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령 展
웃음 말없는말
Laugh Series_40x50inch_Archival Pigment Print_2014
웃음
사람들은 웃는다.
살며 웃고, 사랑하며 웃고, 감사하며 웃고, 행복하며 웃고, 기쁨에 웃고, 슬픔에 웃으며, 울다가 웃고, 헤어질 때 웃고, 머쓱해서 웃고, 주고 받고 웃으며, 절망에 웃고, 실패하여 웃고, 절규하며 웃고, 진심을 담아 웃고, 진실을 감추고 웃으며, 웃기 위해 웃고,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나 웃는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삶 속에서 그렇게 웃음짓는다. 얼굴, 그 헐벗은 곳에서, 마치 인생을 대변하듯, 주름진 굴곡들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날리면서, 견디고. 차갑고 강한 바람, 뜨거운 태양아래 눈물, 콧물, 그리고, 땀. 반복하여 호흡한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니 너의 얼굴, 그 곳에서 나를 만난다. 너의 웃음과 나의 웃음이 만난다. 나의 얼굴과 너의 손도 만난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젊음은 젊음대로, 늙음은 늙음대로, 그대로의 흔적을 드러내고 감추며, 다시 한번, 감추고 드러나고 마는 것을. 눈빛은 끝내 진실을 감추지 못한다. 이 세상의 호흡하는 웃음이다.
한 사람이 웃는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웃음, 현재의 웃음이 아닌 웃음, 이 세상을 향하고 있지 않은 그런 웃음, 생의 터널 밖을 향한 소멸의 순간에 웃음, 시간이 멈추어 버린 호흡하지 않는 웃음을 본다. 세상의 수 많은 웃음들, 그 이유들로부터 벗어난 웃음, 어떤 것도, 그 무엇 때문도,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너의 웃음과 나의 웃음이 만날 수 없는 그 곳에서, 내려놓음, 그 마침으로부터, 그 웃음 진정한 자유로부터 왔을까.
사람들은 웃는다.
강렬한 태양의 눈부신 빛을 향해,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 무언가를 향해, 저 비어있는 공간과 그 넘어 크고 작은 형체들을 향해, 끊임없이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매며, 대상 없는 그 무언가를 좇아가며 그렇게 웃는다. 이 웃음의 조각들, 언젠가 누군가와 조우하며, 눈을 마주치고, 만나고, 헤어지고, 친구가 되며, 격려하며, 소리 내어 웃고, 숨 죽여 속삭이면서 그렇게 웃어 줄 수 있게. 순간이 영원히 되도록.
그들이 누구이고 왜 웃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웃음은 웃음으로. 영원한 순간이 되도록.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기리며.
2014년 2월 진령(眞鈴)
Laugh Series_40x50inch_Archival Pigment Print_2014
웃음, 말 없는 말¹
최연하 : 전시기획, 사진비평
오진령이『곡마단 사람들』을 전시와 책으로 엮어낸 지 10년이 흘렀다. 서커스를 촬영하기 시작한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고 그 결과물을 모아 스물세 살에 첫 번째 개인전을 치른 후 < 거미여인의 꿈> 과 < 몸짓> , 그리고 신작인 < 웃음> 까지 사진이력으로 삶의 절반을 채웠다. 대개의 작가들에게 첫 번째 작업은 이후 성장과정에 아리아드네의 실이자 자양분이 되는데, 오진령에게 사진의 첫 만남인 ‘곡마단 사람들’이야말로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그 위력이 발휘됨을 알 수 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재능을 보였던 이 무서운 신인이 이번엔 명쾌하고 성숙한 ‘웃음’을 선보인다. 지난 십 칠년 동안 잘 훈련되고 정련된 테크닉과 깊은 사유가 명징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그녀의 사진 속엔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짓이 있었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이 몸짓은 비동질적인 실연(實演)의 세계이고, 꼭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카메라가 담아내기엔 더 없는 소재(주제)이다. 삶의 다채로운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람의 공연(행위)들은 기계적인 반복운동 같지만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몸짓도 무엇으로 일반화 할 수 없는 고유함으로, 사진인화지의 표면위에서 반짝거리게 되나보다. 오진령이 주객의 자리를 와해시키며 존재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답해온 이유가 한 순간 반짝이며 튀어 오르는 저 사랑스러운 몸짓들 때문이 아닐까.
