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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사진, 네 멋대로 해라

2011-12-01


구술 | 최원준
사진/정리 | 포토라이터 이상엽
기사제공 | <월간사진> 2010년 3월호



창동스튜디오에 대해 : 올해 무슨 작업을 하려는가?

2010년, 1년 동안 창동스튜디오에서 있을 수 있게 됐다. 의정부와 가까워 군사도시에 대한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최근에 열었던 개인전 <타운 하우스> 가 요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쉽게 끝낼 생각은 없다. 집요하게 긴 시간동안 승부를 할 생각이다. 군사문화와 개발독재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의정부나 파주 지역이다. 이곳을 통해 그런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다큐멘터리와 아트 사이에서 나만의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고 싶다.

이제 32살이지만, 작가로서 승부를 걸어야 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안 된다면 딴 일을 찾아봐야겠지. 상업적으로 비평적으로 더 많이 인정받아 40대에는 내 작품을 팔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천천히 준비하면서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도 타진해야겠다. 유럽의 미술관 등에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전시에 참여하려 한다. 그렇게 작품을 알리고 국내에 역수입하는 거다. 내 작품은 경쟁력이 있다. 아직 내 사진을 알아주는 이가 적어서 그렇지 형식, 접근성, 내용, 마감 등에서 나름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 아닌가? 해외 작품들을 살펴 보건대 스스로 내 위치를 안다. 물꼬만 트이면 잘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돈 걱정 없이 작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작품을 팔기에 한국사회가 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바뀔 것이다. 그것을 작가가 걱정할 것은 아니다. 다만 작품을 예쁘게만 만들려는 요즘 경향이 역겨울 뿐이다. 멀리 보고 작업하려고 하지만 현실은 맨날 죽을 쑤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백남준도 젊은 시절에 로마에서 전시하는 꿈을 꾸었고 그것을 이뤘다. 성공한 작가는 강하다. 나도 이 판에 들어온 이상 성공하고 싶다.


첫 개인전에 대해 : 젊은 의욕이 대단하다. 어떻게 작업하나?

첫 개인전은 브레인 팩토리와 두아트 갤러리에서 동시에 진행한 <언더그라운드> 였다. 미아리 텍사스와 콜라텍을 찍은 것이다. 장소와 공간에 대한 문제를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성의 성의 상품화가 그 공간 인테리어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미아리에는 이런 업소가 270곳 정도 되었는데, 출입구가 6개, 샛길이 6개 있었고 전체를 돌아보는 데만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그야말로 관광코스였다. 여성들이 쇼윈도 안 방석에 앉아있었고 남자들은 밖에서 그 여성들을 골랐다. 상품을 구매하는 형식이랄까.

섭외는 힘들었다. 기획의도를 종이에 프린트해 보여주며 사정을 했지만 재수 없다며 뿌리는 소금을 맞았다. 결국 자율정화위원회라는 곳을 찾아가 부탁했다. 와! 조폭사무실 같은 곳이었다. 거절을 해도 3번쯤 찾아갔을까? 결국 그들의 협조를 얻어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쇼윈도의 모습을 대형카메라에 담았다. 2주에 걸쳐 작업을 하는 동안 배짱도 늘어 업소 주인들에게 구라도 많이 쳤다.

그리고는 ‘성매매방지법’이 발효되고 미아리 뉴타운도 발표됐다. 하나둘씩 떠나고 업소는 부숴졌다. 2년 정도 작업했다. 그곳이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사창가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평가하건대 그리 많은 주목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09년에 열린 <젊은 모색> 전에 다시 걸렸을 때 갈증을 조금 푼 것 같다.


청춘에 대해 : 전투경찰이었다고 들었다.

대구예술대학교를 1년 반 다니다가 그만뒀다. 그리고는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나섰는데, 집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학교하고는 인연이 없다. 23살이었던 2001년 쌈지에서 열린 ‘독립예술제’에 참가해 10점 정도를 전시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의경으로 복무했다. 당시는 데모가 많았다.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있었고, 부안 핵폐기장 사건도 있었다. 8개월 동안 방패를 잡다가 사진기능사 자격증이 있어 일종의 증거사진(채증사진)을 찍었다.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사실 생활은 만고 땡이었다.

