건축디자인신문 에이앤뉴스


우리궁궐의 Identity

우리건축의 궁궐은 진정한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학부시절 한국건축사 시간에, 혹은 서울 궁궐답사에 경복궁을 첫째로 찾아갔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학생들, 혹은 비전공자들과의 답사할 때 경복궁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우선 창덕궁을 추천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차이는 우리 것과 다른 나라의 것 이라는 차이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경복궁은 중국의 형식을 빌렸으나, 창덕궁은 우리의 형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경복궁이 중국의 형식을 빌렸지만 여러 디테일에서 우리의 모습을 적용하여 우리의 것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중국의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요즘은 구글 지도와 같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위성사진을 통하여 각국의 유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도면을 구해야 알 수 있었던 다른 국가의 유적을 이제는 컴퓨터 하나로 바로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중국의 낙양, 시안, 남경, 그리고 북경과 같이 시대별 나라의 수도를 찾아보면, 궁궐의 유적이 잘 나타나 있다. 네모반듯한 궁성에 남북 축으로 이루어진 건물 군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주나라시대부터 만들어진 도시와 건축을 구성하는 법식, 즉 주례에 나타난 왕성도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도 초기 고구려시대인 압록강변의 집안과 평양천도 후 지어진 안학궁 유적을 보면, 중국과 같이 사각형의 궁성에 남북의 자오선 축으로 이루어진 건축 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586년 고구려 후기에 지어진 평양성(장안성)은 이전의 궁성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 지세를 이용한 유선형의 성곽과 함께 북성·내성·중성·외성의 4개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의 중국의 형식에서 벗어난 한국형의 궁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후 고려의 궁성과 궁궐은 고구려의 법식을 따랐으며, 이러한 한국식 궁궐조성 법식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처음 궁궐을 답사하는 지인들에게 언제나 창덕궁을 우선 소개한다.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궁궐의 Identity를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궁성은 피난용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성지도와 도면을 통해본 고구려와 백제,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의 궁성을 조사하면, 매우 흥미로운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수도는 언제나 넓은 평지로, 도시의 중앙 북쪽에는 궁궐을 배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궁성과 궁궐은 중국의 그것과 다르다. 산이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수도를 세우고, 도시의 중앙에 궁궐을 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궁궐은 주산에 연계된 위치에 배치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천년 넘게 중국의 영향아래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던 우리의 국가 수도는 전쟁에서 방어를 우선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입지하였기 때문이다. 궁궐도 유사시에 북쪽의 주산으로 피난을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모두 전쟁을 위한 배치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궁성과 궁궐의 배치는 관아와 주거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관아도 중국의 법식에 따른 다면, 도시의 북쪽 중앙에 배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산의 위치에 따라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으며, 주거도 주로 산의 경사지에 입지하여 궁궐과 관아의 배치를 따라 하여 항시 유사시에 대비해야 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초기의 한성은 중국의 도시였다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 산의 지세를 이용하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하기위해, 자연스러운 형태의 도시모습을 구축했던 우리 궁궐과 도성은 중국에서 비롯된 바둑판식의 도시계획과 차별되어 독자적인 건축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그러나 조선은 고려에 이어 한반도의 주인이 되면서 이전과 다른 형식의 도시계획을 시도하였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었으며, 그리고 그 조선의 주인은 유교를 기본 사상으로 하는 사대부였다. 사대부들은 군부세력인 이성계를 앞세워 사상의 혁명을 성공시켰으며, 배경사상은 유교의 새로운 주자학(성리학)이었다. 사대부들은 고려말기 국교였던 불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성리학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배경에는 중앙집권적 왕권주의를 분권적 신권주의로 사회개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부패했던 고려왕실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새로운 사상과 개혁정치는 많은 이의 동조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친중화주의, 맹목적인 중국 사랑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14세기 중국을 통일한 한족국가였던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새로운 수도건설에도 적용되었다. 전통적 중국의 도시계획 개념인 주례의 왕성계획에 따라 궁궐의 공간구성, 종묘와 사직의 배치, 관청가와 시장(종로), 성균관, 궁성의 성문계획 등 도시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대부분 시설이 중국의 도시계획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의 왕성계획개념인 『주례 고공기』의 「장인」을 보면, 궁궐과 도성, 그리고 읍성을 계획할 때는 왕, 제후, 도에 이르는 계급별 건축규모의 차이를 두게 하였다. 조선은 정궁인 경복궁을 제후급에 해당되는 계획을 하였다. 특히 궁궐에서 정전에 이르는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의 3문제도와 성균관의 반촌개념을 보면 중국의 제후의 등급으로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중앙관학인 성균관은 현재 서울대학교와 같이 최고의 국립대학이었다. 그러나 성균관 또한 중국에서 수도가 아닌 지방 제후도시 학교인 반궁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한성계획 시 중국으로부터 간섭이 있었거나, 아님 사대부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여 도시를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초기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의 전통파괴와 일본건축화, 해방 후 친미세력에 의한 무분별한 미국식 현대건축의 도입과 같은 근대의 모습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혹자는 우리보다 앞선 문명의 건축시스템을 도입하여 전근대적인 우리 전통건축, 우리건축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동의할 수 없는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과정은 외세와 기득권층에 의한 걸러지지 않는 맹목적 도입이 아닌, 우리의 실정에 맞는, 우리 전통과 융합되어 점진적 도입을 통한, 그리고 국민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진정한 건축문화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중국 해바라기 같은 사대부들과 서양 근대사상에 매료되어 중독된 채 우리 자신을 외면하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왠지 씁쓸한 순환의 역사가 나의 가슴을 저미게 한곤 한다.