이번엔 그 몸짓의 주인인 얼굴들이 웃고 있다? 한 겨울, 한 낮의 태양아래 차갑게 빛나는 얼굴들은 내가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쳐다보는 듯하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오직 얼굴과 손만을 내놓으며 수동적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관객이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젊거나 주름진 피부, 머리카락의 컬러와 얼굴의 조형적인 윤곽 혹은 표정뿐이다. 외모에 사로잡혀 계속 얼굴을 살펴보지만, 얼굴을 증명할 수 있는 형식과 서술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이내 탐색을 멈추게 된다. 이처럼 보는 이를 무장해제 시키고 비공격적으로 만드는 이 얼굴은 그저 드러나 있을 뿐 아무런 말없이, 하지만 아주 ‘시끄럽게’ 웃고 있다! 사진 속의 얼굴은 사진이 표상하고자 하는 바를 피하고, 오히려 관객이 그에게 부여하는 시선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얼굴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 그것을 얼굴이라고 불렀다. 레비나스라면, 흔히 주체인 사진가의 위치에서 대상을 찍어 왔던 기존의 포트레이트의 범주로 결코 귀속될 수 없는 것이 ‘얼굴’일 것이다.
그래서 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드러날 수 없는 것이 드러남과 동시에 나를 타자에게 노출하는 일이기에 약간의 고통과 난해함이 따른다. 즉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어떠한 비전도 지식도 없이 그저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진령의 다만 웃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사진의 함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제껏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몸통은 사회적, 미적, 정치적 코드들을 박탈당한 채 커튼 뒤로 물러나 있고, (화장을 하였어도)살갗이 헐벗은 채로 숨김없이 드러난 얼굴은 웃고 있는 것이 아닌 생생한 뉘앙스로 상황만을 전달한다. 다만 ‘본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인다는 역설을 오진령의 < 웃음> 사진이 시끄럽게 말하려는 것이다. ‘말없는 말’의 강력함을 오진령의 소리 없는 < 웃음> 사진에서 보게 된다.
¹ ‘말 없는 말’: 자크 랑시에르의 용어이다
Laugh Series_40x50inch_Archival Pigment Print_2014
오진령의 사진-몸짓의 세계
최연하 : 전시기획, 사진비평
2003년에 첫 개인전, < 어릿광대와 사랑에 빠지다> 로 등장한 오진령이 그 이듬해『곡마단 사람들』을 책으로 엮어낸 일은 우리 사진계에 뜨거운 돌발사건이었다. 열일곱 살 오진령이 한물 간 서커스단을 6년간 쫓아다니며 촬영한 결과물들은 반향을 일으켰고 많은 관객 혹은 독자들의 주의력을 이끌어낸다. 작가스타일이 뚜렷한 것도 아니고, 대중적 취향에 영합하거나 다큐멘터리의 형식에 경도된 사진도 아니었는데 놀라운 점은 보편성을 획득하며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이후에도 수많은 (다큐멘터리)사진들이 형식과 내용을 변주하며 탄생했을 것이고, 무수한 사진들 속에서 오진령의『곡마단 사람들』이 아직도 주목받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특별한 무엇인가 계속 생성되어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뉴밀레니엄을 전후로 많은 사진들이 점점 모호해지고 불투명해진 반면, 오진령은 명쾌한 의미와 함께 사진의 존재론적인 층위를 살펴왔다. 자칫 소재주의에 빠질 수도 있었을 ‘서커스’를 깊은 향수와 놀라운 가벼움으로 끌어올렸고, 존재론적 자아와 사진의 본질을 합치시켜가며 부유와 정주를 변주하는 이동 속에서 자기에게로 향한 비밀스러운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몸짓 - 새로운 길트기
