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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서(書)-축(築) '글로 짓는 집'을 위한 실험

2013-07-24


2012년 5월 즈음 일본 로커스 디자인 포럼(Locus Design Forum)으로부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제안받게 되었다. 건축가와 북디자이너의 교류를 통해 '언어적 건축으로서의 책', 또는 '언어적 공간으로서의 건축'의 개념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책' 프로젝트인데, 한중일 3개국의 건축가-북디자이너 팀이 초대되었다. 각 4팀씩 총 12개의 결과물을 11월 초 동경 힐사이드 포럼(Hillside Forum)에서 전시를 통해 발표하는 계획으로 '서(書)-축(築)'이라는 전시 제목이 붙여졌다.

글│이나미
기사제공│타이포그래피서울

일본에서는 세지마 카주요-히다카 에리카, 타케야마 세이 키요시-미키 켄, 단 노리코-아키타 칸, 후지모토 소우-하라 켄야가 팀을 이루었고, 중국에서는 팡 샤오펭- 류 징렌, URBANUS-우 용, Deshaus-자오 킹, 주 티안티안-샤오 마게, 그리고 한국에서는 승효상-홍동원, 이대준-최만수, 김헌-안지미, 조병수-이나미로 팀이 구성되었다. 건축가와 디자이너 모두가 각국의 정체성 및 시대를 대변하는 나름의 코드를 지닌 인물들로서, 서로의 작업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글로 짓는 집'이다 보니 결과물은 자연스레 책의 형태를 띠게 되겠지만, 그 책이 과연 어떤 내용과 형태를 지닌 책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질문과 답이 요구되는 만큼 작업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양한 모색이 일사천리로 머릿속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집을 짓는 디자이너와 책을 짓는 디자이너가 만나 글로 집을 짓자면 어떤 생각 위에 터를 닦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니까 이건, 건축가의 작업을 북디자이너가 멋지게 책으로 엮어내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집을 짓는 일, 그리고 책을 짓는 일에 대한 상호 간의 철학을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다. 건축가가 짓는 집과 북디자이너가 짓는 책이 과연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새롭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공감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위해 조병수 건축가와 내가 한 팀으로 짜였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2009 광주디자인비엔날레로부터 비롯된 인연이 이어져 각자의 작업을 통해 추구하는 본질적 물음이 웬만큼 맞닿아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함께 이루어 갈 '글로 짓는 집'을 위한 가장 튼실한 영감의 터전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어온 많은 집 중 가장 강렬하게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집은 '땅 집'이다. 지면 아래로 네모 반듯하게 흙을 파내고 단 여섯 평의 땅 위에 한 사람이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으로 탄생한 집. 그 집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네모 반듯한 모양의 하늘에 감사하며 영혼을 흔드는 바람에 감동하며 시인 윤동주에게 바친 집. 소유의 안온함 대신 마지막까지 버려야 할 모든 허세로운 것들에 대한 인식을 얻게 하는 집. 자연의 명철한 부르짖음을 몸소 경험하게 하므로 인간의 본연에 도달하게 하는 집. 인간에게 필요한 궁극의 집은 몸을 편히 누일 한 평에 불과한 땅이며 흙으로 돌아가 하나가 될 자연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집…. 나는 '땅 집'을 매개로 상호 간에 다져진 터전 위에 '글로 짓는 집'을 한번 펼쳐 보이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아무 준비 없이 만나 '땅 집'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고스란히 녹음기를 통해 기록되도록 하며 그것을 재료로 지은 '글'로 책이라는 '집'을 지어 보이겠노라고. 즉, 북프로듀싱의 방법론으로 '서로 바라보기(Inter-View)'와 '서로에게 반응하기(Inter-Act)'를 제안한 것이고, 이로써 책의 내용과 구성을 위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해서 6월의 어느 날 저녁 그와 나는 홍대 부근의 작은 일식주점에서 만났고, 녹음기의 배터리가 소진할 때까지 약 2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을 글로 옮겨 목차를 구성하니 '건축가 조병수와 디자이너 이나미의 두 겹의 영감'이라는 부제를 단 A4 20쪽 분량의 원고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땅, 우리의 영원한 집> 이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지어져 나오게 되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디자인 역시도 아무런 준비 없이 주고받은 '두 겹의 영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대화 중에 이미 책의 디자인을 위한 방향성을 스스로 정리하는 대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조병수 그럼 결국 중요한 게 뭐냐, 경험과 인식에 중요한 게 뭐냐, 그걸 생각해보자는 거죠. 우리가 저녁 내내 많은 말을 나누고 많은 생각을 만들어내고 했지만,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여기에 부는 바람…. 바로 이 바람 같은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나미 아, 바람이 부네…. 라고 느끼는 것. 그걸 온몸으로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

인간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이고 가장 중요한 거죠. 자연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빛과 물과 바람입니다. 그 세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거 하나만 고르라면 저는 바람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아마 물이라고 얘기할 것 같아요. 저는 건축설계에 있어선 바람인 거 같아요. 빛보다도 중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바람을 잘 못 느껴요. 바람이 분다는 걸 잘 알아채지 못하는 거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굉장히 조금 움직이는 바람도 우리한테 큰 감동을 준다는 걸 모른 채 살아가요.