철학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푸코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를 공부하기도 했다. 근무하던 곳이 신당동에 있던 기동대본부였는데, 사실 서울 속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사회인 같은 느낌인데 퇴근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수용소였다. 야~ 푸코가 한 이야기가 이런 느낌이구나, 감시와 처벌이 있는 곳 그리고 건물 안의 보일러실과 체육관의 낯섦. 그래서 ‘이런 것을 찍어봐야 겠구나’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할당되지 않는 공간> (2002~2004)이다. 사진에선 경찰서의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없지만 이는 사회구조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성질서처럼 사진은 보다 더 실재적인 경찰서의 구조와 질서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들고 이영준 선생을 찾아갔다. 신문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진가를 중심으로 ‘다큐멘트’라는 전시를 준비한다는 내용을 보았었다. 사실 22~24살 무렵에 나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사진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재능이 있는 예술가를 확신했다. 학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경찰서에서 찍은 사진 20장 정도를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단 10분 준다”는 이영준 선생을 만나 정신없이 설명하고 “열정이 좋다.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만 듣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전화가 왔다. 함께 해보자는 이야기였다. 날듯이 기뻤다. 그래서 그분이 날 발굴해준 분이라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용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는지 뭔가 될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름 앞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미아리와 재개발 등을 기획하고 현실화 해나갔다.


사진에 대해 : 뭘 잘한다고 생각하나?

당시를 다시 떠올리면 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진을 하고 있는데 사진계에서는 나를 미술쪽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다. 지금도 사진쪽에서는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물론 그런 것은 내 행보가 결정짓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 사진을 설명한다면 미국의 뉴다큐멘트와 뉴컬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독일 계통의 개념사진과는 별 인연이 없다.

나는 전통적인 기록사진의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색감을 통해 만들어진다. 미아리 텍사스를 찍을 때는 너무 다양한 조명 때문에 색에 대한 고민을 했고, 여의도 벙커를 찍을 때는 일부러 흐린 날이나 우기를 택해 대상의 원색을 살려보려 했다. 서울 근교 도처에 깔려있는 군사 시설물도 마찬가지인데, 국방색의 차가움을 표현하는데는 역시 컬러가 필요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사진은 흑백인데 비해 내가 현실을 투영하는 데는 컬러사진이어야 했다. 나는 흑백의 빈티지한 느낌보다 컬러의 명징성이 좋다.

이것들은 다른 영역의 위장이며 은폐지만, 뉴타운의 광풍과 국가안보의 논리를 뛰어넘은 욕망 앞에 사라지고 있다. 사라지는 군사시설물들은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소멸되어 냉전의 종식을 알리는 듯해 그 제목을 <과냉각 상태> 라고 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의 문맥을 읽어주는 사진계의 평론을 받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해 : 사진 말고 뭘 좋아하나?

여자와 술이다. 둘 다 없으면 못산다. 중학교 때 취해서 기절한 후로 내게 술은 친구다. 술 취한 기분이 좋다. 즐겁게 살려 한다. 그리고 초현실적인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UFO 그리고 귀신, 점도 좋아하고 뉴에이지 서적을 즐겨 본다. 채널링이라고 아나? 외계인과 대화하는 것이다. 뉴에이지 작가인 다릴 앙카가 지은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를 좋아한다. 무슨 일을 하거나 가슴 뛰고, 즐겁고, 행복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다.



최원준과의 만남은 역시 술이었다.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윤정미작가와 함께 만난 이 젊은이가 소주 병나발을 부는 것을 보고(물론 사진을 위한 행위였지만) 꽤나 매력적인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직접 볼 때나 타인의 입을 통해 들어볼 때 참으로 거침없는 친구였다.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랬다. 하! 이거 확실히 세대차가 났다.(나와는 띠 동갑이다) 다른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후배 사진가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자신만만함 속에는 콤플렉스로 가득하다. 학연, 지연, 재력 등등. 그에게는 사진판에서 성공하기에는 없는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흥미롭다. 최원준이 성공한다면 의지와 재능만으로도 대접받는 사회로 이행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을 기대해본다.




최원준은 1979년 서울 출생으로, 작년 12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스튜디오 장기 입주작가로 있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타운하우스> (인사미술공간), 2006년 <언더그라운드> (브레인 팩토리, 두아트 갤러리) 등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07년 중국작가 리우렌과 베이징 따샨즈 798의 갤러리 묵에서 2인전을 가졌다. 참여한 주요 단체전으로는 2009년 <젊은 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8년 <타이페이 비엔날레> (타이페이시립미술관, 타이완), 2007년 <도시를 둘러싼 질문들> (Canal de Isabel II, 마드리드), 2004년 <다큐먼트>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1년 <독립예술제> (쌈지스페이스 sori, 서울) 등이 있다. 2009년 미국 시애틀의 비영리 사진센터인 PCNW에서 Honorable Mention을 수상했고, 사진책으로는 ''시선의 지정학''(2009, 눈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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