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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art&love&sex 아트&러브&섹스 ①

2011-09-08


사랑은 예술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애초에 예술가에게 있어 사랑은 캔버스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었고, 시대를 풍미한 화가들의 사랑은 격랑이 이는 바다처럼 특별한 모습으로 그들의 삶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들에게 찾아왔던 사랑은 때론 깊은 상처를 남겼고, 상처가 덧나고 터져나간 자리에서 예술의 꽃은 몽우리를 틔웠다. 화해하지 못한 애증의 감정이 화폭에서 길을 잃는가 하면 사랑의 포로가 된 화면은 뜨거운 열정을 입고 태어나기도 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성애性愛를 부른다. 사랑의 성역을 침범한 섹스는 화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며 내재되어있던 특유의 에로티시즘을 불러 일으켜 왔다. 고독, 외로움, 쾌락, 슬픔, 분노, 열정, 기쁨의 감정을 예술로 환원시키는 촉매와도 같은 사랑, 그리고 섹스가 머물고 있는 화폭과 예술가들을 만나보자.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예술적 영감의 일부가 아닌, 주인이었다.

글 │ 아트앤컬렉터 김지희 에디터


1966년 11월 9일, 런던 인디카 갤러리의 「미완의 회화와 조각전」에서는 세기를 뒤흔든 사랑이 움트고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전시 프리뷰를 관람하러 왔던 존은 천정 틈을 통해 ‘yes’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 작품에 깊은 영감을 받았고, 작품을 제작한 ‘오노 요코’라는 예술가와 운명적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관객이 직접 벽에 못을 박으면서 완성에 이르는 회화를 보고 존이 입을 열었다.

“못을 박아도 되나요?”
“내일 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못을 박을 수는 없어요. 못을 박고 싶다면, 5실링을 내세요.”
“그럼,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5실링을 내겠으니 당신은 내가 상상의 못을 박도록 허락해주세요.”

벽에 못을 박는 시늉을 하는 존을 본 순간, 오노요코는 자신과 같은 색을 지닌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존 역시 그 순간이 서로가 정말로 만난 순간임을 회고했다.

‘1940년 10월 9일 출생. 1966년 오노 요코를 만남’, 존이 후에 쓴 자신의 짧은 이력에서도 볼 수 있듯 요코와의 만남은 존의 일생일대의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각자의 가정이 있었던 데다 7살이 연상이었던 요코와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둘은 서로의 사랑이 맞물려 일체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요코는 존을 만나기 전까지 거의 무명에 가까운 아방가르드 아티스트였지만, 늘 비틀즈의 음악과 자신의 작품이 동등하게 훌륭하다는 당당함을 보일만큼 누구보다 자의식과 자기애가 강한여성이었다. 자신의 음악을 아부하는 여성들에게 진저리를 느꼈던 존이 뚜렷한 세계를 가진 요코에게 반했던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듯 정신적 친구로서 몇 년간의 시간을 허락한 후, 둘은 각자의 가정을 정리하고 결혼과 동시에 서로의 삶의 깊은 공간까지 점유하게 되었다.

당시 요코는 영화감독이었던 두 번째 남편과 딸을 떠나야 했고, 존 역시 지지부진한 법정 투쟁을 뒤로 아내와 아들 줄리안에게 이별을 말해야 했다. 비틀즈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Hey, Jude’는 당시 이혼으로 상처받은 존의 아들 줄리안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후일담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둘의 사랑은 오직 관심사가 ‘사랑하는 서로’ 뿐인 것처럼 독특하고 이기적이며 정열적이고 나르시즘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사랑에 빠진 존에게 요코를 제외한 다른 문제들이 의미를 가질리 없었다. 심지어 대중의 신화와도 같던 비틀즈까지도 그의 관심사에서 멀어졌으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요코의 뒤에는 비틀즈를 해체시킨 마녀의 꼬리표가 달라붙게 되었고, 인종 차별적 비난을 비롯해 수많은 팬의 경멸이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는 존의 마음도 늘 편치 않았다.

요코와 레논, 이들은 ‘사랑’이라는 것이 한 인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증명해보이기나 하듯 서로의 삶을 뿌리 채 흔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1970년, 비틀즈를 사랑하는 팬들의 슬픔을 뒤로 존은 그의 전부와 같았던 비틀즈를 공식 탈퇴하고 아내 요코와 함께 ‘Plastic Ono Band’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비틀즈는 대중음악의 신화였던 만큼 하나의 기업과도 같은 강한 상업적 색을 띈 상황이었고, 존은 다이아처럼 화려했던 비틀즈의 의상을 과감히 벗고 질기고 캐주얼한 반자본주의 싱어의 옷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존의 선택을 요코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존 개인의 음악적 자유에서 보았을 때, 요코가 존에게 새로운 예술과 사회의식을 택할 수 있는 하나의 용기를 준 것으로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 그렇게 존은 울타리 쳐져 있던 음악의 활주로에서 강하고 위험한 비행을 감행했다.

한동안 자웅동체가 된 듯 하나의 의미로 살아갔던 둘이었지만, 둘의 특별한 애정전선에도 서리가 치는 겨울이 있었다.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했던 요코는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존의 부인’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존은 요코의 영향으로 시작된 반전운동에 회의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973년, 둘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을 갖기로 결정했는데, 이 시기가 ‘잃어버린 주말(Lost weekend)’이다. 특이한 것은 떨어져있는 시간 동안 존이 이들의 비서였던 메이 팡과 동거를 한 일이 요코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둘의 행보는 조금은 지루한 사랑의 역사에 매우 비상식적이고 별퉁스러운 모습으로 독특한 의미를 써갔다. 이후 존은 요코를 떠나 방황했던 시간을 접고 ‘요코’라는 피안처를 찾아 돌아가게 되었는데, 마흔 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요코는 존에게 무엇과도 견주지 못할 만큼 커다란 선물을 전하게 된다.

