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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은둔형 예술 쇼핑 중독자, 찰스 사치와 나누는 공식적인 대화

찰스 사치 | 2015-07-31


영국 미술사에서 20세기는 소위 암흑기였다.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대스타가 가물에 콩 나듯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팝 아트와 함께 예술이 만발했던 동시대 미국과 비교하면 궁색한 형편이었다. 그렇게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방황하던 한 세기의 끝자락, 영국 아트 신(scene)에 YBA(Young British Artist)라는 슈퍼스타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골드 스미스 대학 출신의 이 청년들은 단숨에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영국 미술 시장의 중흥을 견인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찰스 사치(Charles Saatchi)라는 ‘킹 메이커’가 있었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자료제공 | 오픈하우스
 

모든 예술가가 고흐처럼 비참한 삶을 살다 죽어서야 이름을 남기지는 않는다. 루벤스가 화가로서는 드물게 개인 공방에서 백여 조수를 거느리며 호사를 누린 것은 그를 궁정 화가로 고용했던 알베르토 대공 덕택이었다. 금융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메디치 가문은 대대에 걸친 예술 후원으로 미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코지모 메디치는 파산에 이른 건축가 브루넬레스코가 두오모 성당을 완성할 수 있도록 후원했고, 소년 시절부터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눈여겨본 로렌초 메디치는 그를 궁으로 들여 양자처럼 키웠다. 메디치에게 문예 장려가 귀족적 명망 획득의 수단이었다손 치더라도, 그 덕에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도 배곯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을 터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트 컬렉터 계의 유명 인사, 찰스 사치의 행보에는 이 같은 대부호의 예술 후원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사치는 불과 20대에 광고 회사 ‘사치 앤드 사치(Saatchi&Saatchi)를 설립, 영국 보수당의 전설적인 슬로건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Labor is not working)” 등을 히트시키며 사치 앤드 사치를 글로벌 대기업으로 번성시킨 광고 재벌이다. 이 영민한 슈퍼 리치는 1985년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 개관을 시작으로 아트 컬렉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1997년에는 YBA 작품이 다수 포함된 사치 컬렉션 전시 〈센세이션(Sensation)〉을 선보이며 미술계에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유례 없는 파격성으로 대중과 평단을 충격에 빠뜨린 논쟁적 전시 〈센세이션〉을 계기로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마크 퀸 등 젊은 영국 아티스트들은 예술계의 선봉을 잡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막혀 있던 영국 미술의 맥에 ‘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다.

“지금은 18세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하지요. 우리는 더 이상 전 세계의 예술품들을 다루는 데 있어 국수주의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서 작업하는 작가들을 지원하는 겁니다.”

〈센세이션〉 이후 사치는 ‘스타 아티스트’를 만드는 ‘슈퍼 컬렉터’가 됐다. 가치가 보장된 고전보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사치의 모험가적 성향은 본인뿐만 아니라 데미안 허스트 같은 아티스트도 돈방석에 앉혔다. ‘사치’라는 이름이 작품 보증서라도 되는 양 사치가 구매했다 하면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으니 예술가로선 기쁨의 비명을 지를 일이다. 그러나 유명세에는 늘 구설이 붙는 법. 현대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 뒤에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만큼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다닌다. 예를 들면 그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싼값에 사들여 가격을 올린 뒤 처분하는 장사꾼에 불과하다든지, 사치가 미적 안목을 결여한 컬렉터이며 〈센세이션〉은 운 좋게 얻어걸린 케이스일 뿐이라는 류의 비판들이다. 그리고 찰스 사치는 〈나, 찰스 사치, 아트홀릭〉을 통해 그를 에워싼 ‘썰’들에 공식적인 회신을 보낸다.

“내 이름은 찰스 사치이고, 나는 아트 홀릭(예술 중독자)입니다.”