경희궁에는 특별한 무언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의 궁궐지가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고려의 궁궐유적은 북한지역인 평양과 개성에 있으며, 백제와 신라유적은 공주, 부여, 경주에 있으나 아직 발굴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궁궐들이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유적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궁궐을 접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경복궁과 창덕궁을 말하곤 한다. 조선의 궁궐은 5대궁이 있는데 법궁(정궁)인 경복궁,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있다. 법궁은 가장 중요한 궁궐로 왕과 왕세자의 즉위식과 결혼식,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 등 나라의 중요한 업무와 행사를 하던 곳이다. 이궁은 임금이 평상시에 업무를 보거나 휴식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한 대부분의 궁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민들에 의해 불타 소실되었고, 이후 광해군은 경복궁을 내버려 둔 채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였으며,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하였다. 200년 동안 법궁이었던 경복궁시대가 지나가고 창덕궁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당시 풍수가들이 주장한 2대 궁궐의 창건을 받아들여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을, 서남쪽에 경덕궁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이후 규모가 큰 인경궁은 인조의 왕실주택을 짓기 위해 해체가 되었으며, 경덕궁은 경희궁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존치하게 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경희궁은 비운의 왕 광해군이 야심차게 건설한 궁궐이었다. 광해군은 일본에게 국토가 유린당한 임진왜란의 원인을 기득권층인 양반, 즉 사대부들이라 생각하였다. 맹목적인 중화주의와 권력과 집권을 위한 사상으로 변질한 유교를 그 원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경희궁을 건설할 때, 승려 성지, 중국인 시문용, 그리고 풍수가 김일룡 등이 중심이 되어 공사를 진행하였다. 기존의 집권층 유학자들을 배제한 채, 개혁을 추진하고자하는 원동력을 상징적인 궁궐창건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였다.
특히 경희궁에는 편전인 자정전이 있음에도 광해군은 국정의 업무를 흥정당에서 하였는데, 흥정당은 누각이 있는 건축물에 온돌과 마루가 있는 일반 주택과도 같은 모습의 건축이었다. 왕이 일반인들과 같은 높이에서 생활함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전의 왕들이 사용한 마루와 전돌로 이루어진 침대생활의 입식공간이 일반백성들이 주로 사용한 온돌의 좌식생활로 전환을 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현재 우리생활의 기본 방식인 좌식이 공식적으로 모든 건축공간에 적용된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백성들과 가까이 하고자 그들의 건축을 궁궐에 적용했던, 잠잘 때 자신의 머리를 백성과 같은 위치로 하고자 했던, 그래서 기득권층에 미움을 받아 실권했던 건축군주 광해군을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궁궐마당의 박물관

1995년 8월 15일, 우리는 TV앞에서 감격적인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광복50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마당에 있었던, 36년간 우리를 치욕의 시간을 보내게 하였던 통치건축물이었던 총독부청사를 해체하는 모습이었다. 학부시절인 1993년, 학생회에서 총독부 해체에 대하여 여러 학우들과 논의들 하였다. 이때 학우들은 무조건 해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팀과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팀이 나뉘어져 토론을 하였는데, 필자는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총독부청사는 우리나라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콘크리트 건축물로, 일제가 식민지에 만든 청사건축 중 초기의 건축이라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근대건축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36년간의 치욕을 한순간에 없애지 말고, 우리나라에 외국군이 주둔하였던 용산에 이전하여 후손에게 다시는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교훈을 삼는 상징적인 건축으로 만들자는 생각이어서였다. 허나 총독부청사는 해체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사실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총독부청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일본청산이라는 전제보다, 그 국가의 역사와 건축을 상징하는 궁궐마당에 어이없는 거대건축이 들어서 있다는 관점이 중요했다. 그런데 1997년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작은 궁궐이었던 경희궁마당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그것도 박스형태의 철골구조로 된 3층 규모의 전시관으로. 사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경희궁은 기타 여러 궁보다 길지의 풍수지로의 왕들이 가장 아끼었던 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우리를 강점하면서 1910년 경희궁을 가장 먼저 훼손하였고, 그 자리에 일제사관을 교육하는 경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동국대학교로, 광해군이 그토록 애용하였던 흥정당을 광운사로, 그리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박문사의 산문으로 팔아넘겼다. 그렇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가장 먼저 사라진 궁궐인 경희궁 마당에 박물관이라는 이름아래 버젓이 들어가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유적훼손을 위해 지하를 이용하지 않고 지면의 상부만 이용해서 건축되었지만, 궁궐마당의 상징성에는 분명히 훼손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Louvre Pyramid와 비교되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I.M.Pei의 Louvre Pyramid는 루브르궁 마당이라는 상징성을 훼손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리로 된 피라미드로 계획하였다고 한다. 아! 이것이 문화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인가? 과연 우리의 건축가들과 문화재위원들은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당시 젊은 학도였던 필자는 문화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를 개탄하며 가슴아파했던 당시를 떠올리곤 한다. 현재의 경희궁은 일제가 만든 도로로 인해 정문의 위치를 상실하여 뜻하지 않은 위치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더욱이 우리의 손으로 궁궐마당에 문화를 상징하는 박물관을 세워 스스로 문화를 외면시하는 행동을 당하였다.


궁궐은 그 자체가 나라의 역사이며, 문화를 상징하고, 더 나아가 그 나라의 건축을 대표한다. 세계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되었다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세계10위권의 문화강국을 위해 노력하자. 그리고 더 이상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망가트리는 모습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서는 안 될 것이다.


김상태 Sangtae Kim
필자는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학과장)로 몸담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미국 UCLA International Institute, 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POST DOC.연구과정을 밟았다. 주요 논저로는 신라시대 가람의 구성 원리와 밀교적 상관관계 연구, 7ㆍ8세기 동아시아 2탑식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노인행태와 주거설계기법에 관한연구 외 다수가 있다. archis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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