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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More Making Artist’s Books

2009-04-21


맞은 편에 앉은 여자아이가 열심히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그녀는 연필을 들고 페이지에 몰입한다. 나는 책의 모양새를 본다. 딱딱한 표지가 여러 장의 내지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도 기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코덱스(Codex) 형식은, 2세기경 나무나 상아로 만든 서판을 경첩으로 한데 묶어 사용하던 것에서 발전된 형태다. 책은 코덱스로 진화하며 우리 생활과 좀 더 가까워졌고, 페이지를 넘기는 움직임은 보다 적극적인 읽기를 유도한다. 이 글에서는 아티스트북의 다양한 범주와 제작 시 염두에 둘 수 있는 ‘연속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글 | 박소영 (북아티스트 • 제로원디자인센터 ‘More Making Artist’s Books’ 강사)


아티스트북의 다양한 형식
책은 전통적인 코덱스 형식(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혹은 그 반대로 넘기는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티스트북에서의 그것은 사뭇 다양한 형식을 띈다. 설치미술 형태의 책이나 영상매체를 활용한 전자북 등 그 구조와 표현도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브룩클린 미술관에서 수집하고 있는 아티스트북의 범주 내에는 낱장의 인쇄물, 포스터나 브로슈어, 판화가의 에디션 묶음, 플럭서스나 페미니즘 등 개념미술 작가의 책, 그리고 회화와 조각, 사진 등 모든 장르의 작가 포트폴리오 북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20세기의 예술활동 중 아티스트북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또한 아티스트북은 읽고, 보고, 만지는 즐거움 등 책을 감상하는데 있어 시각뿐 아니라 오감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순수예술에서 출발하는 작품, 문학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 디자인 아이디어와 텍스트를 차용해 타이포그래피나 그래픽디자인 요소로 작용하는 책 등 다양하게 표현된다. 하지만 오로지 책의 물성만을 이용해 아무것도 없는 블랭크 북, 잉크를 사용하지 않은 책, 이미지 없이 여백으로만 표현된 페이지, 또는 조각적인 책 등도 있다.


책은 공간의 연속물이다(A book is a sequence of space)
책은 겹겹이 쌓인 층과 같다. 캐런 블리츠의 에코북은 'echo'라는 영문자가 첫 장에 선명하게 찍히고 마지막 장에서는 그 흔적만 남아있어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마치 메아리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철을 구부려 글자를 만든 후, 몇 장의 판화지에 올려놓고 오랜 시간 동안 무거운 석판으로 눌러 주었다고 제작과정을 설명한다. 캐런 블리츠의 에코북과 복제양 돌리를 형상화한 책은 겹겹이 쌓인 층과 같은 책의 물성을 단박에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북아티스트는 움직이는 그림을 만든다. 이미지의 즉흥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방식 중에는 트레싱지와 같이 비치는 종이를 사용하거나 필름지로 이미지를 겹치기, 낱장 그림의 움직임으로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주는 플립북(Flick book), 혹은 의도적인 페이지 매김이나 페이지 흐름으로 시선을 움직이는 방법이 있다. 그 예로 Keith A. Smith의 1982년 작 ‘91권’은 실로 연결된 각 페이지를 넘길 때 생기는 긴장감이 책을 시각적이고 청각적으로 보이게 해준다. 펀치 구멍은 그림자를 만들고, 각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구멍 사이로 빛이 통과되어 다음 페이지에 밝은 원 형태가 나타난다. 소리와 빛, 그림자, 초점과 움직임은 물리적이기도 하지만 독자가 책을 읽을 때, 즉 페이지를 넘길 때에야 비로소 실제화되는 것이다.


내밀한 소통, 그리고 연속성
아티스트북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조각작품이나 벽에 걸린 그림보다 더 은밀함을 유도한다. 아티스트 북을 감상하는 관객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펼친 것처럼 작가와 1:1로 소통한다. 그 은밀한 소통에는 ‘페이지 넘김’이라는 물리적인 행위가 더해져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의 순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것은 정지된 것이 아닌 시간 속에 책을 위치시킨다.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책장을 넘겨보며 쪼개진 페이지들은 서로 연결되고 움직임을 가진다. 만약 페이지가 종이가 아니고, OHP필름과 같은 투명지라면 페이지 넘김은 더 많은 효과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아티스트북 작업 시 텍스트와 이미지에 ‘연속성’이라는 책의 물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면 더욱 아이디어 넘치는 작품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 참조/ Keith A. Smith의 'Structure of the visual book' 김나래 역

P.S
보통 나는 가방에 노트 두 권, 화장실과 거실, 침대 머리맡에 각각 한 권의 책을 놓아둔다. 그때 그때 생각난 것들을 메모하거나 그리거나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페이지가 겹겹이 쌓인 빈 노트를 이리저리 쓰다듬거나 넘겨보며 책을 만져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책과 놀이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를 구상해낼 때 도움이 된다. 조각난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 마인드맵을 그리는 것처럼 페이지를 넘기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갑자기 튀어나온 등장인물과 마지막 장에서의 반전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다시 섞어보다 보면, 빈 페이지에는 하나씩 이야기의 순서가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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