자신만만하기 그지없는 자기소개에서 제목을 따온 〈나, 찰스 사치, 아트홀릭〉은 찰스 사치에 대한 질의 응답을 Q&A 형식으로 엮은 인터뷰집이다. 질문자는 일반인, 저널리스트, 협회 전문가 등 각계각층에 분포되어 있고, 이들의 궁금증은 예술과 광고는 물론이거니와 육아, 이혼, 섹스 등 자질구레한 사생활과 마약, 사형, 동성애에 이르는 사회적 이슈를 아우른다. 각기 다른 톤과 깊이로 쏟아지는 심문 공세 앞에서 사치는 핑퐁 선수처럼 가볍게 답변을 쳐올린다. 무가치한 질문은 가차 없이 지르밟고, 애송이 같은 질문에는 뜻밖에 젠틀한 면모를 보인다. 칠십 줄 노년에 접어든 이 괴짜 컬렉터는 아이 같은 변덕으로 예술 시장을 쥐락펴락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만 삽니다. 그것들을 전시해서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서 구매하지요. 그러고 나서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그것들을 팔고 좀 더 많은 작품을 구매합니다. …(중략)… 작품을 판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내 마음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모든 것을 영원히 소장하고 싶지 않을 뿐이죠.”

본인의 삶을 ‘축복 받았다(Blessed)’고 하는 찰스 사치의 말은 점잖지 않게 들릴지언정 허풍은 아니다. 〈나, 찰스 사치, 아트홀릭〉의 행간에서 드러나는 찰스 사치는 유대인 거부(巨富)라기보다 지고지순한 유미주의자다.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듯 보이는 억대의 자산이 실제로 따르는 원리는 개인적인 ‘취향’이다. 사치에게 예술 작품 구매는 백화점에서 하는 명품 쇼핑과 다를 바 없다. 연례행사로 한꺼번에 수트를 사고, 1995년형 링컨을 주차장에 묵히고, 조작법을 몰라 구형 휴대폰을 사용하는 그에게 예술 작품 쇼핑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을 준다.

“만약 당신이 구매한 작품의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간다면 참으로 좋겠지요. 하지만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 작품을 가치 있게 여기는 당신의 느낌 또한 동등하게 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혼자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남과 다른 것 아닐까요.”

사치가 늘 잭팟만 터뜨려온 ‘미다스의 손’은 아니다. 그 자신도 주저 없이 본인의 취향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바스키아 생전 단돈 500달러에 팔리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했고, 갤러리 전시가 겨우 몇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는 ‘쪽박’을 칠 때도 있었다며 사치는 제법 호방하게 실패담을 공개한다. 미술 이론을 깊게 연구하지도 않았고, 예술계와도 거리를 두고 있는 사치는 그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작품을 수집할 뿐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소장 작품을 팔고 새로운 진주를 찾아 나선다. 이 지극히도 내밀한 즐거움이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막대한 부와 함께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명예를 운반했으니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행운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프로들의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절대 투자할 엄두도 내서는 안 되는 분야가 바로 미술입니다.”

지난 십년간 오직 다섯 화가만이 터너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아트페어를 ‘정육점’에 비유하며 작가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사치는 기본적으로 미술에 깊은 애정을 가진 컬렉터다. 아트 딜러, 비평가, 큐레이터 등 미술 관계자에 대한 생각들과 사치가 좋아하는 영화, 헐리우드 여배우, 손에 꼽는 전시와 작품 리스트 또한 〈나, 찰스 사치, 아트홀릭〉의 재미 요소 중 하나. 시니컬한 유머 감각과 괴팍한 오만함으로 뒤엉킨 답변 속에서 우리는 찰스 사치가 사는 ‘별세계’를 엿보게 된다. 귀찮은 듯이 내뱉는 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지혜는 왜 그가 거물 아트 컬렉터인지 납득하게끔 한다.

〈나, 찰스 사치, 아트홀릭〉은 본래 2009년 출간된 〈My Name Is Charles Saatchi and I Am An Artholic〉을 번역한 책이기에 최신의 정보를 담고 있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곧잘 알려졌듯 찰스 사치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은둔형 셀러브리티다. 최근에야 〈Babble〉(2013), 〈The Naked Eye〉(2013), 〈Known Unknowns〉(2015) 등의 저서를 집필하긴 했지만, 여전히 찰스 사치의 공식적인 인터뷰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심지어 BBC의 아티스트 오디션 〈스쿨 오브 사치(School of Saatchi)〉(2009)에서조차 베일 뒤에서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찰스 사치의 인터뷰집 〈나, 찰스 사치, 아트홀릭〉은 여전히 희소적인 가치를 지닌다. 찰스 사치라는 슈퍼 컬렉터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한 번쯤 펼쳐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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