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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

2010-09-02


속임수나 장난을 일삼는 신화적 존재인 ‘트릭스터’의 속성을 가진 예술가 백남준, 그리고 열 두 명의 현대 작가들을 조명한 전시가 열린다. 대담하면서도 극적인 이들의 ‘트릭’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에디터 │ 이지영 (jylee@jungle.co.kr)
자료제공 │ 백남준아트센터

트릭스터란 전 세계에 걸친 보편적 성격의 신화적 존재로서, 대표적으로 프로메테우스와 헤르메스를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북미 신화의 코요테나 손오공도 널리 알려진 트릭스터다. 트릭스터의 특징은 ‘트릭’을 쓴다는 점이다. 트릭은 가벼운 장난 내지는 주어진 장의 규칙을 위반하는 속임수다. 트릭스터는 배고픔에 시달리는 떠돌이 방랑자지만 이런 트릭을 통해 인간의 고충을 덜어준다. 또한 각각 다른 세계의 소통과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헤르메스가 태어나자마자 아폴로를 속여 소를 훔치기도 했지만 각종 도량형을 만든 상업의 신이자 신들의 메신저이기도 한 것처럼. 트릭스터의 또 다른 속성은 존재 자체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트릭스터는 선과 악, 남성이자 여성, 규칙의 위반자이자 법제정자, 신이자 인간인 것이다. <트릭스터가 세계를 만든다 trickster makes this world> 는 현대에서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트릭스터’ 신화로서의 백남준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한 백남준아트센터의 1층에 백남준, 2층에 조지 마키우나스와 레이 존슨을 포함한 열두 명의 현대 작가들이 트릭스터로서 그들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전시는 백남준을 가장 유쾌한 헤르메스이자 트릭스터로 본다. 초기부터 그는 음악과 미술과 테크놀로지를 넘나들었으며, 초기 퍼포먼스를 비롯한 그의 작품 전반에는 선문답과도 같은 트릭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특히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물리적 음악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예술적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를 가능케 한 그의 트릭을 공개해버렸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떤 자신의 개성이나 이데아의 표현이 아님을 선언하여 근대적 트릭스터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백남준의 트릭스터적 퍼포먼스는(1998) 백악관에서 빌과 힐러리 클린턴에게 소개받을 당시 ‘사고’로 바지가 내려가는 사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는 전 세계에 보도되었으며, 백남준의 친구들은 그의 마지막 퍼포먼스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그의 마지막 퍼포먼스처럼 극적이다. ‘징키스칸의 복권’, ‘TV 부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 백남준의 대표작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들과 함께 전시된다. 쾰른에서 있었던 ‘프로젝트 74’전에서 부처를 대신하여 법의를 두르고 텔레비전을 향해 면벽수행에 들어간 백남준의 모습도 선보인다. 이밖에도 1976년 일본에서 백남준이 작품 설치를 지시하는 생생한 비디오와 ‘참여 TV’와 같은 관객 참여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전시에 참여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트릭과 전략 또한 대담하다. 전시는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에서부터 문화 이벤트의 거장들의 이름을 내세우는 식의 폭넓은 매개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권력관계에 나타나는 양상들을 확대시킨다. 심지어 정부에게 지원을 받는 예술 기관의 강제적 책략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한다. 전시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동시대적인 세계와 미디어와의 관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몇 가지 트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플럭서스의 창시자였던 조지 마키우나스(미국)는 1974년 12명의 거장들을 초청한 ‘12인의 거장들’ 전시를 만들었지만, 막상 갤러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유명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이름 뿐이었던 전시를 보여준다. 히만 청(싱가포르)은 존재하지도 않는 갤러리를 만들고 마치 자신이 그 갤러리의 소속 작가인 것처럼 연기하며 전시 초대장 및 전시와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는데 그 전시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작업은 유명세에 대한 숭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건축가이자 작가인 로니 헤어만과 카틀린 베르미어(벨기에)는 같은 맥락에서 미술관 공간을 호화판 아파트로 탈바꿈시키며 예술 세계와 부동산 시장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이들의 작업은 뉴욕 소호를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부동산 개발을 추진했던 마키우나스의 맥락과도 겹쳐진다. 크리스티안 얀코브스키(독일)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상징이기도 한 백남준의 뉴욕 브룸 스트릿 스튜디오 ‘메모라빌리아’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용감한 퍼포먼스를 벌일 예정이다. 주재환(한국)의 작품세계 역시 전적으로 트릭스터적이다. 그가 다루는 갖가지 소재와 내용의 작업들은 구체적인 일상에서부터 사회 문화적 사건들에 위트있는 멘트를 날린다. 그는 이를 개념적 드로잉, 만화, 콜라주, 텍스트, 오브제, 유화 등 다양한 스타일과 각종 잡지, 광고, 장난감, 테이프 등 가장 값싼 재료로 표현한다. 김범(한국)의 ‘볼거리’는 동물의 세계를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재편집하여 영양이 치타를 추격하는, 기존관념의 역전을 통해 우리가 ‘보아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지아니 모티(이탈리아)는 ‘충격과 경외감’이라는 비디오 작업에서 부시 전 미국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선포하기 불과 몇 분 전에 실수로 생방송이 나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백남준의 ‘닉슨 TV’처럼 미디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 trickster makes this world> 는 루이스 하이드가 쓴 동명의 책처럼, 트릭스터를 신화적 유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트릭스터를 끄집어내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투사하려는 시도다. 이는 예술작품과 미술관에 가둘 수 없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한 것으로, 사회와 인간을 동시에 교란시키고 매개하며 방랑의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목숨을 건 모험의 결과로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얻고 코요테의 낚싯대를 얻고 백악관에서 자신을 훌러덩 드러낸 백남준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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