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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진채(眞彩) 풍속화로 만나는 옛 이야기

2008-11-04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다. 무지기 치마덕분에 풍성하게 부푼 붉은 치마에 연둣빛 저고리, 흑단 같은 머리채와 반달 같은 눈썹에 알듯말듯한 미소까지. 옛 그림 속 <미인도> 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다. 그런데 그 옆에 써 있는 글귀가 가관이다. <방귀쟁이 며느리> .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방귀쟁이라니. ‘방귀’라는 낯간지러운 소재와 유려한 풍속화의 이색적인 만남에 더욱 시선을 잡아 끄는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자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에디터 | 정윤희( yhjung@jungle.co.kr)

남 앞에서 뀌면 창피한 방귀, 그래서 참지만 참지 못하고 뀌게도 되는 방귀, 뀐 사람도 그 옆에 있는 뀌지 않은 사람도 좀 민망하게 만드는 게 방귀다. 하지만 방귀를 뀌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고, 참으면 병이 되는 것이 또 방귀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방귀와 관련된 이야기 중 ‘방귀쟁이 며느리’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내용만 보면 그저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책의 면면을 보면 쉽게 넘겨버리기 아쉬운 점이 많다. 책장마다 펼쳐지는 화려한 진채(眞彩)에 구수한 사투리까지 요소요소 뜯어볼수록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먼저 표지를 보자. 반달 같은 눈썹에 앵두 같은 입술, 곱디 고운 꽃을 들고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짓궂은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자신만만해 보이기도 하다. 표지에 등장했으니 으레 주인공이겠거니 싶은데 제목은 <방귀쟁이 며느리> 다. 한 폭의 풍속화 속 아름다운 여인과 ‘방귀쟁이’가 만들어내는 묘한 울림이 구미를 당긴다.
<미인도> 를 빌려온 이 표지그림은 빛 바랜 미인도에 색(色)을 불어넣어 작자미상으로 남아있던 그림에 빛을 불어넣었다.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표제면의 그림에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에서 걸어나온 아가씨가 붉은 댕기를 늘어뜨린 채 꽃밭을 배경으로 서 있고, 새와 나비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아, 저 처녀 참 곱다’며 한 장을 더 넘기면 이게 웬일. 꽃은 시들고 매화나무도 활력을 잊은 듯 시들어 있다. 정답게 노닐던 새들은 정신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고 있고, 해사하게 서 있던 아가씨의 난감한 표정이 뒷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방귀를 못 뀌어 사색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표정이나 주인공의 방귀에 놀라는 인물들의 표정은 물론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품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섬세하며 표현하는 그림은 이야기의 흐름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익살스러운 인물들의 표정을 꼼꼼히 살펴가며 그림책을 찬찬히 보다 보면 어딘지 낯익은 그림들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괜히 익숙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김득신의 <야묘도추> 속 인물들을 옮겨온 방귀 피해 달아나는 남녀, 이교익의 <휴식> 에서 불러온 배나무 아래 장사꾼들, 신윤복의 <춤:납량만흥> 에서 힌트를 얻어 그린 배를 들고 좋아하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까지 옛 그림을 패러디한 장면들이 곳곳에서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또한 신윤복이나 김득신의 그림 등 많이 알려져 우리에게 익숙한 옛 그림 외에도 풍속화나 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재미있는 동작들을 응용한 그림들은 한획, 한획 손으로 그려져 사실적이며 옛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방귀쟁이 며느리> 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만한 점은 책의 제본형태이다. 대개 우리나라의 출판물은 책의 왼편을 철사나 접착제로 제본하는 좌철 제본으로 출간된다. 헌데 <방귀쟁이 며느리> 는 책의 오른편을 제본하는 우철 제본 형태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문은 세로쓰기로 편집되어 있다. 고서(古書)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편집 방식은 옛 그림, 옛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동화의 풍미를 한껏 살려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옛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옛 것에 대한 호기심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편집 방식을 고집했다는 신세정 작가는 아이들이 보기에 어렵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어렵다고 버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지금 당장 보기는 어려워도 내용이 재미있으면 호기심에 보게 될 것이고 자꾸 접하다 보면 익숙해 질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1985년 전라북도 정읍군의 한광주 씨가 구술한 것을 바탕으로 한 이 그림책은 원문의 사투리를 살려 구성하였는데, 알아듣기 어려운 것을 제외한 사투리의 맛을 살려 구성했다. ‘한 처자가 있는디 참 고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그림책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전라도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 억양을 흉내 내며 읽게 된다.

<방귀쟁이 며느리> 를 출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졸업 후 7년 정도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는데, 편집디자이너로 지내다 보니 출판 과정이라든가 출판 시장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됐다. 아동 출판 시장은 잘 몰랐지만 회사에서 초등학생을 위한 그림책을 만들면서 더 욕심이 났다. 물론 그림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를 다녔다. 일러스트학교 내 포스트 프로그램에서 졸업전시회 격으로 ‘방귀쟁이 며느리’를 전시했었고, 그 작품을 출판사에서 보고 연락을 해와 출판까지 하게 됐다.

화려한 색감의 풍속화, 사투리, 세로쓰기 등 기존 그림책과 다른 점이 많다.
한국화는 주로 수묵화를 떠올리게 되는데, 진채로 그린 그림도 많다. 탱화도 그렇고 단청의 강렬한 색도 그렇고. 그림책을 기획하고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우리 그림에 대한 매력을 새롭게 느끼게 됐다.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이 매력적이었다. 1년 정도 작업하면서 반 이상의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됐는데, 그러면서 옛 그림 속 인물들의 동작을 패러디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우철 제본이나 세로쓰기 편집은 일본 것으로만 아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나라 고서를 보면 대부분이 우철 제본방식으로 제작되어 있다. 옛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 같아서 이 같은 구성을 택하게 됐다. 편집 방식이 우철 제본에 세로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보니 그림도 제본 방식에 거슬리지 않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하도록 신경 썼다.
사투리는 이 이야기의 원문이 사투리로 되어 있는데, 그 구수한 맛을 고스란히 살리자니 어른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손질한 것이다. 각주를 달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이야기의 흐름을 깰 수도 있고, 번거로워서 쉽게 갔다. 옛 이야기에서 사투리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사투리가 구수한 맛이 있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꽃다운 처녀와 사투리의 충돌이 재미있어서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로 이야기를 풀게 됐다.

작업 방식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민화를 재현해보고 싶어 장지방 한지에 붓으로 그렸다. 스케치를 완벽하게 그린 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채색했는데,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렸다. 컴퓨터로도 채색해 봤는데 민화의 느낌이 전혀 살지 않아서 일일이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채 같은 경우에는 한올 한올 그린 것인데, 면이라고 해서 그냥 색칠을 하면 ‘삼단 같은 머리채’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며느리가 시원하게 방귀를 뀌는 장면의 배경이나 표지 배경 등에서 볼 수 있는 무늬들은 전통 자수 문양에서 힌트를 얻어 그린 것들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한국화나 민화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중이라 좀더 공부하면서 더욱 풍부하게 재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디테일한 작업이라 힘들지만 이런 작업이 재미있는 것 같다. 또 색(色)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려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림책이라고 하면 아이들만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어른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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