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할 틈 없는 날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의 위협적인 눈들로부터 폭넓게 노출되어 있는지 깨닫곤 놀랐다. 사람들은 다만 망상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안전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컬러 TV 탄생 이후 우리 사회는 이미지 과잉생산 시대로 진입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컬러 TV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가 무차별적으로 실시간 전송되면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고 싶은 것은 물론이고,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우리의 망막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당연지사 무차별적 이미지 전송은 자극에 반응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또 다른 이미지로 그리고 또 다른 이미지로 대체될 뿐이다. 그러기에 이미지 내부에 당도해야 할 시선은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제공하는 또 다른 이미지의 외피로 미끄러질 뿐이다. 이렇듯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망막을 자극하는 다량의 이미지는 ' 실재' 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 더 자극적' 인 이미지를 통해 시선을 끄는 것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이미지의 외피는 그 내부를 초과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과도한 수사로 치장하고 망막을 자극하지만, 정작 이미지는 그 표면만을 담아낸 ' 텅 빈 기표' 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들은 전쟁, 테러, 사고, 재난, 죽음(신체 절단, 시체, 자살 등) 등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 역시, 그 외피를 향유하며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픽션처럼 처리한다.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권경환도 이에 자유롭지 못하다. 1) 이 지점은 두 가지로 판단할 수 있다. 첫째는 이러한 인식과정은 거대서사가 사라진 이후 세대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대상의 비틀기를 통한 비현실적 맥락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같은 이유에서 실제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현실을 왜곡하고 표피적으로만 다룬다는 관점이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권경환의 이미지 유희의 태도를 치기 어린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루는 대상의 무게를 체감하기 이전에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권경환은 이 두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은 작가에게 독이면서 약이다.
텅 빈 기표를 이용한 농담 그리고 그 너머
권경환은 대학원 재학 시절 작업에서 일상 사물에 관한 일반적 인식을 비틀어 낯선 상황을 야기했다. 네 개의 다리가 온전해야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의자 다리 중 하나를 길게 만든 < 발정 난 의자> (2005)나, 8개의 대빗자루를 엮어서 화분에 심은 (2005), 흑연의 매끈한 표면을 이용해 총을 제작했던 < 글쓰기를 위한 총> (2005)처럼 권경환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내재한 유사성을 포착하여 다른 형태로 치환하며 세상에 농담을 던졌다. 형태상 이러한 방법론은 평범한 사물 뒤의 진실을 찾고자 했던 안규철(< 죄 많은 솔> , < 먼 곳의 물> , < 안경> 등)과,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에서 대상의 기능을 변장(혹은 위장)해 보다는 것과 인지 한다는 것 사이의 괴리를 다루었던 김범(< 자동차 열쇠> , < 국경상의 출입국관리소 건물> , <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 < 잠자는 통닭> , < 백조> , < 일광욕하는 여인> 등)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안규철과 김범의 유머가 진실을 은폐하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발단한 것이라면, 권경환은 이러한 상황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그 상황을 즐긴다. 그곳에 괴로움은 없다. 단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 기발한 착상' 이다. 폭격 장면을 모자로 만든 (2003)에서도, 20세기 사회주의 이념의 상징물을 연상시키는 (2006)에서도, 스텐실 기법을 이용하여 벽면 곳곳에 프라모델 같은 군인을 배치했을 때도, 전차가 지나간 자리에 하트가 새겨지도록 궤도에 하트를 제작했을 때도 그의 무게중심은 ' 기발한 착상' 에 있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영웅이자, 일용할 양식이었던 미디어의 이미지 생산방식처럼 권경환 역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숨 가쁘게 옮겨가며 ' 기발한 착상' 을 찾아 농담을 던진다. 이 당시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전쟁, 폭격, 사회주의 등은 텅 빈 기표로 기발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처럼 보였다.
권경환이 ' 기발한 착상' 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세대 감수성을 구체화하며 그 너머를 지향하게 된 때는 (2006~2007) 작업부터 이다. 이 작업에서 그는 그간 자신의 망막을 자극했던 이미지를 수집하고, 그것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그 이미지가 가진 고유 의미와 거리 두기를 한다. 흑과 백이 만나고, 만화 캐릭터와 미사일이 만나고 그것들은 거대한 구름을 만들며 폭발하며, 이 상황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설명한다. 과잉 노출된 이미지가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텅 빈 기표로 만들고 좀 더 자극적(현실적)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우리의 망막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권경환은 검은 종이에 하얀 색연필로 세심하게 재현한다. 전쟁, 대륙탄도미사일, 폭격은 더 섬세해졌으며, 이전 작업과 다르게 비현실적 맥락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상징(하트)은 사라졌다. 이제 그는 대상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이미지 자체에서 비현실적 맥락을 찾는다.2) 매스컴과 컴퓨터 모니터로 접한 전쟁은 너무나 과도해 보이며, 오히려 무감각한 픽션으로 인식된다. 컬러TV와 인터넷의 이미지 과잉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성장한 권경환에게 이미지 외피를 지향하면서도 끊임없이 내피를 지향하는 것처럼 망상(妄想)하게 만드는 비현실적 상황이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기에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 자체를 유보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3)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즉 학습으로서 자신의 인식에 안착해버린 관념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대상을 경험한 그 자체를 화면에 옮겨 놓는다. 이것은 "망상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안전하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음모론으로 가득한 비현실적 세계를 직시하게 한다.
