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중 전차바퀴와 군화에 짓밟힌 땅위에 급히 피난을 가느라 벗겨진 고무신도 보이고 그 위에 개미들이 죽어 있거나 방향을 잃은 채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있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전시담당: 임대식 큐레이터 02-725-1020 / 010 3453 8445
전시개요 및 작품내용
2004년에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있었던 故원석연 화백의 5주기 추모전이 화백의 작품들을 소재별로 구성해서 보여주었다면 본 10주기 추모전은 연필이라고 하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고 고집스럽게 연필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모색해 온 故원석연 화백의 집념과 그 연필로 그려낸 시대정신을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작품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당시의 생활상들이 화백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정보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되고 그 변화가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시대에 故원석연 화백의 작품들은 삶의 진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 진지함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감정들. 즉,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또한,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과 타인들의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자세 등 우리의 삶에서 놓치기 쉬운 감상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엿 볼 수 있다.
연필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색감과 표현의 가능성을 어쩌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끌어 올린 원석연 화백은 가히 연필화가라 불려질 만 하다. 여느 색이 풍부한 재료들로도 표현이 어려운 소재들을 연필만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대상들을 관찰하는지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그 대상을 보고 느낀 정신적 감흥까지도 얼마나 철저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특히, 가위나 도끼와 같은 철재들은 연필의 한계를 뛰어넘은 표현기법은 차치하더라도 저 가위와 도끼를 사용하던 당시 고단했던 삶의 파편들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한낱 곤충에 불과한 개미를 통해 전쟁과 전쟁의 후유로 인해 파괴된 인간상들을, 나아가 인간 존재의 고독함을 표현하고 있다. 넓은 화면에 작은 개미 한 마리를 그려놓은 작품은 구도가 주는 긴장감뿐 아니라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들 속에서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쳐질 수도 없는 말 그대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현재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한다.
또한, 이번에 전시될 원석연 화백의 풍경작품은 연필화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세잔이 한 곳의 풍경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빛의 다른 인상을 그려낸 것처럼 원석연 화백도 한 곳의 풍경을 연필의 운용 기법에 따라 전혀 다른 화풍들로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의 풍경작품에서는 느낄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봄의 따스한 바람도 느낄 수 있으며, 강약의 연필선으로 잔잔히 흐르는 물결도 거침없이 표현하였다.
일생을 연필을 고집한 故원석연 화백이 그 재료에 있어서는 외골수적인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바라본 시대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하찮아 보이는 곤충에서부터 한국의 자연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과 같이 우리의 삶에 가장 밀접하고 때로는 지난한 삶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 순간순간 삶의 진지함들을 그 누구보다도 더 폭넓게 그려 왔다. 따라서 그의 연필화는 당시의 시대를 바라보고 작가의 생각과 동시대의 감성들을 반영해온 한국 화단의 중요한 사료적, 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화집 발간에 대해
올해로 연필화가 故원석연 화백의 10주기를 맞이한다.
이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전과 함께 故원석연 화백 화집이 발간된다.
2013년 故원석연 화백의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는 화백의 10주기 추모전을 기획함과 동시에 故원석연 화백이 연필화를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격동기의 한국 역사와 미술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화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한국의 미술사와 미술현장을 오랜 시간 기록해 온 열화당에서 편집을 맡아 발간될 故원석연 화백의 화집은 화백의 작품 세계를 미술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뿐 아니라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정신에 대한 현대적 의미와 태도를 전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현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와 미술 관계자들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강인한 시대정신에 입각하여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는 명제를 되살려 줄 것이다.
일생 동안 고집스럽게 연필을 사용해 온 故원석연 화백의 작품들에는 연필이 지닌 특성들이 완벽하리만큼 표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연필은 스케치 재료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화백에게는 그 어떤 재료보다도 가장 표현력이 뛰어난 재료로 사용되었다. 사실 연필만큼 대상을 파악하고 그 특성들을 표현하는데 정확하고 솔직한 재료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연필은 故원석연 화백의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과도 너무나 잘 맞는 재료였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전쟁을 겪으며 피난 등 잦은 이동 중에 연필과 종이는 관리가 용이하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훌륭한 재료였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故원석연 화백이 연필을 자신만의 완성된 재료의 경지로 끌어 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화집에서는 재료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화백이 바라본 한국 근 현대사의 흐름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 왔는지에 대한 미술사적 의의에 더 중점을 두고 발행될 예정이다. 이는 오는 6월에 있을 10주기 추모전 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故원석연 화백이 남긴 실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을 포함한 예술 작품들은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기술의 발전 등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예민하게 담아내는 매우 중요한 사적 자료로서도 기능한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화백의 작품들은 우리의 격동기 역사를 사실 그대로 뿐 아니라 당시 모든 사건들을 같이 겪었던 동시대 인들의 시대 정신을 담아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날카롭고 정확한 시선과도 같이 화백의 연필은 언제나 날이 선 듯 예리하게 당시의 풍경과 정물들을 표현하고 있다.
