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관조하고 노래하는 서정시인
-행사명: 김재학 작품전
-장소: 선 아트센터. 선화랑
-문의: 734-0458
주지하듯이 김재학은 대상의 재현에 충실한 전형적인 구상미술 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상당히 폭넓은 애호가층을 확보하고 있다. 전통적 구상미술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두루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이야깃거리나 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구상미술 작가의 작업이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미술제도는 크게 보아 이념적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질서들의 어색한 동거가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과 전통적 아카데미즘 미술 양자는 예술계에서 서로 공존하고 있지만, 이질적인 조건들이 너무 많다. 서로 다른 공간과 미의식, 질서, 시장 등을 갖추고서 따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전혀 다른 예술계를 각각 따로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화단은 분리되어 있다. 이 지면에서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따져보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다만 보기 드물게 김재학이 그 양분된 화단 현실 속에서도 폭넓은 애호가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에게나 또 구상미술계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일이기에 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구상미술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구상미술이야말로 재현에 충실하고, 그로써 대중들의 정서에 밀착해 있는 양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미술이 대중적 애호가층을 널리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날은 그렇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중적이라 자부하는 미술이지만 대중은 멀리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나 백남준 그들의 예술세계가 대중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지는 않아도, 그들은 대중들의 의심할 수 없는 우상이다. 대중적 정서에 부합하고 있으며, 또한 적지 않은 기여를 해온 구상미술이 정작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구상미술이 대중 매체의 생리에 잘 적응하고 있지 못한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에는 대중적 스타가 있기 마련이고, 또한 그 스타 뒤에는 미디어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매체 가까이 있지 못한 구상미술에는 이렇다 할 만한 스타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중적 스타가 반드시 위대한 예술가란 법은 없지만, 대중적 스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대중들의 생활공간과 시간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예술사회학적 빈곤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재학의 경우는 그 나름대로의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가를 소개할 때 작가 이름은 잘 모르다가도 이 작가의 작품 이미지가 실린 인쇄물, 즉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모 그룹의 캘린더, 가계부 등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 이야기를 하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해가 지나면 버리기 마련인 그 가계부와 같은 인쇄물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밖에도 우표, 연하엽서 등에 실린 작품 이미지까지 감안하면 그는 어느 사이 대중적 스타의 위상에 근접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작가가 대중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예술적 성취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적 성취 이전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작가가 대중적인 매체를 탈 수 있었던 것도, 또한 현대미술 애호가들에게도 어필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어떤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작가의 그림들이 보통의 구상미술 작가들과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른 작가들처럼 풍경, 인물, 정물 등을 느낌과 욕구에 따라 그린 데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성향적으로 코로풍과 마네풍에 가까운 견고한 재현회화를 일구어 왔던 보통의 작가였다. 그러다 지난 90년대 말부터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풍의 변화이다.
대상은 주로 식물 이미지로서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가벼운 터치의 화풍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산뜻하고 담백 경쾌하며, 감각적인 붓터치가 살아 있는 화면은 식물 이미지의 생기를 더해주게 된다. 우리의 산과 들에서 접할 수 있는 들꽃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은 소재 자체의 신선감을 발산할 수 있었다.
숨겨진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이슈를 가지고 접근한 작가의 의도는 시의 적절하게 대중적 미의식과 정서에 아주 효과적으로 어필하게 된다. 이러한 소재의 그림들은 대체로 소품의 크기들이지만 작품들의 밀도와 짜임새가 절묘하여 소품이라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작가의 노련한 필치는 사진적 이미지의 한계를 극복한 그리기를 통해 사진 이상의 시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보통은 심산유곡에서 발견한 대상을 대부분 사진으로 담아 그것을 화폭에 옮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작가의 소화 능력이 뒷받침될 때 사진 의존에서 오는 어색함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의 필치는 감각적인 리듬에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적 대상 자체를 충실히 묘사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전달하게 된다.
특히 여백을 처리함에 있어 그것이 적절한 관조와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대상의 사소함과 왜소함을 또한 극복하게 된다. 자연 앞에서의 관조를 충분하게 체험한 작가 입장에서 관조의 순환을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것이다.
수채화의 경우는 여백에 별도의 처리를 하지 않은 것 역시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산뜻하면서도 담백하고 감칠맛이 나는 작가의 재현적 화면은 인쇄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편집되어 보는 기쁨과 재미를 더하게 된다.
작가는 최근 특정의 소재에 집중했던 데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로 전환하게 된다. 정물, 풍경 등의 장르만이 아니라 그 소재도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다.
작품의 크기도 초대형의 그림에서부터 작은 크기의 그림들이 곁들여져 공간의 연출을 보다 변화 있게 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붓의 분방하고 감각적인 속도감이 더욱 많이 느껴지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항상 잘 조율된 짜임새 속에서 분방한 붓의 유희가 돋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붓이 리듬을 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일탈하지 않도록 하는 적절한 제어장치가 그의 전신에 잘 분포되어 있는 듯하다. 사실 묘사력을 기본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의 혼을 불어넣지 않을 작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관객에게 다 드러낸다는 것은 일류가 아니다. 노련하고 적절하게 조율하고 안배하는 가운데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관건이다. 감각적이면서도 대상의 재현성을 필요 이상으로 훼손하지 않고, 구체적이면서도 작가 자신의 개성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반영해 내는 점이 작가의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