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문화적 기억 -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展>
미술 마감

2006-11-10 ~ 2007-02-25


<문화적 기억 -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展>

2006년 11월 10일 ~ 2007년 2월 25일 (월요일 휴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일민미술관 1.2.3 전시실
www.ilmin.org

- 제목: 진중권의 ‘내가 관람한 야나기展’
- ‘조선의 美’ 빚은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 “쓸수록 아름다움이 묻어 나온다.” 일민미술관 전시장에서 읽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몇 마디가 자꾸 떠오른다. 흔히 예술에는 목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야 형태가 실용성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예는 다르다. 그것은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 만든 물건. 여기서 실용성과 미의식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단청이 빛이 바랠수록 아름다운 것처럼, 민예의 아름다움은 때를 묻혀 가며 사용하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조선에서 민예는 살아 있다.” 무슨 뜻일까? 조선통신사 신유한은 일본에서는 미닫이의 규격이 통일돼 있어 하나가 못쓰게 되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이미 18세기 초에 일본의 공예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대량 생산을 해도 규격의 통일이 없는 민예는 서로 각기 다른 ‘유일물’이기에 거기에는 아직 원본의 아우라가 있다. 20세기 초에 한 일본인은 조선의 민예에서 향수를 느꼈다. “비애의 미.” 이것이 조선을 바라보는 야나기의 한계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본격적인 미학의 술어라기보다 찬란했던 문명의 쇠락을 바라보는 심경의 감정이입에 가깝다. 야나기는 또 조선의 미의식을 기교가 없는 투박한 아름다움에서 찾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조선의 예술이 기교가 떨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의 식민사관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완전히 초점을 놓친 비판이다. 전시장에 놓인 야나기의 윌리엄 블레이크 연구서가 한 가지 단초가 될까? 낭만주의자들은 인공에 대한 자연의 우위를 주장했다. 칸트 역시 예술은 인공의 산물이나, 훌륭한 예술이라면 인공의 흔적을 감추고 마치 자연의 산물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우리 예술의 자연미에 대한 야나기의 찬양은 조선을 기술의 후진국으로 낙인찍으려는 식민사관이 아니라, 인공에 대한 자연의 우위를 강조한 낭만주의에서 비롯된다. 알로이스 리글의 말대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can)이 아니라 의지(will)다. 일본의 정원에서 완벽한 인공을 본 사람이라면, 한국의 예술이 그와 전혀 다른 예술의지를 가졌음을 깨달을 것이다. 기교를 안 부린다 하여 기술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종종 기교를 감추는 데에는 더 큰 기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불국사의 기단을 만든 장인은 인공석의 아래를 그 아래 자연석의 울퉁불퉁한 모양에 맞춰 정교하게 깎아 냈다. “조선의 도공들은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을까?” 야나기의 말대로 “이 물음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야나기는 자신이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음”이라고 표현한 그것, 즉 조선 도공의 예술의지를 읽어 그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야나기에 대한 몇몇 비판에서 나는 지도의 모양을 토끼에서 호랑이로 바꿔 놔야 성이 풀리는 남성주의, 그리고 발전사관을 그대로 예술의 영역에 옮겨 놓는 근대주의의 편견을 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전시장 안에서만은 야나기가 읽은 크로포트킨처럼 무정부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 야나기의 눈에 조선의 아름다움이 보인 것처럼, 함께 전시된 일본 민예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글_ 진중권·미학자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