오진령은 흑백필름으로 처음 사진을 시작하여 필름이 담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카메라를 섭렵한 ‘격동의 장비변천사’의 마지막 세대쯤에 해당 될 것이다. 작업의 베이스는 거의 필름이되, 프린팅과정에서 디지털 프로세스를 병행하기도 했는데, < 곡마단 사람들> 시리즈에서는 빠른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35mm소형카메라가 필요했다면, < 거미여인의 꿈> 에서는 색감과 디테일의 묘사를 위해 중형카메라를, 그리고 < 몸짓> 에서는 4☓ 5인치 대형카메라로 작업하며 대상과의 보다 명징하고 내밀한 긴장을 이끌어낸다. 오진령이 사진을 시작한 90년대 후반은 일종의 우연한 해방구처럼 사진형식과 주제에서 다양한 욕망들이 분출되었던 시기였다. 새로운 기법들이 수용되었고 위안과 도피를 제공하는 환각적이고 이국적인 이미지들이 소비되었다. 그 시기에 ‘서커스’는 진실의 깊이를 파고들어가는 다소 무거운 소재였기에 단편과 표층적인 촬영이 대부분이었다면, 오진령의 천진한 카메라아이는 인간조건의 숙명적 세계라 할 서커스단원들의 몸짓을 실날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잡아냈다. 서커스로부터 탄생된 오진령의 일련의 사진들은, 스스로 서커스단원들을 이끄는 ‘거미 여인’이 되어서 구체적인 곡예들을 이뤄낸다. 내 안의 자아를 들여다보는 방식도 존재와 사진이 별개의 요소가 아니며, 사진의 깊은 곳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이 있을 지 좀 더 커진 120mm필름으로 접근하게 된다. 이후 < 몸짓> 작업에 이르러서는 대형카메라로 생에의 아포리아적 국면을 드넓은 자연 속에서 세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카메라포맷은 사진가의 자세(대상을 바라보는 시각 및 거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진가들이 다시 대형카메라로 회귀하는 이유가 관습적 리듬에서 벗어나 대상의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기 위함일 것이다. 오진령의 카메라도 존재의 복합성에 대한 다면적인 탐구를 위해 본능과 인식사이에서 새로운 길트기를 하고 있었다.
몸짓 - 범속한 각성¹
1997년, 고교생이었던 오진령에게 ‘동춘서커스’와의 조우는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이라 할 만하다. 그녀의 이름자인 ‘진령’²처럼, 마음속에서 진짜 방울소리가 들려오는 귀한 음악적 경험에 비유될 만큼 그것은 지고의 우연성이었을 것 같다. 오로지 몸뚱이와 최소한의 장비만 허용되는 서커스공간은 인간에게 허여된 한계지평을 계속해서 탄로시키는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한 몸인 세계이다. 오진령이 꿈꾸듯 다가간 그곳에서 방향도 안내자도 없이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더듬어가며 촉각적으로 찍어내고, 후에 그녀 스스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출렁거리는 검은 죽음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으로 밀고나가는 몸의 본능을 따라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동기술법으로 쓰여 진 이 몸의 다양한 행동(언어)은 < 곡마단 사람들> 로부터 < 거미여인의 꿈> 과 < 몸짓> 으로 이어지며 언어와 이미지, 현실과 꿈처럼 이중으로 휘어진 공간을 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다. 서커스도 그렇지만, 삶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듯하여도 조금씩 차이를 발생한다. 