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들 모두가 일관되게 표현하려고 한 것은 관계이다. 이 관계는 관계 자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작품과 인간의 관계나 시/공간관계일수도 있는데, 어쨌든 어떠한 관계이든 관계의 조형 자체는 나에게는 화두였고 지금도 화두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표현한 관계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구체적이고 친숙한 외형으로 인해서 작품의 의도가 가려지고 이해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다 추상적으로 그리고 의미있게 관계를 담아내는 형태가 필요함을 느꼈고, 형태의 이런‘추상성과 의미성’에 대한 생각은 나로 하여금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도 관계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바뀌는 속성, 즉 ‘관계의 상대성’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 관계의 상대성이 내 팔찌 작품들의 근본 주제이다.
원래 관계의 상대성은 건축을 공부하면서 상대주의적인 건축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연히 한옥을 보면서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관계의 상대성은 현재 나의 확고한 조형원칙이자 조형의 목적이 됐다. 한옥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창호문이 열리면, 특히 창호문이 젖혀 올려져 처마의 꺽쇠에 걸리는 구조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닫혀있던 공간이 놀랍게도 곧바로 열린 공간이 되어버린다. 이 놀라운 변화는 단지 문이라는 구성요소의 변화로 말미암은 안/밖 관계의 변화이다. 이로써 관계의 상대성에서 비롯된 한옥의 ‘공간 변형성’이 팔찌 작업의 시작점이 되었다. 인넨(innen)/아우쎈(aussen), 즉 안과 밖은 바로 이 공간 변형성을 뜻하는 상징어이다.
관계의 상대성이란 시각에서 볼 때 팔찌는 장신구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장신구이면서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오브제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에서 시작된 팔찌 작품들은 오브제로서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신체 착용을 통해서 우연적인 변형을 유도해내어 신체와의 상대적인 관계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팔찌를 착용했을 때 착용자의 신체에 따라 변형되는 팔찌 형태의 상대성은 금속에 국한되지 않고 색을 가미한 실리콘에도 적용시켰다. 원래 나는 작품 주제와 상관없이 실리콘의 물성을 활용한 작업을 이미 별도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금속에서 느껴지는 정형성(定型性)의 갑갑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리콘을 사용해 보기로 한 것이다. 나아가서 금속의 딱딱한 견고함과 실리콘의 부드러운 유동성의 결합이 내가 원했던 작품의 의도 - 착용 시 형태의 변형을 통한 상대적 관계성의 표현 - 와 부합한다고 생각했던 면도 있다.
팔찌 제작의 초기 단계에 실리콘보다 금속의 비중이 컸던 작품들이 많았던 반면에 그 뒤로는 작품에서 금속이 차지하는 부분과 역할은 줄이고 실리콘의 비중을 높여 변형 공간의 창출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이로써 형태와 공간에 관계하는 변형 가능성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을 지닌 관계항들 - 금속/실리콘, 색채, 안/밖 - 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관계를 계속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