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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골목은 사라져도 풍경은 더 그리워져

2012-02-24


7명의 아이가 보인다. 앞에 선 사진가가 웃겼는지 아니면 자주 얼굴을 봐서 친한 사이인지 모두들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다. 가장 어려보이는 한 아이만 호기심 때문인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카메라를 올려다본다.

기사제공 | 월간사진


과거 풍경 속 사진처럼 이제 길에서 환하게 웃어주는 아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수도 줄었고, 놀이의 형태나 몰입 정도도 지금과 차이가 많이 난다. 길거리에서 권투시합 중인 두 아이는 지금이라면 당장 떼어 말려져서 혼이 났을 것이다. 이에 아랑곳없는 어린 관중들은 어느 편을 응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치 자신이 펀치를 때리고 맞은 듯 표정이 살아있다.

1970년대에 서울의 어느 골목에서 찍힌 두 사진 중 한 장은 최근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골목안 풍경 전집’의 표지로 쓰였다. ‘골목안 풍경’은 지난 2005년에 타계한 고 김기찬 작가가 평생에 걸쳐 촬영해온 사진의 테마이다. 그는 1988년에 1집을 내고 같은 제목의 사진집을 모두 6권이나 냈을 정도로 서울의 골목안 풍경과 사람을 빠짐없이 촬영해왔다. 표지사진과 권투시합하는 아이 사진은 전집을 만들면서 새로 공개된 그의 유작 사진들이다. 전집에는 1~6집까지 ‘골목안 풍경’에 수록된 사진 중 도시 서민의 지나온 삶이란 주제에 따라 5백여점이 선별돼 실렸고, 여기에 유작 34점도 추가됐다.

단일 테마로 나온 6권의 사진집이 한권의 전집으로 엮여 출판되기는 한국 출판시장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또 한 사진가가 한 가지 테마로 5백장의 사진을 남긴 경우도 드문 일이라는 게 출판사의 설명이다.

고 김기찬은 1968년부터 서울 중림동을 시작으로 도시 서민들의 모여살던 동네의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된 ‘골목안 풍경’은 작가 이름은 몰라도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골목길 풍경과 마찬가지로 작가와 34년간의 사진기록도 점차 잊혀가는 게 사실이다. ‘골목안 풍경 전집’의 출판은 평생을 한 테마의 사진기록에 매진해온 한국사진사에서 특별했던 한 사진가와 그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의미를 담았다. ‘골목안 풍경’에는 60년대부터 70, 80년대를 거치면서 90년대까지 도시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 어떻게 변해왔는지가 시간 순으로 담겼다. 또 당시 서민들의 삶의 모습과 골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웃들과의 소통과 공동체문화는 문화예술과 인문, 도시공학 등 무수히 많은 분야에 영감과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사진매체의 기록성을 최고 수준에서 보여주면서 사진 속 골목의 의미는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것이다.

재생산되는 골목의 의미

‘골목안 풍경’ 1집에 글을 쓴 소설가 송영은 “거주공간이 좁고 고유한 마당이 없는 사람들은 골목으로 나오게 되며, 여기서 골목의 효용성이 발휘된다”며 “골목안 사람들에게 골목은 길이고 안방이고 사랑채가 된다. 이웃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회당의 구실도 하게 된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노출되고 모든 게 지척에서 확인된다. 비밀스러운 소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장의 익명성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 안방을 들여다보고 생활하는 이웃들의 풍경은 오늘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정겨운가. 중산층으로 신분상승을 완료한 사람들에게 그런 풍속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적었다. 또 6집에서 소설가 신경숙은 “(김기찬의)사진들은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살고 있다고 곡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얼핏 옛 모습처럼 여겨지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추억 속에 갇힌 삶이 아니다. 화려한 외양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채로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쓰라린 광경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단함 속에서도 웃음이 터지는 광경이기도 하다. 이것들이 한데 모여 사진을 들여보고 있을 때면 정신없이 이야기가 샘솟는다”고 했다.

