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이지신-나무 [강용면 조각展]
http://neolook.net/mm00/000613.htm
■전시기간
-2007년 8월 8일(수) ~ 2007년 8월 31(금)
■전시장소
-더 갤러리
서울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67-13 W&H빌딩 B1
Tel. 02_3142_5558 /www.gallerythe.com
■관람시간
11:00 ~ 19:00 (월요일 휴관)
진화하는 異種! The Evolving Hybrid
● 당연하지 않은 것 한 때 강용면 작업을 이야기하며 전통과 巫 등의 단어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의 작품 활동 대부분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강용면 작업에서는 부담스럽거나 지나치지 않은 우리 것의 변용을 발견할 수 있었고, 작가 스스로 그런 작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밝혀 왔던 것이 사실이다. 2007년, 군산시 옥구읍의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간 평단과 관객이 부여한 강용면식 작업에서 탈피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우리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하지만 과거 꾸준히 발표하던 작품들에 비해 지극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 관심을 재현하고 있는 것.
끌과 망치, 정을 이용하여, 나무와 돌 그리고 상여에 올릴 종이꽃과 오방색을 깎고 채색하던 그가, 직접 만든 전기 가마와 자동차용 도장(塗裝) 기계를 이용하여 투명 아크릴을 구부리고 색을 입혀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작업 방식과 오브제의 변화는 그의 포트폴리오에서 매우 특이한 지점을 차지하게 될 것 같다. 이젠 60평 작업실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크릴 작업들. 그를 위해 직접 제작한 전기 가마에서 실험과 실패를 반복하며 얻어낸 적합한 작업방식은, 과거 미송을 몇 년간 건조시켜 은근히 기다리며 깎고 채색하던 작업 방식과 쉽게 오버랩 된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조차 어딘가 오래된 기억의 단편쯤으로 여겨지는 지금, 그의 새로운 작업들에 단순히 ‘현대적인 기법’ 따위의 말을 이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가 보여 내는 변화는 그저 현대적이며 모던한 사고와 기법을 ‘따라가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그의 작업이 그러했듯 이러한 강용면의 변화 이유 역시 그 속내를 들여다보는 순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미술은 부정에서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다르게,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내 목표고 작업의 태도입니다.”_강용면 ● 이제껏 지키고 이어가는 작업을 보여주었던 그가 부정과 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바깥에서 조명을 받아야 하는 조각의 태생을 부정하며 투명한 아크릴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그 안에 조명(LED)을 설치하여 스스로 빛나게 하려는 그의 실험은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강용면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애당초 미송 조각에 색을 입히려던 그의 초기 시도들 역시 재료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조각의 기본적 특성을 부정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처음부터 그는 다른 것을 찾고자했고 다른 것을 보이고자 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실험과 연구, 부정과 비틀기의 강용면은 이제껏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의 작업이 우리 고유의 색채를 버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고졸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며, 그의 실험과 부정이야말로 소위 ‘트렌드’에서 밀려나거나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이다
결국 당연한 것 ● 결국 그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리다. 정체된 민족적, 국가적 개념으로서의 우리가 아닌,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우리다. 매 순간 변화하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다. 그것은 작가 강용면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것. 그 역시 이 땅에 살면서 전통적 방식과 개념을 이어가야 한다는 당위와 함께 부정과 비틀기를 통해 발전하고 변화, 진화하고 있다. 그런 그의 사적 체험들과 다수 대중 체험의 공집합이며 교집합이 바로 지금, 2007년의 그의 작업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지속된 정체성의 색채를 가진 그의 작업은 이제 새로운 오브제와 실험적 작업 방식을 만나 더 커다란 담론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작품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던 젠더와 지역색을 벗어던진, 지금 어느 곳에나 볼 수 있는 ‘살고 있는 사람’과 닿을 수 있는 작업으로 재발견되는 것이다. 그의 최근 작품이 지닌 지나친 장식성에 우려를 표하는 평론가들의 말이 일견 타당할 수 있으나 그것이 기우에 그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는 것 역시 매 순간 진화하고 있는 그의 생각과 작품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의 작업은 독특한 형태의 이종교배다. 실험과 변화, 전통(傳統)과 보존(保存). 이 어울리지 않는 개념들을 이렇게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흔치 않다. 오랜 체험과 추억이 지금의 삶과 개념을 만나 새로운 種을 만들어낸다. 이 種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보고 있는 種의 형태가 2007년의 한국인들이 그러하듯 완전히 발전을 끝낸 후의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강용면의 작업(正)조차 언젠가 새로운 생각과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을 통해(反) 예측할 수 없는 형태의 작업으로 변화할 것(合)이라는 믿음은 강용면의 다음 시기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 함성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