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아트 | 리뷰

본능과 직관에 따른 충격적 아름다움

2012-09-07


빛이 들지 않는 도시의 혈관 속에 음지식물인양 덩그러니 피어있던 야생화. 몇년 전 그녀의 작품 ‘나도(裸都)의 우수(憂愁)’(Naked City Spleen)를 보고 들었던 첫 느낌이다. 오래된 공장, 터널, 하수구 등 도시의 내부를 탐험하던 그녀의 몸은 그곳에 서식하던 여느 동식물처럼, 자신의 속을 거침없이 드러낸 도시의 그 모습처럼 아무런 허물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집단적인 기억과 꿈이 숨쉬는 도시의 심층을 탐험하고 있었다.

글│현정아 기자
기사제공│월간사진

그러나 관람자로서 ‘김미루’에 대한 탐험에는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한국 언론은 온통 그녀의 이름 앞에 ‘도올 김용옥의 딸’ 혹은 ‘파격 누드’라는 수식을 붙이며 이슈 만들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최근, 그녀의 이름 앞에 ‘돼지’라는 수식이 새로 붙었다.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선보인 ‘돼지, 고로 나는 존재한다’(The Pig That Therefore I Am) 시리즈와 바젤 아트페어 행사 기간 중 104시간 동안 돼지퍼포먼스를 선보인 이후였다. 그녀와 그 작업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갈 즈음, 마침 3월29일부터 4월30일까지 트렁크갤러리에서 <접촉지대 피부 : 피부에서 피부로 전해지는 타자들의 웅얼거림> 전을 통해 ‘The Pig That Therefore I Am’ 시리즈를 선보인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 없이 전시를 앞두고 미국에서 귀국한 김미루를 만났다.

돼지와 피부 맞대며 ‘존재’를 인식하다

최근 마이애미에서 열린 바젤 아트페어 행사기간 중, 104시간 동안 돼지 퍼포먼스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어떤 퍼포먼스였는가?
아트페어에 참가한 한 미술관 안에 돼지우리를 만들고 ‘나는 돼지를 좋아하고 돼지는 나를 좋아한다’라는 주제로 돼지 2마리와 4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며 생활했다.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듯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관람객이 퍼포먼스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이따금씩 그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고 돼지와 같은 높이로 엎드려 눈을 마주치고 몸을 부대껴가며 그들과 교감하는 데만 집중했다. 원시적 감성과 본능만이 남은 그 장소에서 104시간 동안 지내는 동안 동물로서의 인간, 문명화된 도시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 퍼포먼스는 대규모 양조장에서의 작업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워낙 농장주들의 허락을 받기 힘들었기 때문에 몰래 찍고 서둘러 나와야 할 때가 많아 촬영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극도의 긴장 속에서 진행해야 했다. 그에 비해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는 심적인 불안감은 없었지만 대신 엄청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104시간 동안 돼지와 함께 먹고 자며 그야말로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시간이었다.

지난 2009년, 갤러리현대에서 ‘나도의 우수’ 시리즈로 첫번째 국내전시를 열었고 올해 3월부터 트렁크갤러리에서 두번째 국내 개인전을 연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은 어떤 내용인가?
작년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선보인 ‘돼지, 고로 나는 존재한다’(The Pig That Therefore I Am) 시리즈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자크 데리다가 쓴 ‘동물,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빌려 제목을 지었다.

이는 피부를 통해 나와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작업이다. 피부는 모든 감각들이 펼쳐지고 전달되는 조직으로, 모든 사회적, 문화적 외피를 벗겨낸 적나라한 생명의 얼굴이다. 이 작업을 위해 돼지들이 사육되는 대규모 양돈장에서 그들과 함께 뒹굴며 누드로 촬영했다. 나체로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서서히 친밀해지는 과정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안에 돼지와 함께 있다 보면 몸에는 온통 느낌밖에 남지 않는다. 모든 감각들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곳에선 인간이 만들어놓은 복잡하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본능과 직관에 충실해진다. 피부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왜 하필 돼지인가?
의대 진학을 위해 프리메드에서 공부하던 시절, 돼지 태아를 해부한 적이 있다. 그때 돼지와 인간이 생리학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돼지는 비록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동물이지만 식용으로 많이 먹을 뿐만 아니라 장기이식의 가능성도 보일 만큼 인간과 친밀하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미대에 진학했을 때, 양돈장의 돼지 이미지로 과제를 했던 적이 있다. 이를 시작으로 돼지는 내 작업에 있어 줄곧 중요한 모티프이자 오브제가 되어 왔다.

