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VERSE IN MIND
최비오展
최비오의 그림에는 무언가 작은 것들로 가득 차있다. 형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기호와 이미지들이 꿈틀거리고 바스락거린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작지만 분명한 형체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위치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작품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우리는 통상 눈을 통해 접한 정보를 뇌로 전달하여 인지한다고 믿지만 그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물체는 에너지와 진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과의 교감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는 무의식을 통해 에너지를 느끼고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몸 전체로 에너지의 진동을 느끼며 그것을 화면에 옮기고자 한다. 인간의 의지나 이성적 판단보다는 무의식에 의한 감각체계를 더 존중하는 셈이다. 이런 측면은 그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가는 사전 계획없이 밑바탕에 직접 그리기를 선호한다. 그에 의하면 두서없어 보이는 어린이의 낙서일지라도 단지 확인되지 않았을 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나타냈다고 여긴다. 에너지의 진동을 그대로 옮겨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그 자신이 마음이 끌리는대로 붓을 놀리고 마음을 맡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사전에 어떤 것을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일단 마음에 불꽃이 튀면 몇시간이건 며칠이건 작품이 완성되기 까지 화실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촘촘한 그물처럼 서로 엉켜붙어 있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초끈이론(Super String)에 의거해 모든 사물은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이 묻어있다. 작가는 유한과 무한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인간과 우주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작품에서 유난히 선의 짜임을 강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술래잡기를 하듯 기호들이 숨겨지고 노출되거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히면서 수수께끼 같은 도형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몇 년전만 해도 그의 작업은 부유하는 부호나 기호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 면 속의 형태' 에 기초해 있었다. 하지만 근작에선 그런 통합은 감소되고 ' 바탕과 이미지' 의 관계로 바뀌었다. 화면이 하나의 면으로 발전된 까닭에 부호나 기호가 더욱 선연하게 나타난다. 가령 화면 속의 기호들은 튜브에서 나온 선들로 이어지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들로 엇물려 있다. 고대 유적의 문양, 방사형, 계단형, 곤충 더듬이, 마름모꼴, 눈결정체, 신체의 일부, 회로판 등등 모종의 이미지가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화면에서 양감이나 거리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형체도 서로 맞물려 있거나 파도처럼 화면위를 넘실거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개념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에너지 조각들이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생명의 에너지를 모으고 퍼뜨리고, 다시 흩어졌다가 뭉치는 것을 반복한 결과이다. 평행우주론(Parallel Universe)에 의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마저 무너뜨린다. 작가는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은 허구라는 판단 하에 에너지로 충만한 신비적인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필자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몇 년전에 본 영화 『콘텍』(Contact)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밤마다 모르는 상대와 교신을 기다리며 단파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앨리 엘로위는 훗날 천문학자가 되어 밤하늘에 가득 흩뿌려진 별들을 바라보며 외계 생명체의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베가성으로부터 정체모를 수신하고 먼 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나중에"우리는 우주에 속해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또한 결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털어놓는다.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법한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그럴듯하게 영상화한 작품이었다.
최비오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며 상상속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고, 이것이 그를 화가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작가는 그 꿈을 펼쳐가는 중이다. 우리가 언젠가 우주적 존재와 교류할 수도 있다는 점을 믿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자신이 그리는 것이 그림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작가는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그에게 있어 그림은 말과 문자로 전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을 표현하는 언어이고, 이를 통해 감상자는 예상치도 못했던 차원과 만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색다르다. 원근이나 입체감이 빠진 색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랄 수 있다. 게다가 동화적인 모티브에다 즉흥적인 드로잉과 막힘없는 순발력으로 이어지는 양식은 기존의 그림과 구별되는 고유의 조형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림풍으로 본다면 바스키아나 키스 헤어링의 그래프티를 연상시키지만 내용적으로는 자연과의 조화와 만남을 중요시한 훈데르트바써와 비교된다. 훈데르트 바써가 자연과 인간, 사물과 인간의 친화성을 강조했다면, 최비오는 그러한 친화적 관계를 ' 사랑' 으로 묶어 표현한다. 그는 세상의 인간과 생물과 식물, 또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만남을 가장 극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감정이 그의 그림을 따듯하게 만들고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정체 모를 언어들로 가득 차 있어 그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최비오는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도 헤아려주길 원한다. 우주가 기운으로 가득 차 있듯이 자신에게 녹아 있는 사랑의 감정이 감상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작가는 에너지와의 교감속에서 그의 작품이 탄생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바꾸자면 곧 사랑의 파동, 결국은 사람의 교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부호속에는 수신을 기다리는 사랑의 시그널들이 들어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