세상이 메마르고 인정이 없다고 하지만 골목에서 보낸 30여년은 훈훈하고 인정이 넘치는 세월이었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특별한 피사체나 강조할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골목에서 김기찬은 사직동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시절의 향수와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사진은 궁핍스럽고 삭막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정감 넘치고 낙천적이며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한다. 기록에 대한 사명감이나 피사체로서 골목안 사람을 대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사진들이다. “중림동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곧 내 평생의 테마이다’라고 결정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후회해본 일이 없다.”

잃어버린 앨범의 한 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골목안 사람이 된 작가와 그곳 사람들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골목안에서 만난 정겨운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느끼게 한다. 또 자극적인 소재보다 보편적인 삶이 주는 감동의 묵직함과 여운을 음미할 수 있다.

“카메라를 둘러맨 낯선 이방인의 골목 출입을 허용한 골목안 사람들, 골목 입구에 서서 아직도 찍을 것이 더 있느냐며 웃음 짓던 젊은 엄마들, 등나무 터널 밑 구멍가게 긴의자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앉아 통행세 대신 음료수 한잔이라도 대접해야 직성이 풀려 나를 놓아주던 박씨 아저씨, 놀부네 가게 앞 아낙네들, 고사리 같은 손으로 V자를 만들며 나를 반기던 동네 꼬맹이들, 녀석들을 피해 맨 꼭대기 은행나무길을 오르면 돈대 높은 집앞에 햇살을 피해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이 왕초 할머니시다, 친할머니처럼 자상했던 왕초할머니, 나를 층계에 앉혀 놓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멈은 잘 있느냐, 딸아이는 언제 아이를 낳느냐 가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

‘골목안 풍경’ 5집에서 소설가 공지영은 인간 근원으로의 회귀라고 말하고 있다. “검은 학생복을 입은 우리 아버지가 세일러복을 입은 여고생인 우리 어머니에게 연애편지를 가져다주었던 곳, 손에 가득 든 딱지를 다 잃고 울고 서있는 어린 나의 귀에 어머니가 밥 먹어라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연탄 화덕 위에 굵은 소금을 뿌린 꽁치 굽는 냄새가 퍼져 이웃집 저녁 반찬까지 알 수 있었던 그곳...우리 모두의 정원이며 광장이고 마당이었던 셈이다...서울 토박이인 작가와 나뿐만 아니라 그 후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무수한 서울 토박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근원을 잊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과 가족, 삶과 이웃이라는 영원히 어려운 우리들의 문제를 두고두고 돌아보게 하는, 잃어버린 앨범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소통하는 공동체는 인류의 지향점

점차 골목이 사라져가며 김기찬의 사진작업도 쓸쓸함을 더한다. “어느새 골목안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은 노인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개발사업은 공덕동으로 번지고 공덕동에서 인왕산 밑 행촌동으로 건너뛰었다. 1997년 결국은 중림동도 그 운명을 다했다.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곳에 살던 골목안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버렸다. 골목은 내 평생의 테마라고 했는데 내 평생보다 골목이 먼저 끝났으니 이제 골목안 풍경도 끝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부터 김기찬은 성장한 과거 사진 속 인물을 찾아가 이들을 다시 사진에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정겨웠던 사람들을 해후하는 과정은 마치 과거의 시간에서 이들을 놓아주려는 듯 보인다.

시간이 흘러 골목안 풍경과 사람을 사랑했던 작가는 떠났지만 그의 사진은 골목을 경험 못한 세대들에게까지 감동을 선사한다. 인정이 오가는 공동체와 소통하는 세상은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골목안 풍경’은 사라졌지만 누구에게는 향수로, 또 다른 누구에게는 삶의 미덕으로 남아 새로운 풍경을 꿈꾸게 하는 중이다.

6권의 ‘골목안 풍경’을 한권에 묶은 전집은 사진책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깬다. 동화를 읽듯 사진 한 장씩마다 이야기꺼리가 넘치는 사진은 어렵지 않게 넘겨지며 크기도 단행본 판형으로 줄였다. 중간중간에는 6권에 실린 서문과 발문을 넣어 정진국(미술평론가), 송영, 공지영, 신경숙(소설가), 한정식, 이명동(사진가) 등의 다양한 글을 읽을 수 있다. 지갑이 얇은 독자에게 반가운 소식은 500점이 넘는 사진이 실린 두터운 사진집이 예전 사진집 그대로의 가격인 2만9천원이라는 점이다.

