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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발길 가는 대로, 기억 나는 대로 ‘알바이신까지 데려다줄께요.’

2006-01-24


‘알바이신?’ 어디서 들어본 듯 하다면, 둘 중 하나다. 에스파냐에 대해서 잘 알거나, 유명 맛 집으로 손꼽히는 대학로의 에스파냐 레스토랑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
비슷하게 다가섰다. 이 책은 그 ‘알바이신’을 운영하면서 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 정세영씨가 에스파냐의 한 지방인 알바이신에서 보냈던 3년의 조각 조각을 사진, 그림, 글로 표현된 책이니 말이다.

이국적인 배경에 고양이를 살포시 얹어놓은 듯한 흑백 사진 한 장. 그 다음엔 물감으로 그려진 알바이신의 오밀조밀한 풍경들. 그렇게 둘러보고 나면 사진 옆에, 그림 옆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도 읽고 싶어진다.
한번 편 책을 쉽게 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책의 구성과 디자인의 매력도 한 몫 한다. 책을 이루는 작은 요소요소들이 일반 단행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작은 시도들로 메워져 있다. 자유롭게 담겨진 작가의 소소한 사적 기록들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을까, 이 책이 데려가는 알바이신으로 함께 떠나보자.

취재 | 김유진 기자 (egkim@jungle.co.kr)

책 속의 알바이신은 1994년에 가서 1년, 1999년 말에 다시 가서 2년을 보내고 왔던 정세영 작가의 카메라에 담겨있는 그곳의 기억이다.
알바이신이 너무도 좋아 그곳에 있을 때는 다른 지역으로 여행 한번 안 했다는 그는 단조로웠던 당시의 일과를 이렇게 소개했다. “매일 카메라를 들고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돌다가, 낮12시가 되면 바에서 한잔을 걸치고 나와 또 발길 가는 대로 어슬렁 돌아다녔다.” 책에 있는 그의 사진들은 그렇게 동네를 돌다가 만난 우연한 장면을 즉흥적으로 ‘툭 툭’ 찍은 것들이다.
“그냥 예뻐서 찍었다”던 고양이 사진에서 그는 문득 그 속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걸 발견했단다. ‘고양이’를 책 속 사진의 주요 테마로 또 제목으로 등장시킨 것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 차원이기도 했지만,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하나의 대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어떤 질문이든 짧고 명쾌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왜 흑백 작업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단순하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책의 기획 총괄을 맞은 박상일씨가 ‘흑백 프린트의 대가’라고 치켜세우는 데도 그냥 웃음으로만 넘긴다.
‘상상과 몽상과 망상의 화신. 하지만 순수와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나이’로 책에 소개되어있는 사진가 정세영은 일본에서 사진과 디자인을 공부했다. “사진이요? 하고 싶으니까 그냥 찍어요.”라며 사진 작업에 운을 뗀 그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내 모습을 찾기 위해’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는 것은 그림에서 스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찍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현상과 인화 등 암실 작업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물도 중요하다.” 컴맹에 디카도 전혀 쓸 줄 모른다는 그가 ‘하나만 파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면서 이야기하는 데에는, 사진의 전 과정에 공을 들이는 그의 작업 스타일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획단계에서 알바이신의 지도를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해봤는데, 글쎄 정세영 작가가 알바이신의 풍경들과 그곳에서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일러스트로 그려 왔더라고요.” 책의 기획을 총괄한 박상일씨의 말이다.
정세영 작가는 박상일씨의 제안을 듣고서는 초등학생들이 쓰는 물감으로 하루 만에 책에 실린 일러스트를 모두 그렸다. “갑자기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곳의 기억이 머리 속에 있으니까, 금방 그릴 수 있었습니다.”
알바이신이 속해있는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라는 지역의 지도뿐만 아니라, 방울방울 추억이 담겨있을 법한 ‘알바이신의 황혼’이나 ‘다로 강’ 등 작가가 직접 그린 15점의 일러스트를 감상할 수 있다.

사진집의 캡션 형태로 넣으려던 글이 책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작가가 본문에서 고백한대로 A4용지 한 묶음을 채워 넣은 글 때문이다.

“예전에 알바이신의 친구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다독거려주는 시간이 있었다. 정! 에스파냐에서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없어! … (중략) … 그래 맞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버려지지 않고 숨어서 끈질기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차분히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진짜루 이해하게 되었고 문방구에 가서 A4용지 한 묶음을 사서는 ‘다시올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이별’이라고 커다랗게 첫 한 장에 써 놓고서는 알바이신에서의 기억들을 다시올 만남의 끈을 연결시키기 위해 한 자 한 자 문신처럼 하얀 종이 위에 새기기 시작했다.”