원석연 작가론
연필화가 원석연
故원석연 화백 10주기 추모전
“연필선에는 음(音)이 있다. 저음이 있고 고음이 울리며 슬픔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연필선에는 색(色)이 있다. 색이 있는 곳에는 따스함과 슬픔, 기쁨, 고독이 함께 한다.
연필선에는 리듬이 있고 마무리가 있고 살아있는 생명 속에서 흐르는 미세한 맥박과 울림을포착할 수 있다.
연필에는 시(詩)가 있고 철학이 있다.”
- 원석연 작가노트 중에서-
“조선호텔 옆 환구단”, 조선호텔이 지어질 당시 조선시대 때 하늘에 제를 지내던 환구단을 단순하면서도 힘있게 묘사했다. 연필선 하나하나에 의미를 가지고 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60여 년 동안 오로지 연필그림만을 그려온 작가가 있다. 동료작가들 사이에서 ‘괴벽이’, ‘대꽂이’, ‘바카쇼지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원석연(1922~2003)이 그 사람이다. 흰 종이에 연필로 실물 크기의 개미 한 마리만을 그려놓고 같은 크기의 유화 작품과 동일한 가격이 아니면 팔려고 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꼬박 그린 초상화를 초상의 주인이 수정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던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런가하면 달랑 연필만을 챙겨들고 오랜 기간 동안 해외 스케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필화가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점점 더 단절과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작가이다.
원석연의 연필화에는 연필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어 보는 이들을 감동시킨다. 그는 단순히 대상의 윤곽이나 인상을 기록하는 정도를 넘어 연필선의 강약, 농도, 밀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대상의 윤곽, 질감, 양감과 동정(動靜)까지도 표현하였다. 그가 연필화를 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작가들은 “연필 하나를 굴리는데 광선 있는 데는 살짝 굴리고 깊은 데는 진하게 하면서 묘사를 잘해. 연필로 온갖 빛깔을 다 냈다.”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원석연 스스로도 연필선에는 ‘음과 색’이 있고 또 ‘일곱 가지 빛깔 있다’며 연필의 무궁무진한 표현가능성을 역설하였다. 이런 그였기에 연필화를 단지 학생들을 위한 학습용 실기나 중요한 작품에 앞서 제작하는 습작 정도로 치부하는 한국 화단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가 평생 동안 삽화와 컷 등을 일체 그리지 않은 데에는 연필화가가 본격적인 작가로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 전쟁 직 후 청계천 주변의 판자집들을 빠르고 리듬감 있게 묘사했다. 당시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15세에 건너간 일본 가와바타 화학교(川端畵學敎)를 다니며 그림 공부를 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부터 였다 회고하였다. 또한, “누가 뭐래도 나는 연필 하나로 하나의 완성된 회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회고에서도 드러나듯이 연필에서 자신이 추구해나갈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1940년대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가 주관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처음 개최되자 원석연도 작품 두 점을 출품하였다.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공모전에 작품을 내놓은 것은 1949년의 이 전람회가 유일하다. 연필로만 그린 초상 작품이 국전에서 입상한 경우는 아마 원석연이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원석연은 미공보원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이후 1950년대 내내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각각의 개인전은 조금씩 그의 존재를 화단에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현실세계의 냉혹함을 뱀, 개미, 병아리, 닭 등의 사물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이런 방식은 그의 작품이 점차 짙은 서정성을 더해가는 가운데에도 변치 않는 기본 요소가 되었다.
“양미리”, 원석연 화백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양미리는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써 청렴하고 담백함을 좋아했던 원석연 화백의 소탈함을 잘 드러내 주는 소재이다. 화폭을 가득 채울 듯 한 구도가 인상적이다.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원석연의 이름을 일반인들의 기억에 각인시키기 시작한 작품이 〈개미〉연작이었다. 실물 크기로 정밀하게 그려진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처럼 참화가 지나간 자리를 뒤엉켜서 발버둥치며 전진하는 개미들의 모습은 엄혹한 현실을 헤쳐나가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 충분했다. 그런가 하면 〈음지에서 양지로〉, 〈근면〉과 같은 작품들은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부지런함과 협동심의 상징으로 여겨져 당시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개미”, 다리가 뜯겨지고 몸통이 부서진 개미들로 이루어진 군상은 전후의 상처와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개미”, 커다란 화면에 개미 한마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화면 구도의 긴장감과 함께 인간 존재의 고독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1970년부터 여러 차례 해외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화가들의 해외진출이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었던 당시 그의 개인전은 신문과 화단의 큰 주목을 받았었다. 1970년 볼티모어를 시작으로 1972년 로체스터, 1973년의 세인트 루이스 전시회 등 그의 개인전이 해외에서 열릴 때마다 서울에서 도미전(渡美展)과 귀국전(歸國展)이 열리고 신문에 크게 보도되곤 했다.