이나미 그럼 선생님의 건축에서는 바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걸 매우 중요하게 고려하시겠네요? 빛보다 바람을.

조병수 창문을 많이 내려고 노력하죠. 바람이 불어야 하고 창문이 양쪽으로 뚫려 있어서 맞바람이 불게 해야 해요.

이나미 재미있네요. 그 이야기들이 다 재미있어서 형태적으로 어떻게 접목하여 디자인할지 고민해봐야겠어요.

조병수 지난번에 디자인해주신 책 중에 이렇게 잘려 계단으로 된 것도 재미있었어요. 단면으로 잘린 것 같은.

이나미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저는 형태 이전에 항상 내용을 먼저 생각해요. 책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이게 굉장히 중요해서 책의 형태에 대한 생각은 좀 뒤로 미루어 놓는 편이에요. 실은 미루어 놓았다기보다 책의 내용에 부합하는 디자인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도록 좀 내버려두는 거죠. 내용이 'what'이라면 형태는 'how'에 속하고, 그 'how'를 제대로 도출해내려면 'what'에 대한 'why'를 충실히 연구하는 것이 중요해요. 오늘은 바로 그 'what'에 대한 'why'를 위해 땅 집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끌어내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의 중요한 단초가 '단면' 일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단면', 또는 '크로스 섹션'은 이제 이 책의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된 거죠. 예상했던 대로 책의 형태를 위한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고나 할까요. 땅 집의 이면에는 제일 먼저 친구분 어머님의 죽음과 관련한 인상적인 장면들, 네모 반듯하게 파인 땅의 단면이 있었고 붉은 흙과 파란 하늘 같은 게 있었죠. 그리고 이후에는 경험과 인식의 문제에 중요한 화두를 던지게 된 '해골'이 있었죠. 해골은 개념적인 단면이죠. 잘라낸 모습이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낸 모습이니까요. 그러니까 겉모습이 아닌 적나라한 인간의 내면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인 거죠. 이러한 이야기들이 책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들이 되는 거예요. 저에게는.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내용과 형태를 아울러 이 책은 '자연'을 이야기하고 있어야 해요. 결국,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자연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될 테니까요. 그것을 통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그것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일어나도록 하는 책…. 말해놓고 보니 굉장히 어려운 과제가 되었네요.

결국, 책은 화면의 정 중간에 '관'을 연상하게 하는 긴 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뚫리게 되고 책의 레이아웃은 그 사각형의 방해를 오히려 창의적 설정으로 삼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게 된다. 화면의 포지티브 공간과 네거티브 공간 사이에 조화로운 '대화'를 이끌어 내도록 하며 이미지와 텍스트의 공평한 플레이가 진행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도전을 스스로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책의 표지를 위하여는 '상복'과 '관'의 만남을 상징하는 재질로 광목과 그을린 오동나무 판을 선택하였는데, '글로 지은 집'이 허상에서 끝나지 않도록 실존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아날로그적 단서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만나게 되는 붉은 흙의 이미지 위에 드리워진 붉은색의 가름 끈 역시도 장례행렬을 이끈 뒤 관 위에 던져져 함께 묻히는 '명정(銘旌)'을 상징, 삶과 죽음에 대한 명철한 '인식'을 이끌어 내는 데 일조하고자 하였다.

전시는 2012년 11월 7일부터 18일까지 동경의 힐사이드 테라스에 있는 힐사이드 포럼 전시장에서 열렸다. 전시 오픈일에는 3국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작업의 내용을 설명하는 오프닝 심포지엄이 진행되었는데, 독도와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국가 간의 영토 분쟁으로 난조를 띤 한-일, 중-일의 외교적 상황과는 매우 대조적인 분위기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듯하다.
전시는 이후 순회전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 올해는 8월 27일에서 9월 10일까지 한국 파주 북시티에서 전시가 예정되어 있으며 2014년에는 중국 북경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한 출판사를 통해 출간 계획이 성사되어 진행 중이니 전 세계의 아트북 시장에 '글로 지은 집'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출판 브랜드를 선보이게 될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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