정세영씨의 글에는 소리가 난다. 독자가 소리 내어 읽을 수 밖에 없도록 쓰여졌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어체다. 글로 보기에 어색한 부분이 있을 정도로 비문도 많다. 여러 줄이나 지나간 끝에야 마침표가 나와서, 보통 책을 읽듯이 그냥 읽어버리면 숨이 찰지도 모른다.
정세영씨의 글을 ‘감염된 문장’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박상일씨는 “이 문제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문장을 교정할 경우, 정세영씨 글에서 나오는 참 맛이 없어진다는 맹점이 있었다. 고민 끝에 최소한의 교정만을 거쳐 책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래서 책 서문에는 ‘주의’ 문구가 들어있다. ‘혹 문장이 덜 되었다는 데 집착하지 마시고, 이야기와 분위기에 마음을 두고 자연스럽게 흐르시기를 적극 권장’한다거나, ‘편집자 분들이나 논술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는 이를 절대 따라하지 마시라!고 강력히 권고’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박상일이라는 본명으로 ‘알바이신의 고양이들’을 기획 총괄하고, 동시에 박재성이라는 이름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한 그는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잡지 편집장을 거친 이력, 출판 쪽으로의 경력을 보면 그는 기획자, 편집자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디자인했다. 디자이너가 구사할 수 있는 스킬은 ‘못한다’라고 단정지었지만, 그의 디자인에는 작은 모험과 시도가 있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구석이 많다.

표지는 두성종이의 듀얼크래프트지를 사용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고양이의 모습이 책의 느낌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표지 이미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내지로 사용한 미색 모조지 120g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행본 종이에 비해 두꺼운 편이다. 두꺼운 종이는 지분이 많이 나와서 뭉친 느낌이 나기 때문에 디테일을 많이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박재성씨는 이 종이를 택해 놓고도 실제로 교정지가 나왔을 때 사진 인화물과 비교하면서 많이 걱정했지만, 책으로 나와보니 그 분위기가 오히려 잘 살아난 것 같다고 자평했다. 실제로 책은 알바이신이라는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깊게 나는 데, 결과적으로 이 두꺼운 종이의 덕도 본 셈이다.

표지 제목과 중간에 각 컨텐츠별 제목에 사용한 타이포는 알바이신에서 느껴지는 에스파냐와 아랍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것으로 채택했다. 정형화된 틀 안에서 작은 변화를 준 타이포의 느낌이 이국적이다.

일러스트가 들어간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왼쪽에는 텍스트, 오른쪽에는 사진으로 배치했다.
텍스트와 사진은 내용상의 개연성 없이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의도적인 배치를 시도했지만, 특정한 흐름 없이 자유롭게 쓰여진 글처럼, 사진도 우연에 맡기자는 의도가 있었다. 물론 이런 점은 정세영 작가가 ‘툭툭 사진을 찍었던’ 방식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이었다.
사진이 있는 지면은 여백을 두어 프레임처럼 처리했다. 책의 중요한 테마인 사진이 책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닌 작품으로서의 사진으로 보여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텍스트가 담긴 지면에도 같은 효과를 적용해서 하나의 통일된 컨셉으로 보여진다는 장점을 갖는다.
전체적으로 깔끔함을 주는 미니멀한 구성이 지면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작은 글씨다. 사진을 넣은 페이지처럼 여백이 많아 작은 글씨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디자인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박재성씨는 이런 부분에서의 논란을 미리 예상은 했었다고 운을 떼면서, 이 책에서 정확하게 보여져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사진이었기 때문에 본문의 텍스트 구성을 일부러 빡빡하게 보이도록 의도했단다.
짧게 끊긴 이야기들이 확 풀어지는 느낌을 주거나 너무 쉽게 읽힐까, 오히려 풀어져 있는 단락도 묶고 글씨 크기도 작게 넣은 것이다.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에 텍스트가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사진이 정확하게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타이틀의 블록도 정형화 하고, 본문의 폰트도 작게 넣었다.
그림이 있는 지면은 주로 두 페이지에 걸쳐 가로로 인쇄되어있는 그림 우측에 그림을 설명하는 정세영 작가의 글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인데, 그림 설명은 책을 90도로 돌려서 읽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이런 캡션 형태의 글은 폰트에 각 섹션에 맞는 컬러를 입혀서 디자인의 묘를 살렸다.

전반적으로 독자들이 글을 읽기에 불편한 구조이지만, 사진이나 그림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효과를 본 디자인이라고 보여진다.


“무엇이든 과정이 좋다. 책이 완성되어 나와버리니까 김새는 기분이 있다. 내 흔적을 드러낸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정세영 작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넣은 책이 출판된 소감을 묻자 이렇게 이야기 했다. 박재성씨는 “책의 내용이 만들어진 것처럼 책의 제작과정도 ‘자연스럽게’ 숙성되었다”고 그 과정에 대해서 덧붙였다.

책에는 아직 그의 알바이신이 1/4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의 감각을 통해 또 다른 형태로 속속들이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알바이신으로의 여행에서 ‘다음’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운을 주는 마지막 사진이 ‘알바이신’에서 ‘서울’이라는 현실로 다시 데려다 주어도, 그 아쉬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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