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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사색의 공간, 지리산길

2011-09-14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지리산(智異山)은 전라 지역과 경남 지역에 걸쳐져 있는 산이다. 남한 내륙 최고봉인 천왕봉(1916.77m)을 비롯해 노고단 등을 포함한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는 곳으로 10개의 하천과 아름다운 경치로 등산객들의 발길을 끄는 장소다. 2007년에 계획되어 약 300km의 장거리 도보길을 조성 중인 지리산길은 올라가야 하는 수직 개념의 산을 둘러서 보는 수평의 개념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느리게 걸으면서 지리산을 둘러볼 수 있는 지리산길에는 화려하지 않은 목재 사인물과 세련되지 않고 투박한 사인물이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있다.

글 | 김명준 기자
사진 | 팝사인 편집부

지리산길에는 출발과 도착의 개념이 없다. 내가 출발하는 지점이 다른 사람의 도착지가 된다. 목적지를 가는 수단으로서의 길이 아닌, 길 자체가 목적이다. 느리게 걷는 여유를 즐기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걷기를 그만 두는 지점이 목적지다.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처럼 한 사람의 목적지가 다른 사람의 출발지가 되는 지리산길은 다양한 지점에서 지리산의 면을 살펴볼 수 있도록 16개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소통의 구간, 인월-금계

전라북도 남월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인월-금계 구간은 총 19km의 구간으로 남원과 함양을 잇는 옛고갯길인 등구재를 중심으로 이어진 길이다. 등구재는 높이 650m의 고개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길이다. 등구재라는 명칭은 아홉 구비를 오르는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재로 이 구간의 등고선을 보면 가장 난코스라 불릴만한 곳이지만, 중간 중간 보이는 지리산 자락의 모습에 넋을 잃고 쉬어가는 곳이기도 한다. 흔히 제3코스라 불리는 이 구간에는 총 6개의 산촌 마을이 있는데, 흔히들 이야기하는 계단식논인 다랑논이 주수입원이다. 현재는 TV 방영 후에 쏟아지는 방문객들 때문에 마을마다 민박집이 성행하고, 군데 군데 쉼터를 만들어 막걸리와 안주를 파는 가구도 만날 수 있다.

사색과 여유의 공간

인월에서는 둘레길 안내소를 들러 지도를 구입하는 것이 좋다. 중간 중간 이정표가 있어 길을 잘못들 위험은 별로 없지만, 지도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는 금액은 지리산길을 유지하는데 사용된다고 하니 지리산길 이용료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안내소에서는 중간의 휴식 지점과 민박 위치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안내소를 나와 조금만 걸으면 인계-금월 구간 시작을 알리는 목재 안내판이 보인다. 트래킹을 하는 사람 모양을 새겨 넣고 ‘여기서부터 지리산 둘레길 시작점입니다’이라는 문구를 조각해서 붙여놓은 사인물이다. 안내판 뒤편으로 보이는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는 소와는 대조적으로 배낭을 맨 사람의 형상은 조급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쉽다.

인월에서 출발해 금계로 가는 구간에서의 오르막길은 완만하면서 길을 닦아놓은 반면, 내리막길은 바위가 군데 군대 박혀있어 방문객들이 걷기에 쉬운 구간이다. 인월에서 금계로 가는 길에는 빨간색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하고, 반대 방향은 검정색으로 표시하여 길을 걷는 사람들이 방향을 혼돈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이정표가 길 중간 중간에 어색하지 않게 서있다. 이런 이정표는 단순히 화살표 표기만 된 지주 형태의 사인부터 방향과 남은 킬로수 등의 정보 제공용까지 다양한 형태로 만날 수 있다. 최소한의 정보가 지리산길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지리산길의 장점은 가장 간편한 운송 수단인 발을 이용해서, 속도보다는 여유와 사색에 중점을 맞춘 것이다. 가야 할 방향만을 알려주는 이정표는 길을 잃지 않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고, 주변을 보면서 배우고 생각할 여건을 만들어 준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