인터뷰
눈빛출판사 이규상 사장

사진 한 장이 소설 한권, 잃어버린 풍경 찾아가는 사진

1~6집까지 6권의 ‘골목안 풍경’ 사진집 중 3권이 눈빛출판사 이규상(사진) 사장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1988년 첫 직장이던 열화당에서 1집을 낸 뒤로 눈빛출판사를 차린 뒤에 5~6집을 냈고, 2003년에는 ‘골목안 풍경 30년(1968~2001)’을 펴내는 등 편집자와 출판사 사장으로 고 김기찬 작가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그다. 이번 ‘골목안 풍경 전집’은 작가의 사후에 작품을 재조명하려는 그의 첫 작업이다. 이사장은 사진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전통적인 풍속과 인간성을 기록한 사진에 유독 강한 애착을 보여왔다. 틈날 때마다 벼룩시장을 찾아 옛 사진을 수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질사회에 우리가 잃어버린 귀중한 기억이 기록매체인 사진에 담겼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집 출간의 의미는? 사진이 갖는 기록적인 의미를 극대화 했다는 점이다. 34년 동안 한 테마로 촬영된 사진을 한권으로 묶어 변화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시공간을 아우르며 한 사회의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시각적인 변이를 가지며 기록해온 것으로 사진매체의 기록성을 집중적이면서 압축적으로 또 집요하게 보여준다.

김기찬은 어떤 사진가였는가? 건장한 외모에 아주 섬세하면서 감성적이었다. 사진에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다. 골목에서도 작가나 기록자의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풍경과 누드 등 주류 사진과 동떨어진 사진을 하면서 주변 시선에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모습에 대한 향수와 그곳 사람들과의 일체감 때문에 평생 골목 사진을 찍어왔다. 이웃과 친구, 살던 동네에 대한 그리움이 골목안 풍경이란 기념비적인 기록을 만든 것이다. 형식주의 사진과 거리를 두고 충실하게 자신만의 사진세계를 이룬 독특한 사진가다. 사진이 형식적으로 흐르는 것에는 안타까워했지만 직접 나서서 발언하는 성향이나 위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덜 조명받기도 했지만 사진이 인간 삶의 기록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TV방송국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면서 인간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고, 사진에서도 구도나 배치가 남달랐다.

저평가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대부분을 한국사진의 주류에 끼지 않았다. 세련된 형식을 따르지 않고 한가지 테마로 일관해온 그를 아마추어로 치부하기도 했다. 형식적이고 수사학적인 사진에서 보면 김기찬의 사진은 여러 정보를 담고 있어 산만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골목에 대한 인문적, 예술적 소양이 부족했고 이해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비평가군이 부재한 한국사진의 현실을 반영한다.

만든 사진책마다 소설가의 글을 함께 실었다. 1집 때 처음 사진을 보고 사진 한 장으로 중단편 소설 한권은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삶의 애환과 정겨움이 담겨 있었다. 편집자로서 다양한 계층과 분야의 사람들이 사진을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했고 또 한편으론 일반 독자들이 사진을 너무 어렵지 않게 대하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만나는 지점에서 가장 감동한다. 그 지점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시각으로 해석한 글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가가 사진의 정서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공학자는 또 다른 가치를 말할 수 있다. 다행히 사진을 보더니 다들 흔쾌히 응해줬다. 과거 자신이 살고 기억하던 동네가 바로 사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찬의 다른 책도 구상 중이라고 안다. 미공개된 사진이 상당하고, 다행히 유족분들이 정리를 잘 해놓으셨다. 이 사진들을 어떤 맥락으로 엮을지 계속 분류하는 중이다. 편집자의 관점에서 골목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고 다양화시키는 사진을 찾아 엮어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70년대와 80년대의 도시빈민과 행상을 찍은 사진과 서울 근교의 농촌 변화상을 기록한 사진도 다수 있다. 일부는 ‘잃어버린 풍경’으로 출판된 적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놓쳐버린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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