“대자연은 나의 벗이며 스승이다.
대자연의 일부나마 충실히 작품을 한다면 나의 일부를 발견하리라.”
“작가는 자연에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하며 시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내 마음으로 끝없이 우주를 여행함과 더불어 내 몸이 종잇조각과 같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내가 마음먹은 것들을 연필 끝을 빌려 흰 백지 위에 영원히 조각하여 후세에 전하리라.”
“마을 풍경”, 고즈넉하고 햇살이 좋은 오후의 시골풍경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초가지붕과 흙담 등 당시의 생활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작품이다.
1970년대 그의 연필화에는 접으로 묶인 마늘, 두릅에 엮인 굴비처럼 이전부터 그려온 소재에 호미, 갈고리, 도마 위의 토막 난 생선, 소쿠리 속의 늙은 호박, 호두 껍질, 깨진 달걀 등과 담배, 재떨이 등 일상적인 사물들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자신의 기량을, 혹은 연필묘사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나가려는 듯 절정에 달한 정밀함으로 이들을 묘사하였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담뱃재에서는 아직 마지막 연기가 솟아오를 것만 같은데 이렇듯 더할 나위 없는 생생함과 덧없음의 공존이 곧 원석연만의 독특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생애 후반부로 갈수록 그는 화면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 놓아 서정적인 느낌을 고양시켰다. 지평선을 극단적으로 낮게 둠으로써 시야 너머로 아득히 펼쳐지는 광활함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혹은 그마저도 생략하여 배경 일체가 사라진 빈 공간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화면 한 가운데에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사물을 두어 흰 여백과 대조를 일으키며 보는 사람을 압도하곤 했다. 이러한 조형형식은 그려진 사물을 강조하며 보는 이를 화면 속으로 끌어들여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단순 명쾌한 조형표현이 오히려 사물 속에 응축된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볏단”, 추수하고 타작한 볏단을 쌓아 놓은 풍경이다. 한국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소위 ‘철물시리즈’ 즉 엿가위, 도끼, 곡괭이 등은 이러한 원석연의 화면구성에 매우 적절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반짝거리는 듯한 쇠붙이의 질감은 무른 연필로 그려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하고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들 시리즈에 대해 신선함이 돋보인다는 당시 기사내용은 바로 이렇듯 연필 표현에서 얻은 물질감과 독특한 마티에르를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물 시리즈뿐만 아니라 부셔진 벌집이나 원형을 이루며 움직이는 개미떼를 그린 작품에서도 작가가 소재들을 즉물적으로 그리기보다 마티에르를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흰 종이 한 가운데에 철조망을 둥그렇게 그려넣은 작품은 그 단순하고 간결한 화면이 미니멀 아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세련된 느낌이다. 연필의 다양한 톤을 이용하여 철물의 녹슨 부분이나 그림자의 질감까지도 촉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표현력과 독특한 화면구성이 어우러져서 그의 연필화는 현대적인 조형미를 구현한 것이다.
렘브란트와 밀레를 좋아하고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며 작품에서 영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추구했던 원석연. 자신의 작품이 백지 위의 조각처럼 영원할 것을 원했던 그이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섬뜩한 철조망, 텅 빈 공간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초가집이나 원두막은 더 이상 현실의 풍경이 될 수 없었다. 화면 속의 풍경은 다름 아닌 원석연 내면의 풍경이었다. 앞에 놓인 거대한 무(無)의 공간과 대치하는 듯한 한 마리 개미는 원석연 자신일 터이다. 수없는 자기 성찰과 관조를 통해 얻어진 맑은 침묵의 화면은 말년의 원석연이 도달한 회화적 성취였다.
- 김경연, 원석연 작가론, 발췌
“가위”, 연필로 표현했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철재의 특징들을 극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저 가위를 사용하던 당시의 고단한 삶이 느껴진다.
“새”, 지금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예전에는 포장마차에서도 참새를 구워서 팔았다. 사냥꾼들은 참새를 잡아 머리를 실에 꾀어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옭았다.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담배”, 타 들어가는 담배의 재까지 세심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일상에서 쉬 놓치고 있는 작은 의미들까지 관찰했던 원석연 화백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