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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현 개인전 <모호한 복종>
미술
무료
마감
2008-12-05 ~ 2008-12-28
전시제목_모호한 복종
전시작가_정상현
오프닝_2008. 12. 5. 금요일 오후6시
기간_2008. 12. 5. 금요일 - 12. 28. 일요일
시간_화-일 오전 11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_갤러리팩토리 gallery factory
후원_서울문화재단
주최, 문의
갤러리팩토리 gallery factory
02 733 4883
galleryfactory@gmail.com
www.factory483.org
전시 개요 - b없는 신뢰에서 그 태도를 찾을 수 있다
이번 전시 < 모호한 복종> 은 작업의 모호함에 대한 끝없는 신뢰에서 그 태도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모호하다는 것은 알 수 없음 또는 모르는 것에 대한 긍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작가가 어떤 경로로 작업에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한 형식적 단서를 제공한다.‘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상태에서 작업의 상상은 시작되며 작가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정상현의 작업은 작은 공간에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을 추적한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 있는 통로를 두고 바라보는 세상은 안전하다 못해 고요하다. 하지만 그 정적의 끝에 선 작가는 순간순간이 불안하다. 각기 다른 장소에 세트를 설치하고 이미지를 채집하는 행위는 그 공간 외부의 소리를 함께 끌어들여 장소의 위치를 이야기하고 돌아가는 입체물 위에 입혀진 계절의 이미지들은 시간의 흐름을 공간 안으로 끌어 들인다. 이 작업들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 위를 걷고 있는 작가의 유연한 상상력의 줄기를 따라가고 있다. 현실과 환상이 마주하는 어느 모퉁이에 있는 작업에서 우리는 모종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술평론 - 히키코모리, 밀실의 생리학(병리학?)
- 고충환(kho,chung-hwan)
나에겐 자신만을 위한 밀실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잠시 기거했던 자궁 속처럼 적당한 물기와 정적과 어둠을 머금은 그곳에서 나는 세상과 격리되어져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이따금씩 소외감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만족스럽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무엇보다 자신을 세상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나는 완전하게(그런데, 완전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기꺼이 자신 속에 빠져든다. 밀실에는 작은 들창이 나 있는데, 이것이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이다. 하지만 그 들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상의 정보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엽적인 것이어서(더욱이 밀실에 홀로 오래 있다보면 내가 보는 것이 과연 세상풍경이 맞는지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그 대부분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우곤 한다. 나아가 나는 아예 자신만의 세상을 짓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나는 그 밀실을 나만의 작업실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의 밀실에서의 작업이란, 들창을 통해 얻은 세상의 정보를 숙주 삼아, 이에다가 순수한(그런데, 순수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상상력과 꿈과 욕망을 버무리는 일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밀실은 나를 위해 기꺼이 극장이 되고 무대가 된다. 때론 갤러리로 탈바꿈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페티시(공간 자체가 성기)로 변신할 때도 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간 우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이 나만의 놀이공간에서 나는 가끔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는 거다. 이는 들창 밖의 조각난 풍경들보다는 오히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때문인데(많은 경우에 있어서 소리는 알 수 없는 풍경보다 더 폭력적인데, 그것은 소리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며, 이로 인해 불안감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밀실이 무슨 외계인(외계인이란 무슨 별에서 온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엄밀하게는 나와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 해서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의 침입을 받아 폭삭 내려앉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다. 그럴 때면 자궁처럼 안온하고 친근했던 밀실이 불현듯 낯설고 생경해진다. 흡사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력으로 생장하고 진화하는 유기(체)적 감옥으로 변신한다. 그렇게 스스로 즐기기조차 했던 소외감에 상상력에 덧대어져 불안감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부풀려지고 팽팽해지는 것이다.
정상현의 작업은 밀실 애호증과 공포증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이 두 징후는 밀실 자체의 속성 속에 이미 내재돼 있던 것이다. 밀실은 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은신처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가두고 격리시키는 감옥이다. 밀실이 은신처일 때 그것은 안온하고 자족적인 공간이 되고, 밀실이 감옥일 때 그것은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인 공간이 된다. 그런데 은신처로서의 밀실과 감옥으로서의 밀실이 서로 별개의 공간이 아닌 하나의 공간이란 거다. 은신처 속에 감옥이, 감옥 속에 은신처가 서로 잠재적인 형태로 내포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밀실의 이런 이중적 공간이 다중적 공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분절되고 부풀려지면서, 서로 긴밀하게 직조된 망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공간 스스로 생장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어디가 은신처고 어디가 감옥인지에 대한 구분과 경계에 대한 논의가 무색해져버린다.
사람들은 밀실을 꿈꾸면서 동시에 기피한다. 이는 일종의 거리감이나 밀도와 관련된 것으로서, 사람들 속에 있으면 불편해지고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진다. 이런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분열적 징후로부터 삶의 아이러니, 이율배반, 부조리의식이 싹튼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술가들은 이렇듯 밀실로 비유되는 (심리적) 공간구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심지어 모든 예술가들은 어느 정도 이러한 밀실의식을 내재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와 이율배반과 부조리 같은 존재론적 조건이나 자의식을 도구로 해서, 이 (삶이라는 이름의) 공간구조를 재현하고 해석한다. 정상현의 작업은 이러한 밀실의식과 공간구조를 주제화한 경우로서, 그 주제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 모두의 주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정상현의 작업은 자신만의 고유한 밀실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미니어처 무대세트 같은 그 구조물은 상황에 따라서 작업실, 빈 방이나 실내, 극장이나 무대로 다변화된다. 이 휴대용 무대세트 안쪽에는 작은 문이나 창문이 나 있으며, 때로 그 구멍은 영상을 투사하는 스크린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작가는 일종의 가상공간을 재현한 이 정교하게 만든 구조물을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다 설치한다. 그리고 구조물의 열려진 전면을 통해 보이는 광경을 비디오로 기록한다. 이로써 무대세트로 재현된 가상공간과 무대세트에 난 구멍을 통해 보이는 현실공간이 겹쳐보이게 한 것이다. 여기서 무대세트는 비록 가상공간으로써 재현된 것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 보이는 광경은 흡사 방안의 창문에서 바깥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은 현실감을 준다. 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영상이 불현듯 가상공간을 현실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상공간에다 현실감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론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의 경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러한 현실감은 비주얼과 함께 소리와 움직임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이를테면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그 진동에 의해서 세트 내부의 소품들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