그것은 매 순간 생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새로운 길들을 트는 일이기에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지만, 단 한 번만 이뤄지는 일회적이고 비동질적인 실연(實演)의 세계이다. 이는 분명 사진촬영이라는 ‘사건’과 닮았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틈 혹은 passage)은 생성이면서 죽음의 순간이다. 즉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는 셔터가 닫히면서 이미지로 굳어지고 빛의 흔적으로서 필름에 기입되는 것이다. 나로서는 사진의 가장 놀라운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사진이 재현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 사진에 찍혀 있는 사건은 결코 그 이외의 것을 향해 자신을 넘어서지 않는다. 사진은(…)절대적인 ‘특수성’, 불투명한 최고의 ‘우연성’이며, 곤란하게도 ‘그런 것’, 간단히 말해서, 그 끈질긴 표현 속에 나타나는 ‘투케’ ‘기회’ ‘만남’ ‘현실’인 것이다. ³
1) 범속한 각성(profane Erleuchtung) : 벤야민의 용어임. ‘언뜻 결합될 수 없는 듯한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초현실주의 변증법적 운동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용어’, 최문규,『파편과 형세』, p.361
2) 진령(참 진眞, 방울 령鈴)
3) 롤랑바르트, 조광희 역,『카메라루시다』, 열화당, 1986, p.12
Laugh Series_40x50inch_Archival Pigment Print_2014
바르트가 말한 절대적인 특수성, 불투명한 최고의 우연성이야말로 사람의 ‘몸짓’과 ‘사진’의 공통된 본질이 아닐까. 서커스 단원들이 거대한 타자의 힘에 조종되지 않기 위해 유연하게 휘어지는 일이 단일자로서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최고의 묘기이듯이. 그런 의미에서 엘레지차원으로서의 서커스가 아닌, 멜랑콜리커¹의 몸짓으로서 서커스는 귀중하다. 모던과 탈 모던, 아날로그와 디지털, 삶과 죽음, 사진과 드로잉, 프레임의 안과 밖, 문자와 이미지의 견고한 이분법이 아니라 ‘부초’처럼 전 영토를 산보객으로 떠돌며 현재의 시간들에 틈을 드러내는 멜랑콜리커의 몸짓이야말로 상호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 로고스를 해체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로서는 이 몸짓, 누추하고 고단한 육체노동자로서의 서커스단원들이 펼치는 새로운 날개 ‘짓’ 이야말로 인간학적인 영감이라고 불리는 ‘범속한 각성’의 초상이기에 아주 중요해진다. ‘낡아버린 것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에너지(…)즉 최초의 사진들, 사멸하기 시작하는 대상들, 5년 전의 의상들, 유행이 물러가기 시작할 때의 상류층 스탠드바들²(…)’에서 벤야민이 발견해 낸 변증법적 이미지는, 바로 몰락하기 시작한 것들 속에 이미 내재된 희미한 마술적 힘이었다고 한다. 각성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기에 “지금시간”(Jetztzeit)³에 활짝 깨어 신체가 누릴 수 있는 경험들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것이 바로 사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거미여인의 ‘꿈’이 아니었을까. 15년 전, 서커스단원들과 생활하며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들,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그냥 촬영해야만 했던 시간이 있었다면, 거미여인이 되어 과거의 시간대로 싱크로나이즈하면서 상처의 환부들과 합일을 꿈꾼 공감각이미지는 깊고 고요하고 아름답다.