돼지와의 촬영은 어땠는가?
처음엔 돼지들이 내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건드려보고 심지어 멍이 들도록 물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돼지도 나도 안정을 찾아갔다. 내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파악한 후에는 대체로 부드럽고 신사적으로 행동했다. 나는 곧 조그만 움직임에도 그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그들처럼 꿀꿀거리며 교감을 시도했다.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언어로도 교류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 가끔 나를 공격하는 사나운 돼지들에게는 코를 차고 소리를 지르며 똑같이 분노를 표현했다.

작업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가? 작업노트에 철학자의 글귀가 많은 걸 보면 책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는 것 같다.
그 반대다. 영감을 얻은 후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사실 작업의 처음과 끝이 굉장히 직관적이고 직감적으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어떤 작업은 아무 이유 없이 시작되기도 한다. 다만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굉장히 오랫동안 그 주제에 몰입하고 집착하는 편이다. 그 과정에서 주제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작업의 내용을 살찌운다. 인문학적 베이스는 콜롬비아대학교 재학시절에 나름 탄탄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때는 수업을 위해서라도 정말 많은 책들을 읽어야 했다.

돼지 퍼포먼스를 통해 “이번 경험이 어둠, 위험한 일, 더러움 등에 대한 나의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당신의 지난 작업을 돌이켜 봤을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평소에 나는 매우 청결한 사람이다. 그래서 돼지우리나 하수관 등에서 작업해야 할 때는 이전의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작업을 끝내고 나서는 내가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에 극도로 몰두한다. 두려움까지는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위생에 민감한 편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손 씻으라고 난리지만, 나는 그 반대로 너무 자주 씻어 늘 손등이 부르텄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그만 좀 씻으라고 말릴 정도였으니까. 얼마 전 아프리카 여행을 가서도 씻는 것이 불편해 너무 괴로웠다. 살면서 큰 고생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환경에 노출되면 유난히 불편하다. 하지만 금세 또 적응하고 잘 지낸다.(웃음)

예술은 ‘선물’, 서서히 차오르는 감동

말이 나온 김에 김미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13살 때 부모님을 설득해 홀로 미국에 유학을 간 것을 보면 매우 독립적인 아이였을 것 같다.
하도 말을 안 해서 사람들이 벙어리인줄 알았다고 하더라.(웃음) 조용조용한 성격으로, 친한 친구 2~3명과 어울려 산에 올라가 노는 걸 즐겼다. 비록 벼락치기였지만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떠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때도 큰 반대 없이 허락해주셨다. 물론 그 전에 내가 유학을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부모님을 설득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월등한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나의 의지에 대한 믿음을 심어드렸다.

