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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우무길 조각展
미술

문의요망

마감

2009-12-23 ~ 2009-12-29


전시행사 홈페이지
www.insaartcenter.com/exhibition/exhibition02.php

공작도시, 세계를 짓는 놀이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우무길의 근작을 전작과 비교해보면 외관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일정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차이로 치자면 집을 소재로 하던 것에서 도시를 소재로 하는 것에로 변화한 것이 눈에 띠고, 이에 따른 스케일이 덩달아 커진 점이 눈에 띤다. 그러면서도 집과 도시는 그 의미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말하자면 집이 개인과 함께 가족사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해준다면, 도시는 개인과 가족의 집합체인 사회의 아이덴티티를, 이를테면 한 시대를 관류하는 지식체계며 가치체계인 패러다임(미셀 푸코라면 에피스테메라고 했을 것이다)을 대변해준다. 집과 도시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체성의 집이다. 작은 정체성과 큰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고립된 정체성과 관계적 정체성이 일정한 차이를 매개로 서로 물려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집은 그저 집이 아니고, 도시는 그저 도시가 아니다.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이 생성되는 원천이며,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지나는 홀이다. 작가가 집이나 도시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영락없는 집이며 도시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 형상이 암시하는 의미,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의미, 곧 아이덴티티와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아이덴티티와 패러다임의 상호작용성이며 상호내포성이다. 이와 함께 근작에서의 소재가 집에서 도시로 옮겨온 만큼 그 정체성과 관련하여 특히 관계적 성질이 강화된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말하자면 소재의 면에서나 의미론적 측면에서 상호간 이질적인 차이를 싸안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생태의 일면이 부각된다.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이동 중 부주의로 인한 예기치 못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스티로폼으로 만든 틀이 가전제품과 함께 딸려온다. 작가는 이 스티로폼 틀을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무한 증식되는 도시, 중첩되고 변주되는 도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고 포개지면서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거대 도시 이미지를 축조해낸다.

주지하다시피 스티로폼 틀은 가전제품의 종류에 따라서 그 크기나 형태가 결정되며, 따라서 가전제품만큼이나 다양한 크기나 형태가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티로폼 틀과 가전제품 그리고 도시의 건축물은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는 반듯한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하여 이를 일정한 형식으로 변주해낸 것들이다. 아마도 기능주의(기능이 형태를, 디자인을 결정한다는)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기능주의 건축은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란 점에서 편의성은 높이 살만 하지만, 그 와중에 도시 풍경을 획일적이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바꿔놓은 것도 사실이다. 기능주의에 나타난 획일성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서 자본주의 욕망에 복무하고, 제도의 기획(심플하게 하고, 패턴화하라는 것이야말로 제도의 지상과제다)에 부합한다는 딜레마가 부각되는 점도 사실이다.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기획은 어쩌면 이런 기능주의 도시에 나타난 획일화의 경향성을 깨트려 그 사이로 틈을 내고 숨통을 트는 기획, 도시생태를 실천하는 기획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생태는 무엇보다도 흡사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도 같은 유기적인 도시, 외관상의 반복 속에 차이를 인정하고 싸안는 도시, 그 차이에 의해 살만해지는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분절되지 않고 유기적인 전체로 상호작용하는 도시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실제 제작과정을 보면, 작가는 우선 합판과 나무를 이용해 구조물을 견딜 지지대를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다양한 형태의 스티로폼 틀을 자르고 붙여나가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유기적인 전체 형상을 축조하는데, 그 형상은 마치 부감법(매의 시점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으로 본 도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접착제로는 수성 실리콘을 사용하는데, 실리콘은 접착기능도 하지만, 이와 함께 스티로폼 표면 위에 덧발라 비정형의 마티에르 효과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원하는 형태가 조성되고 나면, 그 위에 아크릴로 채색을 하는데, 스티로폼 틀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자리 선을 따라 선을 긋기도 하고, 그 틀의 안쪽, 이를테면 각종 크고 작은 평면 위에 선을 그려 넣는 등 주로 선에 의한 변주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대개는 흑과 백이 대비되는 화면을 연출하기도 하고(이렇듯 대비되는 화면은 말할 것도 없이 도시의 양면성을, 삶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특정의 주조색이 강조되는 단색조 화면을 연출하기도 하고(이렇듯 모노톤이 강조된 도시 이미지는 흔히 회색도시가 그렇듯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금욕적인 인상을 준다), 이따금씩 부분적으로 원색을 적용해 무미건조한 도시 이미지에 리드미컬한 생기를 더한다(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이미지를 깨는). 이와 함께 부분적으로 스티로폼 틀과 함께 각종 철망(그 표면에 자잘한 구멍들이 나있거나, 격자구조의 철망)으로 된 오브제를 차용해 전체 형상 속에 세팅하기도 하는데, 무슨 도심 속에 심겨진 환풍구 같다(그 자체가 삭막한 도시에 숨통을 튼다는 작가의 기획에 부합하는 오브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형태의 가장자리를 선으로 가두고 그 속을 각종 색채로 채워 넣은 화면으로 평면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렇게 조성된 각종 크고 작은 평면들이 어우러진 저부조 형식의 입체 구조물을 부각하는 방식이, 특히 원색의 색면들이 어우러진 화면이 한눈에도 팝아트와의 친근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도시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일상성을 떠올리게 하고(엄밀하게는 팝아트가 도시 자체보다는 그 삶의 방식이랄 수 있는 대중문화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구별된다), 무엇보다도 흡사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화면이 팝아트와의 상호영향관계를 암시한다.

역시 팝아트와 무관하지 않은 경우로서, 일종의 정크아트에 대한 공감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작가가 주요 재료로서 차용하고 있는 스티로폼 틀은 말할 것도 없이 폐기된 산업 쓰레기이며(산업 쓰레기의 소재적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팝아트 이전에 신사실주의자들이 먼저다. 그들은 이렇듯 폐기된 산업 쓰레기에서 고도의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리얼리티를 발견한다),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철망조각이나, 다른 작업에서 차용하고 있는 각종 플라스틱 소재의 용기들(다양한 형태의 패트병)이나, 심지어는 컴퓨터자판기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서,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도시가 뱉어낸 산업 쓰레기를 추슬러 또 다른 거대도시를 축조해낸, 일견 쓰레기도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도시 이미지의 이면에 작가는 이처럼 문명화된 사회의 그림자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도시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이중적인데, 이는 단순히 리사이클링의 차원을(산업 쓰레기를 재생한다는) 넘어, 도시의 진정한 생리는 도시의 표면이 아닌 이면에, 그림자에, 폐기된 산업 쓰레기에 주목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질 수 있는 것임을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그 실천논리가 도시생태학에 맞닿아있다. 이렇듯 작가가 축조한 도시는 우선은 경쾌해 보이고, 그리고 정작 그 도시는 쓰레기더미 위에 축성된 것이란 점에서 암울하게 읽힌다.

근작에선 일반적인 조형적 접근과 함께, 특히 공작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공작성의 감각 자체는 (자기만의) 세계를 짓는 일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작가는 세계를 만들고, 자르고, 붙이고 하는 놀이에 빠져있는 무슨 공작소년 같다. 그 천진한 눈으로, 손으로, 마음으로 도시를 짓고, 지구를 짓고, 우주를 짓고, 세계를 짓고, 나를 짓고, 존재를 짓는다. 집도, 도시도 종래에는 정체성의 집이다. 집을 짓고, 도시를 짓는 작가의 놀이는 결국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혹은 자신이 몸담을 세계)를 짓는 놀이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체성의 놀이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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