지리산길은 잘 꾸며진 정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태초의 자연 공간도 아니다. 지리산길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흔적을 보여주는 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숲이나 나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붙은 기와 지붕들, 마을 입구에 보이는 다랑논, 둘레길 곳곳에 퍼져있는 다양한 농작물을 키우는 밭을 통해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지리산 상황마을의 솔솔민박은 작년 이맘때부터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원래 형제가 모여 살았던 집이 너무 낡아 개보수 하던 중 한 TV프로그램에서 지리산 둘레길이 방영됐다. 원래 가정용으로 건축된 집으로 사람들이 숙식을 문의하러 모여든 것도 TV 프로그램이 방영된 작년 가을 초입쯤으로 기억된다고 민박집의 주인은 말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민박집 운영이라 힘들만도 하건만 주인 아주머니는 연신 불편한 게 없나 묻는다. 직접 밭에서 가꾼 채소로 반찬을 해서 내놓은 나물 정식은 별다른 양념이 없이도 보드랍고, 진한 향을 내뿜는다. 이 집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거의 모든 집이 그렇게 형성된 민박집들이다.

마을 근처로 가면 밭들이 보인다. 그런데 밭 주변에는 어김없이 농작물을 건드리지 말라는 개인 경고문에서부터 관에서 붙인 안내문도 보인다. 원래 지리산길은 사유지라 출입이 제한되는 지역이다. 둘레길의 의미에 공감한 주민들의 협조를 통해 이어진 지리산길은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의 생업 환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리산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자연학습장이 되고 체험장이 되지만 그런 호기심을 통해 현지 주민들의 생업은 위협받고 있다. 단도직입적인 경고 문구부터, 아이디어와 재미가 돋보이는 문구까지 다양하다. 어르고 달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지리산 자락에 터전을 잡고 농사를 업으로 삼은 농부는 짧은 문구에 재치와 웃음을 담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식을 부탁하고 있었다.

자연을 배우고 느끼는 공간

지리산길을 걷다 보면 유독 아이와 아이와 함께 걷는 부모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사방에 보이는 모든 풀과 꽃과 나무가 학습장이다. 지치지도 않는지 앞서서 뛰어가는 어린 아이가 뒤에서 쫓아가는 어머니에게는 안타깝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아이에게는 그냥 폭신한 놀이터일 뿐이다. 실제로 지리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갖가지 식물과 곤충들은 특별하진 않지만, 땅에 뿌리박고 있는 모습을 보기는 힘든 것들이다. 마트에서 곱게 다듬어져 뉘어져 있는 것들만 봐온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체험장이다. 식물과 곤충이 군락을 이룬 지역에서는 간단한 안내사인을 통해 학습장으로서의 용도를 높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인월에서 금계까지 19km의 구간은 성인 남자의 잰 걸음으로는 5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거리다. 길이 험하지 않고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져있어 별다른 수고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지리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목적지로 도착하는 결과가 아닌 가는 동안의 수단일 것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모인다. 인월의 시작 지점에서 보는 사인물에서는 안내소의 친절함이 묻어 나온다. 중군 마을 입구에서 만난 벽화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섬세함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중간 중간 만나는 이정표 사인은 투박하게 길을 알려주는 시골 사람들의 인심을 느낄 수 있고, 지리산길을 내어준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인에서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쉼터와 밭 앞에 주민들이 직접 적어놓은 다양한 글씨의 안내문들은 길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재미다. 자신의 숙박업소를 홍보하는 안내문에서 조차 적극적이기 보다는 마을의 풍경을 자랑하고 길안내를 돕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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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 Sign, Lighting Design 전문 매거진 월간 <팝사인> 은 국내 최초의 옥외 광고 전문지로, 국내 사인 산업의 발전과 신속한 정보 전달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또한 영문판 잡지인 발간을 통해 국내 주요 소식을 해외에 널리 소개하고 있으며, 해외 매체사와의 업무제휴 들을 통한 국내 업체의 해외전시 사업을 지원하는 등 해외 수출 마케팅 지원 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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