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복 사진전 - 삶의 哀歡
사진
마감
2007-04-25 ~ 2007-05-01
마르시아스의 껍질과 고통의 환희
마르시아스 Marsyas 는 고대 소아시아 프리지아에 살았던 인간으로 우리에게 플루트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감히 신(神)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플루트은 원래 아테나가 발명하였는데 연주할 때 볼이 부풀려지는 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버린 것이었다. 그것을 주운 마르시아스는 열심히 연습한 끝에 능숙해지자 음악의 신인 아폴론에게 연주 실력을 겨루자고 제안한다. 결국 그는 아폴론과의 경연에서 패배하여 승자의 처분에 따라 나무에 묶인 채 산 껍질이 벗겨져 죽는다. 그런데 껍질이 벗겨질 때 흐르는 피는 아테네의 강을 오랫동안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그것은 곧 불완전한 인간이 감히 아폴론의 절대 완벽한 미(美)에 도전한 일종의 신성모독과 같은 것이었다. 그 후 그의 처절한 죽음은 추(醜)로 상징되어 인간의 모습이 되었고 그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은 신생아를 낳는 산모의 고통이나 끝없이 희생을 감내하는 모성애과 같이 인간 원죄로서의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또한 인간의 고통과 억압뿐만 아니라 완벽을 위한 인간의 무모한 도전과 한계를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껍질은 해석학적으로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시지프의 신화처럼 오히려 삶의 위대한 고통과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작가 채상복 사진들이 보여주는 자작나무와 껍질은 바로 이와 같은 위대한 인간의 고통을 암시하는 지시적인 것 photo-index 이다. 언뜻 보기에 사진들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흔히 ‘좋은’ 장면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게다가 식물학적인 견지에서 자작나무라는 특별한 종(種)에 대한 생명의 위대함이나 그것으로부터 드러나는 신비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은 다른 곳에 있다. 작가가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가 외시하는 정보의 영역을 넘어 그리고 대상이 상징하는 보편적인 의미를 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미궁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실타래와 같은 역설 paradoxe 이다. 말하자면 아픔만큼 성숙해 지듯이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감추어진 알맹이는 더욱 더 굳어지고 강해지는 삶의 고통 그 자체 즉 위대한 인간 마르시아스의 껍질이다.
그래서 작가는 수 몇 년간 강원도 오대산과 설악산, 백두산 등 자작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은 우리 눈에 익숙한 하얀 자작나무의 빼어난 형상과 그 신비의 모습, 눈 내린 계곡에 솜털처럼 촘촘히 보이는 장관, 대평원의 설경에 솟아난 웅장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설명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자작나무는 장면 어딜 봐도 푼크툼도 그 어떤 특이함도 없이 오히려 초라하고 빈약하게 나타나고, 게다가 흑백의 미묘한 콘트라스트와 가끔씩 나타나는 하얀 배경은 주제를 거의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거기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환기되는 형이상학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그것은 또한 비유적인 측면에서도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어떤 알맹이를 지시한다. 니체는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그 껍질이 한 켜 한 켜 벗겨져 나갈 때 이론가는 벗겨낸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작가는 껍질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라고 말했다. 이때 작가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단순히 드러나는 껍질 즉 보이는 자작나무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그 껍질을 넘어 존재하는 어떤 것 말하자면 자작나무로 위장된 작가 자신의 심정적인 경우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에서 무심코 하는 실수나 미친 이의 이상한 짓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무의식의 욕구와 지향성으로부터 전이(轉移)된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으로 드러나는 시각적인 것 여기서 자작나무 이미지는 실행자의 무의식과 결코 분리하여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정확히 심리학적 의미로 작가 자신의 억압된 어떤 욕구나 충력을 위장시키는 이전(移轉)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듯이, 내면에서 생성되는 순수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응수는 전혀 논리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두께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일종의 헛소리가 된다. 거기에는 유일하게 대상과 기억 사이에서 발생되는 감성의 공명(共鳴)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단순히 장면의 순간 포착이 아니라 초 이하의 극히 짧은 촬영 순간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적어도 촬영자의 의도가 작용하는 사진적 행위 acte photographique 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작가의 사진에서 첫 눈에 우리의 시선을 잡는 것은 단번에 들어오는 큰 구도의 단편 이미지 말하자면 곤충이 허물을 벗거나 박제된 미라 붕대를 벗기듯 껍질이 벗겨지는 생생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의 투시 공간을 납작하게 만드는 이러한 근접 촬영은 오로지 우리에게 자작나무라는 존재 사실만 알릴뿐, 더 이상 주제의 구체적인 정보를 확장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화면을 꽉 채우는 단편적인 큰 구도는 모든 의미의 확실성을 중단시키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의미의 부재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단편 덕분으로 관객은 곧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다시 “아무 상황”으로 재구성하는데, 자신의 경험적 상황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체험적인 상황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자극시키는 것, 그것은 장면을 꽉 채우는 확실한 정보들과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여기 껍질이 벗겨지는 장면처럼 오히려 우리의 상상을 자극시키는 불확실한 단편이다.
결국 작가가 공들여 만든 자작나무와 껍질은 더 이상 시각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에게 세상 존재에 대한 보다 심오하고 감동적인 명상을 품게 한 기억의 “전이-오브제들 trans-objets”이다. 그것은 또한 적어도 작가 자신의 체험이 투영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침전물 다시 말해 삶의 끝없는 굴곡을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침전된 사랑, 욕구, 아쉬움, 충동 등과 같은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삶의 앙금들이다. 그때 벗겨지는 자작나무 껍질은 갑자기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태워드린 한 맺힌 비단 저고리와 아버님 승천 길에 입혀 드린 마지막 수의를 생각하게 하며 그리고 끝없는 고독의 연속에서 어느 날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얼핏 보게 해 준 특별한 것이 된다. 제 몸을 태우며 하얀 껍질을 드러내는 애환(哀歡)의 자작나무,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 잃어버린 기억의 은유임과 동시에 위대한 마르시아스의 껍질과 고통의 환희일 것이다.
이경률 (사진 이론가)
전시기간: 2007. 4. 25(수) ~ 5.1(화)
전시장소: 토포하우스 02 734 7555
초대일시: 2007 4. 25(수) (오후5시)
전시문의: 011-338-9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