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컬쳐 | 월드리포트

창작의 과정을 훔쳐보다

김지원 | 2009-10-20




태양빛이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런더너들 역시 그들의 도시를 떠나 어딘가 설렘이 가득한 여름 여행의 상상에 젖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 작은 동네의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비밀스런 그들의 집과 작업실을 공개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볼거리를 찾아 갤러리나 매장의 우편번호를 집어 드는 대신 런던 남동쪽의 작은 마을의 지도를 펼쳐 들었다. 관광객의 발길이 그리 닫지 않는 그저 평범한 몇몇 동네의 구석구석을 누빌 차비를 갖추고, 낯선 걷기를 시작해 본다.


 


글 런던 통신원 김지원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와 생산하는 주체 사이에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접할 수 있는 디자인 사물과 예술 작품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소비자와 생산자를 잇는다. 그러나 때로는 소비의 주체로서 여전히 만든 이를 대하는 마음은 그들이 만든 사물들만큼 가깝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언제나 평범함 보다 독특함을 추구하는 크리에이터(creator)들에 대해서 소비자들은 보이지 않은 떨림과 불편함의 욕망을 느끼곤 한다. 설령 내가 디자이너 혹은 예술가라 하더라도 또 한 사람의 크리에이터를 대할 때면 평범치 않은 그들만의 아우라(Aura)에 적잖이 긴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디자이너로서 아티스트로서 그들은 여전히 멀게만 느끼는 이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일까? 가장 좋은 방법 중 한가지는 이것이다. 내가 가진 비밀 한가지를 살짝 보여주는 것.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너한테만 보여줄게.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라는 말로 유혹하면서 말이다.


 


개인 또는 그룹 단위로 행해지는 오픈 스튜디오(Open studio)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서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들 소비의 주체들과 보다 가까워지려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물론 디자이너들에게는 창의적인 디자인 전략을 통해 생산한 제품(Design-led)을 선보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업영역 발굴의 가능성에 도전해 보는 기회가 된다. 이들 디자이너들은 대게 비슷한 유형간에 클러스터를 형성하는데, 대표적인 디자인 인큐베이터 중 한 곳이 데포드(Deptford, SE8) 와 홀본(Holborn, WC1)에 거점을 둔 콕핏 아트(Cockpit Arts)이다. 매년 3~4차례 스튜디오를 개방하는 이 곳은 현재까지 165명의 디자이너 메이커(designer-maker)에 의해 참여되고 있다.




가벼운 인사를 뒤로 하고, 그야말로 아티스트들이 듬성듬성 모여 산다는 작은 동네 브로클리(Brockley)로 발길을 돌린다. 반짝이는 파란 하늘에 커다란 뭉게구름이 가끔 그림자를 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데포드(Deptford)에서 천천히 걸어가도 좋을 거리에 위치한 이 지역은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를 비롯한 YBA (Young British Artists)를 탄생시킨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브로클리 오픈 스튜디오(Brockley Open Studios)의 멤버들은 모두가 이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며, 개인 단위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콕핏 아트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들에게는 갤러리나 옥션과 같은 아트 마켓을 통하지 않고 작가가 직접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스스로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커다란 의의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저 구경꾼들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 마냥 표지판을 따라 가다 우연히 발견한 어느 집안에 꼭꼭 숨겨져 있을 작품들에 그저 마음이 설렐지도 모르겠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아트상품과 예술작품들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 누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인지 잔뜩 긴장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방인을 위해 준비된 소박한 다과는 오히려 작가로서가 아니라 외지에서 온 낯선 이를 반기는 마음씨 따뜻한 집주인의 정성스러움으로 전해진다. 아버지와 딸이 한 집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는 정겨운 모습, 작가를 대신해 작품을 소개하는 가족들과 손자가 그린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두고 자신의 작품과 함께 소개하는 어느 노작가, 아이를 기르기 시작한 후부터 규모가 큰 조각 작업을 그만 두고 유리 공예를 시작했고 정원사인 남편의 영향으로 작품에 식물이 많이 등장한다며 자신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던 조각가, 앞치마를 매고 앞마당의 잡초 정리를 하다가 이방인의 출입에 입구에서부터 반기며 안내하던 어느 생활 소품 디자이너,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무엇인지 그저 잡다해 보이는 많은 물건들 사이에 살짝 내려놓은 새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가죽 가방에 눈길을 돌리며 작은 것 하나에도 세심한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작은 미소를 지어본다. 아마 나도 집안에 들어서면 가방을 저 위치 즈음에 저렇게 내팽개쳐두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이들의 모습에서는 독특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늘 보아오던 동네 주민의 모습을 담고 있을 뿐이다.





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갤러리에 걸려있는 것과 어느 집의 오래된 벽면에 걸린 것과는 분명 많은 차이가 있다. 부엌에 어울릴만한 테이블과 의자뿐만 아니라 벽면의 타일 조차도 손수 제작했다며 자신의 삶터를 소개하는 세라믹 작가 제인 콕스(Jane Cox)의 말마따나 생활 자기는 하나의 작품이지만 또한 가정에서 사용하는 생활 용품인 것이다. 작가의 집을 개방하는 것은 그러한 작품과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을 미리 체험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함께 나누는 것을 돕는다.


 


특정 사물에서 보이지 않는 땀과 노력의 제작 과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공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과정의 시간 순간순간은 경험이 되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지예술가(Land artist)로 잘 알려진 조각가 리차드 롱(Richard Long)은 조각을 비물질적인 영역에 포함시킨 주요 작가이다. 얼마 전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열린 그의 전시에서 그는조각이란 공간에 감각을 주는 것이며, 그러한 공간을 담은 사진 작업과 문자들은 그 공간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결국 모든 행위의 형태는 상상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스스로가 그의 작업을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보는 이가 예술 행위의 과정을 최대한 경험하도록 도움으로써 하나의 공간에서 더불어 상상하고 그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대목이다.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 문화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오픈 스튜디오는 어쩌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으로서 걷기를 예술 행위의 수단으로 택한 리차드 롱처럼 보이지 않는 경험을 파는 행위의 수단이지 않을까. 누군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를 낯선 거리를 더듬으면서 전해지는 감각과 문 밖에서 서성이며 상상하는 문 틈 너머 세상은 잠자고 있는 우리네 감각을 깨우고, 사물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다. 모든 것은 상호 연결성(connectedness)을 갖는다.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연결성을 찾는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차원의 상호 이해를 만드는 것과도 같다. 오픈 스튜디오는 그러한 연결성을 향한 아티스트들의 갈망의 표현이다.

facebook twitter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