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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디자인과 장식 사이, 북디자이너들의 ‘예술 쟁취’ 여정

김태형 외 6명 | 2015-05-22


서점 판매대를 둘러보며 불평을 늘어놓던 시절도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표지, ‘영혼 없는’ 홍보 문구로 도배된 띠지, 오가며 읽기엔 영 무거운 양장 제본 일색. 책이 보수적인 매체일지언정 디자인의 자유를 이렇게까지 침해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북디자인의 다양성 결핍에 시달리던 장서가들에게도 서서히 해갈(解渴)의 문이 열리고 있는 듯하다. 한 번쯤 커버를 들춰보고 싶고, 책등만으로도 수집벽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손짓하는 풍경. 북디자인에 예술성을 불어넣으려는 신념을 지켜 온 북디자이너들의 건투 덕택이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자료제공 | 출판사 달
 

“디자인 초년병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듣는 말이 있다. “예술 하지 마라.” 맞다. 예술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작품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 (중략) … 북디자인의 목적은 무엇일까? 눈에 띄기? 글쎄. 추한 것, 이상한 것도 눈에 띈다. 눈에 띄게 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북디자인으로 작품 하는 게 어쩌면 예술로서의 그것보다 힘들지도 모른다.”

‘예술’이라는 장에서 북디자인은 어떤 계급에 속할까? 북디자인의 어려움은 순수예술처럼 완전한 무(無)로부터 창조되는 시각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 기저에 존재하는 원고 덕분이다. 〈B컷: 북디자이너의 세 번째 서랍〉(이하 〈B컷〉)의 공동저자 엄혜리 디자이너에 의하면 ‘북디자인은 나무이고, 이 나무의 뿌리는 원고다. 북디자이너는 원고에서 뽑아낸 양분으로 풍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책에 선사한다’. 소비자를 유혹하되 원고의 맛도 살려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이에 한 권의 책이 출판되는 데 얽힌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작업은 더욱 험난해진다. 무성한 알력을 조율하고 때로는 자신의 미감을 양보해야 하니, 북디자이너는 작가이자 감독인 동시에 협상가인 셈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B컷〉에는 출판디자인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일곱 북디자이너의 B컷이 담겨 있다. 이를 기회 삼아 디자이너의 하드디스크 속에 잠들어 있던 불운의 B컷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A컷과 B컷을 병치한 구성은 양자를 번갈아 비교하게끔 이끄는데, 간택(?)되지 못했을망정 B컷이라고 뒤지는 법은 없다. 때로는 A컷을 능가하는 B컷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때로는 B컷에서 A컷으로 눈을 돌리며 머리를 주억거리게 된다. 이렇게 ‘챔피언’과 ‘만년 후보’가 연장전을 벌이는 사이, 해당 북디자이너들은 B컷을 화두로 북디자인 업계와 실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휴머니스트에서 인문학 서적을 주로 작업해온 김태형, 일러스트풍 북디자인 트렌드를 선구한 김형균, 강렬한 장르문학 디자인으로 정평 난 박진범, 문학 거장과 전집 북디자인을 선보여온 송윤형, 단단한 구조와 캘리그라피의 활용이 돋보이는 엄혜리, 북유럽 스타일 가구를 연상시키는 심플한 특색의 이경란, 한 가지 스타일로 규정할 수 없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은경. 이름은 생소할지라도 그 작품은 낯설지 않을 만큼 손꼽히는 북디자이너들이다. 공동저자로 분한 이들은 인터뷰 형식으로 본인의 리소스를 꼭꼭 눌러 담았다. 〈B컷〉에는 경험하지 않고는 모를 이야기들, 현장에서 피부로 겪은 우여곡절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우리는 책의 인상을 정하는 사람들이다. 단순한 텍스트의 반영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재해석해 얼마든지 작가적인 입장이 될 여지가 많은 직업이다. 이미 그 지점에 가 있는 몇몇 디자이너들은 시장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출판사들이 찾아오도록 만든다. 그분들에게 상업적인 논리를 들이대며 고집불통이라 욕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대한 고래 앞에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작은 물고기떼처럼 느껴진다.”

북디자이너에게 오롯이 디자인만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란 그야말로 축복 아닐까. 독자, 편집자, 때로는 출판사 대표, 혹은 원고 작가, 이에 더해 제작 비용과 판매 실적까지. 북디자이너는 첩첩한 난항 속에서 작품을 밀고 나가야 한다. 이 지난한 과정의 산물이 바로 B컷인 셈이다. 〈B컷〉의 공동저자들은 진솔한 톤으로 북디자이너로서의 고충을 토로한다. 작업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와 의가 상하거나, 애써 타협해 찍어낸 A컷이 SNS를 타고 혹평받기도 한다. ‘내 작품’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만든 들러리용 B컷이 A컷으로 선정되는 낭패를 볼 때도 있다. 실무와 맞닿아 있는 현실적인 에피소드들은 독자를 녹록지 않은 북디자인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러나 〈B컷〉을 단순히 한국 북디자인의 한계를 고발하는 성토장이라 요약할 수는 없을 일이다. 북디자이너의 삶과 작업에 대한 주옥같은 이야기가 녹아 있는 덕분이다. 일곱 공동저자는 북디자인 철학, 업계에 입문한 배경과 계기, 인하우스 혹은 프리랜서 북디자이너로서 거쳐 온 과정, 경험으로 구축한 작업 방식과 노하우 등 귀중한 소스를 공유한다. 출판업계라는 ‘골리앗’에 맞서 온 무기는 제각각이지만 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한결같다. 북디자인에 ‘로망’을 가진 지망생들, 혹은 한창 고뇌할 시기의 북디자이너들을 향한 조언에서는 애정이 묻어난다. 술술 읽히는 문장을 따라 〈B컷〉의 커버를 덮을 즈음에는, 북디자이너가 도전할 만한 매력이 넘치는 직업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모두가 그럴싸한 표지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될 필요 없다는 것, 북디자이너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이 베스트셀러 표지를 장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기만의 길을 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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