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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섬에서 마주한 시간의 깊이 김영수의 떠도는 섬

2007-06-19

수백, 수천 년의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을 오롯이 안고 있는 바다. 그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다 한 가운데 섬이 있다. 1997년부터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가 김영수. 그가 섬에서 찾고 있는 것은 바다와 섬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의 깊이인지도 모른다. 2004년 개인전 <떠도는 섬> (가나포럼스페이스)을 통해 그는 처음 바다와 섬과 섬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보여 주었다. 그리고 2007년 오늘, 사진집 『떠도는 섬 2』를 통해 다시 말을 건넨다.

취재 │ 정은정 기자 (포토넷)

30여 년 전 김영수는 카메라를 들고 서울 청진동, 모래내, 명동, 옥수동, 아현동 뒷골목 곳곳에 서 있었다. 질퍽거리는 그 뒷골목에는 구두 닦는 사람이, 도장 파는 사람이, 전당포 주인이 골목을 지키고 있는 빛바랜 벽과 허물어져 가는 계단과 함께 있었다. 또 흙먼지로 뒤덮인 길바닥에는 멈춰 버린 시계, 고장 난 의자, 숨이 끊긴 새가 내버려져 있었다. 그때 그가 기록한 도시의 오래된 시간은 ‘현존’(1978~1982)에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서울 골목골목을 누비며 기록한 ‘현존’의 한 편에는 욕지도, 여수 돌산섬의 섬사람들이 있다. 시골에서 이제 막 상경한 젊은 청년의 가슴에 그의 누이의, 어머니의 사진이 박혀 있는 것처럼 섬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떠도는 섬’은 김영수가 바다와 섬을 떠나 콘크리트 도시에 익숙해질 즈음인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다. 이후 그가 선보인 ‘사람’(1982~1993), ‘한국의 나무 탈’(1984), ‘정물’(1996)’, ‘떠도는 시간의 기억’(1997) 등 대부분의 사진 시리즈 역시 ‘현존’의 그 시간에서부터 시작한다. 30여 년을 찬찬히 거슬러 올라가면 그가 그동안 카메라에 담아온 모든 사진의 시작을 ‘현존’에서 보게 된다. 30여 년 전 젊은 청년 사진가의 카메라가 담은 세상이 3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가지에 가지를 뻗어 펼쳐진 셈이다. 단절과 경계로 층층이 쌓이는 높이의 흔적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어 흩어지는 넓이의 흔적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다큐멘터리는 흔히 말하듯 오늘의 사건 사고를 담는 것이 아니에요. 한 인간이 현실에 적응해 살아오면서 일생 동안 보았던 것, 고민했던 것, 즐겨 왔던 것들을 담아 내는 것이죠.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를 거치면서 겪는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인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쉽게 간과하는 것 같아요. 사진은 그 긴 시간에서 이뤄지는 빼기 작업이지 더하기 작업이 아니에요. ‘이건 덜 좋지, 이게 더 낫지’하며 빼고 나중에 찍은 사진보다 전에 찍은 사진이 더 좋아서 나중 사진을 빼고… 그렇게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떠도는 섬 2’ 역시 ‘현존’으로부터 시작한 ‘떠도는 섬’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형체 없이 쌓여만 가는 시간의 깊이 앞에 무력한 한 인간이 바다와 섬을 떠돌며 ‘다하지 못한 그리움과 끝내지 못한 기억들’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영도에서 자갈치 시장까지 헤엄쳐 건너기도 했지요. 그리고 통영 욕지도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기도 했고요. 그래서 비가 오고 바람 불고 파도치는 바다를 자연스럽게 보고 자라 왔죠. 섬에는 그런 어린 시절 나의 기억들이 있어요. 1963년 서울에 올라와 40년이 넘게 서울에서 살아왔어요. 그 사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은 사라지고 지금은 그곳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살던 집, 내가 다니던 초등 학교, 매일같이 드나들던 구멍가게도 없어지고 그곳에 통째로 아파트가 들어섰죠. 사람들은 살면서 자기 고향을 생각하고 한 번쯤은 고향을 찾는데 고향에 가도 내 고향은 없어요.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죠. 산에서 ‘야~’하고 소리를 외치면 되돌아와요. 그런데 바다를 앞에 둔 섬에서 ‘야~’하고 외치면 누군가 그 소리를 받아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섬이 좋고, 섬을 찾게 돼요. ‘떠도는 섬’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김영수의 ‘떠도는 섬’에는 잃어버린 고향이 있고,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흔적들이 있다. 흔들리는 낡은 배 위에서, 하늘과 바다의 중간에 자리한 섬의 안개 싸인 허름한 선착장에서 그리고 긴 시간 비바람에 깎인 갯바위 아래에서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있다. ‘떠도는 섬’에 섬과 바다의 움직임이 있다면 ‘떠도는 섬 2’에는 카메라를 든 사진가의 움직임이 있다. 온몸으로 세월을 안고 있는 섬에서 김영수는 기억 저편 시간의 그림자를 찾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 뜨거운 태양의 광선 대신 축축한 바다의 물기가 묻어나는 것은 섬을 떠돌며 느꼈을 지난 시간에 대한 그의 아픔 때문일 것이다.

“사진으로 내 목소리를 내고 싶어요. 또 지금까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왔고요. 소설가가 글을 통해 자신을 내보이듯 나를 사진으로 내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내 존재 가치를 깨닫고, 얼마만큼 삶에 충실했는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거죠.” 사진가 김영수. 그는 이제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을 믿고 지켜봐 온 사람들, 옆에서 우정을 나눈 친구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자기 모습을 위해 지내 온 날보다 삶에 더 충실하려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사진가로서 살아온 자기 삶의 몫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몫을 하기 위해 그는 이제 30여 년간 카메라에 담아 온 시간의 흔적 하나하나를 계속해 내보이며, 이제껏 그래왔듯 오늘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카메라를 손에서 놓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죽는 날까지 현역 사진가로 있을 것이고, 사진으로 소통하기 위해 잘 만든 사진집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 해요. 소통이 잘 되어 누군가가 내 사진을 좋아하고, 그래서 내 사진을 컬렉션한다면, 그것으로 또 사진을 찍고 좋은 전람회를 하고 더 좋은 사진집을 만들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죠.”

그는 젊은 사진가들이 쉽고 빠른 삶의 길을 택하기보다는 인내와 끈기를 갖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기를 다듬어 가는 사진가가 되길 바란다. 남의 눈보다는 자기의 눈을 더 존중하고, 그 눈으로 자신을 꾸준히 성찰하여 이 땅에서 내가 누구이며 내 사진이 무엇인가를 사진을 통해 알아가기를 바라는 것. 그 역시 그런 삶 속에 있다. 일 분 일 초를 재촉하다 결국 제 발걸음에 자신이 치이기보다 자기의 심장 소리에 맞춰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온전한 걸음으로 걸어온 그. 찬찬하지만 자기 가슴에 정직한 발걸음으로 걷는 그이기 때문에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왔을 터이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손으로 삶의 원을 그린다. 너무 빨리 그리려다 원의 끝을 놓치기도 하고, 크게 그리려다 채 마저 그리지 못하기도 하며, 자신이 그리려던 것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방향을 잃기도 한다. 사진가 김영수, 자기 삶에 정직하고자 줄곧 사진가로서의 외길 인생을 살아온 그가 완성하는 원은 어떤 모습일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간을 담고 있는 바다의 수평선을 앞에 두고, 자기 삶과 당당히 마주하는 그에게서 그 원을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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