둘의 아들 숀의 탄생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을 얻은 존과 여성운동가 요코는 이 시기에 부부의 역할을 바꾸며 페미니스트의 이상향에 정착했다. 요코는 사업수환을 발휘해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했고, 존은 5년간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가정을 돌보는 주부의 역할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생활하던 둘은 1980년, 다시 공동으로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윽고 앨범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완전한 이별의 운명이 이들 앞에 정차했다. 요코와 집으로 돌아오던 존의 심장에는 광팬 마크 데이비드 채프만의 총구가 겨누어진 사건이었다. 요코의 분신을 의미했던 존은 요코가 보는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었고, 요코의 심장 또한 존을 겨누던 총격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듯 고통에 툭툭 피를 흘리며 몸서리쳤다.


“존은 나를 감싸는 커다란 우산이었어요. 나는 아직도 그를 향한 감정이 살아있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이제 그를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혼자서 꾸는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해요. 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이들의 사랑은 나르시즘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요코와 존은 누구보다 강한 개성과 스펙트럼을 가졌음에도 서로의 사상과 의식까지 닮아갔을 만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고자 했다. 또한 이를 실천했음은 물론, 예술적 온도가 맞는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 사랑이 타오르기 시작한 발화점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삶으로 인도했다. 사랑이 삶의 일부가 된 것이 아닌 전부로 살았고, 적어도 껍데기가 아니었다.


아직 채 성숙하지 못한 어린 소녀가 붉은 음부와 젖가슴을 드러내고 가늘게 눈을 뜬다. 유려하게 흐르다가도 강한 에너지를 품는 드로잉 선은 소녀의 몸을 타고 흐르며 에곤쉴레 특유의 마른 여체를 이루어낸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향해 화면 밖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소녀에게서는 천진함과 함께 노골적인 음란함이 묘하게 대치하며 독특한 성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20세기 초, 시대의 잣대가 순순히 받아주지 않던 직설적이고 관음증적인 발칙한 화면으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던 화가 에곤쉴레, 2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처럼 천재로서의 재주를 자랑했던 화가는 스물여덟의 지나치게 짧은 생을 끝으로 드로잉북을 떨구었다.


에곤 쉴레는 탁월한 미적 감각을 타고났으나 여러 번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고, 미술 학교를 진학한 이후 아카데믹한 미술 교육 환경이 맞지 않았던 까닭으로 일찍 학교를 뛰쳐나오게 되었다. 그 당시 수려한 용모에 나르시즘적인 기질을 갖고 있던 에곤은 스스로 유명해지길 원하던 화가 중 하나였고 당시 비엔나 분리파의 수장이었던 클림트의 눈에 띄고자 했다. 이후 에곤의 그림을 본 클림트는 그의 탁월한 재능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에곤에게 영향을 주었던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이 매혹적이고 관능적이었다면 에곤 쉴레의 에로티시즘은 직설적이며 파격적이었다. 적나라한 노출과 도발적 성애(性愛)가 담긴 화면, 그리고 영감의 원천에는 그와 함께 살았던 모델 발리 노이칠이 있었다. 발리는 요염하고 도발적인 모습으로 예술에 있어 에곤의 욕구를 해소시켜 주었으며 그를 위해 헌신했던 연인이었다. 그러나 발리는 에곤쉴레의 일생의 여인 자리는 차지할 수 없었다. 발리는 에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지만 유복함을 안겨줄 수는 없었기에, 에곤은 이웃집에 살던 유복한 철도공무원 집안의 딸 하름스 에디트에게 마음이 담긴 연서를 전하며 하름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발리는 에곤을 떠났다. 에곤의 화면에 나타나는 고독과 슬픔, 방황, 우울, 위선, 욕망과 모순, 이중성은 방황하고 욕망에 찬 스스로의 사랑을 바라보는 자화상처럼 그림 속에서 붉게 혀를 내밀며 조금은 고통스럽게 몸을 움트는 듯 했다. 이후 에디트는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6개월 된 아이를 품은 채 1차 대전 말기 비엔나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을 떠나게 되었고, 사흘 뒤 에곤 쉴레도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를 따라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접게 되었다. 고독하고 허무했던, 붉은 생의 욕망을 뒤로.


“역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로 기억되는 가난한 유대인, 술과 마약을 좋아하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는 1917년 14살이 어린 미술학도 잔느 에뷔트린을 만나며 전설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가난한 화가와 의 결혼을 말리는 잔느의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닮은 딸을 낳으며 사랑을 키워갔다. 큐비즘과 포비즘의 물결이 휩쓸던 당시, 모딜리아니가 그린 독특한 화풍의 초상은 잔느와 함께 한 3년 동안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잔느는 모디의 배우자의 의미를 넘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모디는 생활을 유지할 마땅한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고, 술과 마약을 끊지 못하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 36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생명을 다한 모디 곁을 지키던 잔느는 다음날 8개월이 된 모디의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차가운 바닥에 몸을 내던지며 영원한 모디의 반려자의 길을 택했다. 1920년, 함께 생을 마감한 이들의 전설적인 사랑은 모디의 그림을 재조명하며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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