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그림을 거는 전시다. 미술의 저변이 확대 됨에 따라 이제 그림은 그림으로, 전시는 전시로서만 존재 할 수 없게 되었다. 작가들은 무언가에 취해 붓을 들고 그리는 행위를 할 뿐이다. 의도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기 위해 각오하고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려진 작품이 갖는 의미는 존재한다. 작품 안에 메세지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의미론적인 예술 행위가 사회적으로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하지만 본능적인 예술 행위 보다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앞서게 된다면 예술이 가지는 본질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국내 현대미술의 행보에서 드러나는 문제들 중 하나는 작가들이 이미 정해진 제도 안에서 행하는 시도를 실험이라 하는 것이다. 트렌드에 귀속 되어 그 안에서 소극적인 실험들만 반복할 뿐이다. 관객들은 작품들을 비슷한 스타일로 나누게 되었고 예술이 가진 절대적인 힘은 점차 상실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회화전을 개최한다. 작품성에 대한 가치 기준의 판단은 몰래 숨겨둔다. 우리의 계획은 들통날 것이 뻔하다. 작가는 그림으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한다. 그림들 스스로가 내재된 작품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가치에 대해 논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예술적 기준과 작품성에 대해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
LAPIS LAZULI 개관전으로 열리는 성장원(成長元)展은 성유진, 찰스장, 원주연을 초대했다. 의인화 된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유진 작가의 작품에서는 깊은 불안과 통증이 그대로 보여진다. 고양이의 불안한 눈빛과 오브제들의 어색한 배치, 살을 뚫고 나온 팔, 다리의 당황스러움이 보여지는 그대로 이다. 찰스장의 작품에는 유명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관계자들은 대중화 된 이미지 차용의 의미를 놓고 문제 삼기에 바쁘지만 그는 단지 자주 보여지는 이미지에서 흥미를 찾았을 뿐이다.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창조적 행위는 그가 추구한 재미다. 원주연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방향과 소극적인 행위들을 집중해서 살핀다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그리움과 외로움 등을 전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능, 원초적인 힘. 이렇게 우리는 작가들이 가진 본연을 그대로 전달한다. 복잡한 이론이나 의미를 첨부하여 그림 자체의 힘을 방해하지 않겠다. 회화의 담백함으로 승부하겠다는 디렉터의 포부가 관객들에게 심심치 않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