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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인터뷰

수류산방 박상일

2012-03-29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단순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디자인, 판형 등 책의 전체적인 부분이 고려될 것이다. 출판사와 편집 디자인 회사,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계 사이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수류산방의 박상일 방장을 만났다.

에디터 | 정은주(ejjung@jungle.co.kr)
사진 | 민희기, 박우진

그는 인터뷰 도중 작업한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잠시 멈추고, 천천히 일어나 직접 책을 찾아 건네주었다.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의 냄새를 맡고, 책이 내는 소리를 듣고 만지는 모든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수류산방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새로움을 길어내는 ‘수류’라는 말이 수류산방이 가는 길이 박상일 방장이 나아가고 있는 길, 그 자체를 말해주는 듯 보였다.

Jungle :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디자인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어릴 때부터 뭔가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 대학 다닐 때 건축을 전공했는데, 건축 일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신문사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자연스럽게 출판 쪽 일을 시작했다. 그때는 일 년만 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Jungle : 디자인을 계속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96년에 박가서장이라는 출판사 만들었다. 그때 ‘지성과 패기’라는 잡지의 편집을 맡게 되면서 디자인 부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었다. 계속 디자인 쪽을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을 하다 보니까 어느 정도 내가 만족하는 부분까지는 하고 싶었다.

Jungle : 수류산방을 시작하게 된 과정에 대해 말해달라.

박가서장을 운영한 지 2년이 채 안 되어 IMF가 터지면서 출판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에 디자인하우스에서 일을 했다. 우연한 계기로 그때 만났던 좋은 분들과 같이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처음에는 작업실이나 하나 만들면서 성북동에 자리를 트고 이름 지었던 것이 수류산방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하러 자리를 떠나게 되었고, 그때 남은 심세중 실장과 수류산방을 지속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다시 출판사를 만들어서 책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류산방에서 처음으로 출판한 책이 ‘20세기 건축의 모험’인데, 사실상 이 책 때문에 출판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20세기 건축의 모험’ 원고를 접할 당시에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편집과 디자인을 하고 아는 출판사에 출판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편집 방향이 우리와 달랐다. 조금 힘이 들더라도 우리가 출판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Jungle : 디자이너지만, 편집자이기도 하다.

수류산방을 시작할 때 디자이너를 고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 디자인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다룰 수 있는 프로그램도 몇 개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할 때 작업 내용을 이해하고 편집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행 하다 보니, 기술적인 부분에 부딪치는 것은 있을지 몰라도 디자인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편집과 디자인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커졌다.

디자이너는 편집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편집자는 디자이너의 방법이나 기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수류산방에서도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역할이 나뉘어져 있지만,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어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Jungle : 평소 디자인하는 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우선 원고를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이것이 어떤 내용이고, 이 작업을 무엇 때문에 하게 되었는지도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 작업의 의도가 무엇인지, 재료가 어떤 것인지 살핀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를 종합해 디자인에 대한 틀을 잡는다. 이 틀을 잡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이것 없이는 작업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보여지는 게 별로 없어 클라이언트나 저자들이 당황하기도 한다.

Jungle : 북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람들이 그렇고, 작업이 그렇다. 이런 과정을 겪은 뒤에야 책이 나오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 막걸리도 한 잔 마시고 이야기도 할 때 다음 번에 뭘 해야겠다 하는 것을 그려나갈 수 있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책이 잘 나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책에만 매여 있고 싶지는 않다. 책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형태다.

Jungle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이번에 ‘예술사 구술 총서-예술인 生(이하 예술인 生)’를 작업하면서 우리 예술계의 여러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문화, 예술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책뿐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볼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경제적인 여유도 없고, 게으르기도 해서 기회가 없는 것 같다.

최근에 ‘예술인 生’ 작업 때 만난 예술인 박용구 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올해 아흔 여덟이신 선생이 직접 쓴 작품 초안을 보여주셨다. 한국에는 이제껏 없었던 장르의 극인데 이제껏 다루지 않았던 한반도 문화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이 아무리 경제적으로 안정됐다 해도 문화적 시대나 전기가 없으면,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작품을 통해 그런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이었다. 원고 말미에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 했으면 좋겠다 하는 계획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수류산방과 내 목표는 큰 것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시해주는 것을 해나가는 것이 수류산방과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어떤 목표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렇게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대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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