동물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다. 예전에 쥐도 키웠다던데?
토끼, 뱀, 개, 고양이, 물고기, 병아리, 햄스터 등 어릴 적부터 여러 가지 동물을 키워왔다. 특히 사람과 가까운 동물을 좋아한다. 개, 고양이, 소, 말과 같은 동물 외에도 여러 맥락에서 사람과 가까운 동물이라면 다 좋다. 그중 돼지는 앞서 말한 대로 식용으로도 많이 먹지만 사람과 생리학적으로도 매우 유사하다. 쥐는 도시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실험용으로도 많이 쓰이지 않나. 심지어 미국에서는 애완용으로도 많이 키운다. 처음엔 살아있는 동물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쥐를 키우기 시작했다. 애완동물 숍의 동물 중 가장 싸기도 했고 그리기에도 간단해서였다. 키워보니 그동안 키운 동물 중 가장 수월했다.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집을 비울 일이 많은데 혼자서도 잘 지내고 무엇보다 굉장히 영리하다. 키우던 쥐가 죽은 뒤에는 도시 속 쥐들을 따라 뉴욕의 하수구나 지하철 등 구석진 곳을 다니게 됐는데 이것이 ‘나도의 우수’ 시리즈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전공했고 프리메드(Pre-Med)에서 의대 진학을 위해 공부하다 다시 진로를 바꿔 회화를 전공했다. 또 현재는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 진로를 바꾸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 의대진학을 원하셨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가장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직업이니까. 나 자신도 해부학에 관심이 많아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 과정이 나와는 맞지 않아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열정의 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진심으로 열정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것이 바로 미술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지만 그전까지 미술은 왠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것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대공부로 한창 힘들었던 시절, 나를 구원해준 건 바로 미술이었다. 책을 읽고 박물관도 다니며 엘 그레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주로 클래식한 작품들에 감명 받으며 위로를 얻곤 했는데, 그때 비로소 미술로도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의 예술관은 ‘gift’가 됐다.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으니 나 역시 내가 받은 감동을 작품으로 환원시켜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감상할 때나 작품을 만들 때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느낌’이다. 설명 없이도 강렬하게 전율시키는 음악에 비해 미술은 그 힘이 다소 부족하다. 보는 순간 아무런 설명 없이도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터치 하나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회화처럼 사진 역시 터치가 느껴지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래서일까. 당신의 작품은 돼지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정적이고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말한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최근 중국에서 태아를 먹는다거나 자신의 신체를 자르는 등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아티스트가 있긴 하지만 나의 작업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내 작업도 누군가에게 파격적이고 충격적일지 몰라도 프린트된 결과물은 아름답게 보였으면 한다. 나의 작품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러나 작업 과정은 보이는 것과 달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악취와 소음 속에서 진행된다. 처음 작품을 마주할 때는 비록 잔잔할지 몰라도 오래 바라보고 생각할수록 서서히 충격이 차오르는 작품이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김미루’에 관한 언론의 호기심 넘치는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어릴 적부터 몸에 인이 박였다. 한창 아버지에 관해 언론이 떠들썩했을 때도 정작 우리 가족들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인터넷은 가십성 기사가 너무 많아서 더더욱 안 보게 된다. 가끔 어머니가 먼저 살펴보시고는 보지 말라고 말리기도 한다.(웃음) 그나마 외국에서는 ‘도올 딸’이라는 수식은 붙지 않는다. 다만 돼지퍼포먼스에 관해 뉴욕타임즈와 데일리메일에 기사가 실린 후 가십성, 단발, 오보를 포함해 정말 많은 기사가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그중에서도 돼지를 좋아하는 중국 언론의 반응이 제일 핫(?)했다.


‘돼지에 이어 다음 작업엔 또 어떤 동물이 등장할까요?’라고 물으니 김미루는 대번에 ‘낙타요’라고 답한다. 안 그래도 국내 전시를 마친 뒤 곧바로 몽골로 떠날 예정이라고 한다. 인터뷰 내내 입으로는 ‘돼지’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낙타’로 가득 채워진 듯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유목민과 함께 생활하며 낙타를 촬영할 것이라고 했다. “낙타가 없으면 유목민 문화도 없다. 예전에 유목민과 함께 생활해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아직까지도 낙타에게 엄청난 의지를 하고 있었다. 현대 문명에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이처럼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그 관계를 존경하게 됐다”고 말하며 잠깐 동안이지만 ‘낙타’ 얘기에 들뜬 모습을 보였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작업에 대한 그녀의 몰입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아티스트로서 김미루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김미루(Miru Kim)는 1981년 미국 매사추세츠 스톤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다 1995년, 13살의 나이에 홀로 매사추세츠로 돌아와 필립스 아카데미를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후 콜롬비아대학교에 입학해 프랑스어와 낭만주의 문헌학을 전공했으며 프랫인스티튜트에서 회화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도올 김용옥의 막내딸이라는 사실로 한국언론의 관심을 모았지만 이후 ‘나도의 우수’(Naked City Spleen), ‘돼지, 고로 나는 존재한다’(The Pig Therefore I Am) 등의 시리즈를 차례로 선보이며 아티스트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facebook twitter

월간사진
새롭게 떠오르고 있거나,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진가가 월간사진을 통해 매달 소개되고 있습니다. 월간사진은 사진애호가와 사진가 모두의 입장에서 한발 앞서 작가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심도 깊은 사진가 인터뷰와 꼼꼼한 작품 고새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 사진잡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