Another Boring Day
그 언젠가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죽음은 도처에 있다. 인류와 함께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지만, 죽음은 (중세 이후부터)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자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죽음 이미지는 우리 앞에 끊임없이 호출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죽음을 목도하면서 교훈을 얻고, 반성을 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했다는 것이며, 둘째, 두려움과 금기를 보고자 하는 관음증적 욕망이 죽음 이미지에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언제, 어디에서든 쉽게 전 세계의 재앙과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죽음 이미지는 무엇인가? 물론, 그 어느 시기보다 현재는 스펙터클 하면서 다양하고 많은 죽음 이미지를 접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죽음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이미지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을 느낄 뿐이다. 연민의 기저에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기에 현대사회는 단지 죽음을 스펙터클로 소비할 뿐이다. 이미지는 그것의 윤리적(혹은 정치적) 태도와는 상관없이 더욱 신경을 자극하고, 소란을 야기하며, 눈을 번쩍 뜨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이미지들 사이를 항해하면서 지루할 틈이 없다.4) 이렇듯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면서 타인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간접 경험을 통한 고통의 사유 자체를 방해하고, 비웃는다.
작업 이후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괴리를 인식한 권경환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주변에 가득한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구조를 해체한다. 즉, 지금까지 미디어가 생산하는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수용해 세계를 봤다면, 이제는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다. 전쟁, 테러, 자살, 사고 등 죽임 이미지를 수집한 권경환은 모형 자 형태를 지닌 (2009)를 통해 단순한 선의 형태로 죽음 이미지를 규격화한다. 다양한 사건과 사연을 가지고 죽음에 이르지만, 정작 우리에게 다가온 죽음 이미지는 그 내부와 상관없이 작가가 규격화한 몇 가지 범주 안에서 변형할 뿐이다. 권경환은 이렇게 규격화된 이미지 형태를 반복하거나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은 미디어가 우리에게 스펙타클한 죽음의 이미지를 제시했던 방식과 같은 방법이다. 시체는 반복과 조합을 통해 춤추는 사람들로 혹은 줄 맞춰 서 있는 사람들로 혹은 달리는 사람들로 탈바꿈하기도 하며, 사람의 의미를 떠나 꽃의 형태로 변형된다. 이것은 이미지 과잉 시대에 미디어가 제공한 이미지이며, 그 외피만을 훑는 우리가 인식한 죽음의 이미지이다.
배경을 삭제하고 선만으로 시체를 다룬 의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는 (2009)이다. 는 역시 인터넷에서 수집한 사진에서 배경은 남겨 두고, 시체를 지우고 그 형태를 이어 그릴 수 있게 만들었다. 시체가 지워진 이 사진에서 주요한 것은 남은 사람들(혹은 풍경)과 그 주변에 있는 널려 있는 숫자이다. 작품 ' ghost' 에서 알 수 있듯이 권경환은 시체들의 이야기를 이곳의 이야기가 아닌 저곳의 이야기로 처리한다. 이러한 방식은 과잉된 이미지가 작가의 망막을 자극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권경환은 외피만을 지향하는 이미지의 속도를 지배할 수 있는 장치를 추가한다. 그것은 죽음의 잔혹성을 지운 것.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그릴 수 있게 적어 놓은 숫자이다. 각양각색의 색연필로 숫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시체가 있다. 선만으로 이뤄져 있기에 시체의 잔혹함은 숨겨지지만, 평화롭게 보였던 배경은 파괴된다. 권경환은 이미지의 자극성에 현혹되어 그저 지나갈 수 있는 그래서 무감각하게 바라보게 하는 그 이미지를 손과 눈을 통해 멈추게 하고, 그것을 직시하게 한다. (그러나 남은 배경에서 죽음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예를 들어 군인들이 총을 겨냥하고 있거나, 잘린 신체가 놓여 있는 작업은 그 효과가 반감된다.)
물론, 개인이 죽음에 이르는 거대한 폭력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내가 본 죽음, 폭력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 방법론으로 죽음에 이르는 사건의 전모를 삭제했다. 그리고 죽음을 규격화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 그리고 여기서도 만들 수 있고 저기서도 만들 수 있는 그것으로 죽음을 치환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의 이미지처럼 말이다. 이것은 이미지 과잉 세대를 살아온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리고 아직은 소심하게 그것에 직면하라고 요구한다. 그간의 역사에서 문명화된 인간이 기본 규범을 태연히 위반하고 양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행동해왔다. 이렇듯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계를 자신이 어떻게 경험했고, 인식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 권경환은 말하고 있다. 이제 그는 모순을 뚫고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는 첫 걸음을 시작했다.
1 ) 2007년 ' 인사미술공간 신진작가수첩 프로그램 열전' 참여 당시 박찬경과의 인터뷰에서 권경환은 "전쟁을 매스컴과 컴퓨터 모니터로만 접해온 나에게 위협적인 이미지임과 동시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픽션쯤으로 여겨진다."라고 말한다.
2) 이후 작업인 < 물론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 약장> (2007)에서도 과도한 장치 없이 약장을 종이로 치밀하게 묘사하는 그 과정 자체(손과 눈에 의해서)에서 현실에 내재한 비현실적 맥락을 포착했다.
3)대상의 가치판단은 이전과 이후로 변모한다. 작가는 공통으로 ' 거리 두기' 를 하면서 가치판단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고 말하지만, 이전은 ' 거리 두기' 가 아니라 ' 반대급부로 내달리기(전쟁, 폭력 등에 반하는 하트)' 는 반항에 가까웠다면, 이후는 대상과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 거리두기' 를 실현하며 대상을 직시한다.
4)인터넷이 보편화 된 시기에 동시적으로 그간 금기시되었던 엽기 영상(섹스비디오, 시체 사진, 폭력, 전쟁, 구토하는 영상 등)들이 우리의 망막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더 엽기적인 이미지를 찾아 인터넷을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