1) 여기서 멜랑콜리는 심리학에서 말하듯 우울, 불안, 근심의 정서로만 다루어서는 안 되고, 계몽주의에서 빈난하듯 광기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멜랑콜리는 보들레르에게는 근대인의 고독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의 산물이었으며, 벤야민에게도 역사의 폐허를 응시하는 근대적 자각의 소산이었다. (권혁웅)
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발터 벤야민 선집 5,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도서출판 길, 2012, p.150
3) 벤야민의 용어이다. 벤야민은 현재라는 개념보다 ‘지금시간’이라는 단위를 사용한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과거는 단순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에 반짝 빛나는 이미지처럼, ‘빠른 속도와 강렬함’으로 현재 속에서 경험되는 시간이고, 그 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몸짓 - 미메시스, 태고의 언어
오진령이『곡마단 사람들』을 전시와 책으로 엮어낸 지 10년이 흘렀다. 초기의 흑백사진들에서는 다이안 아버스와 사라 문의 시선들이 발랄하게 교차한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오는 6년 동안을 그녀는 서커스 사람들과 함께 했다.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든 동춘서커스를 촬영하며 ‘과거가 아닌 오늘의 것으로서 바라보면 좋겠다.’고 쓴 어린 오진령의 노트는 이 후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타자의 간절한 목소리와 몸짓을 응대하는 오진령의 태도는 공감과 공통을 성실하게 수행해낸다. 그녀의 인물사진들이 마스크를 벗어던진 채로 생생하게 와 닿는 이유일 것이다. 사진 속의 인물들이 그저 ‘드러나는’ 방식대로 바라보다보면 가녀린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손을 내밀어 잡아보면 겹쳐지는 공간이 생기고, 계속 바라보면 안과 밖, 나와 타인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정지 된 사진 속에서도 묘기를 부리고 있는 곡마단 사람들의 열기가 전해지는 것은, 관습적인 사진 규칙을 넘어서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의 프레임을 무화시켜낸 작가의 마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거미여인의 꿈> 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힘이 발휘되는데, 바로 몸의 단편들이 자연 속에서 재구성되며 새로운 몸-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진 속에서 작가의 몸은 각 부위가 자유롭게 놓여 있어 에로틱한 본능을 발산하다가 가볍게 공중으로 치솟는가하면, 그로테스크한 인형들이 등장해 불가능한 것들을 탐사하게 한다. 도시의 외곽 벽돌공장¹이나 숲의 은밀한 공터에서 기이하게 펼쳐지는 인형이 있는 광경들은 동화적으로 뒤섞이며 언캐니한 놀람을 일으킨다. 마치 어린아이가 하루사이에 어른이 된 것처럼 붉은 열매와 창백한 하늘사이로 인형들이 걸어 다닌다. 순수하면서 거칠고 평화와 불길함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우발적인 풍경들 속에서 거미여인과 인형들은 서로에게 이끌림과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는 듯하다. 이율배반 혹은 모순으로 성립되는 꿈의 세계처럼, 거미여인의 세계는 현실과 상상, 의식과 무의식의 다리에 그물을 치며 비상과 낙하를 반복하는 다양한 형태의 몸을 선보이고 있다.
< 거미여인의 꿈> 으로부터 깨어나 드넓은 대지로 나아간 오진령은 나무였다가, 기둥이 되고, 덩어리로 뭉치며 태고의 < 몸짓> 을 보여준다. 말과 문자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한 마법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다. 오진령은 < 몸짓> 시리즈에서 자연 속으로 한없이 스며들어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고 있는 듯 대형카메라의 여러 효과들과 자기존재형상들을 결합하여 아담의 언어를 회복하려는 한 과정을 보여준다. 자연에 투사된 자아, 혹은 자연과 같아지려는 오진령의 미메시스적 욕망은 점이었다가 선으로, 꽃향기로, 바람으로, 나무로 종국에는 나무와 평행을 이루다가 석양의 바위와 동그란 점으로 일체가 되며 궁극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치 가부좌한 불상이 시원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 이 사진에서 자연과 합일을 이뤄낸 절대적 자유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조윤경이 제안한 ‘초육체성le surcorporel²’이 오진령의 사진 속 퍼포먼스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끝없이 새롭게 생성되고 어떠한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몸을 몇 개의 포즈로 환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 찍는 일은 바로 모험이라 할 수 있고, 그 모험은 또한 불가능을 재현하는 일이다. 그러니 오진령이 자신의 몸의 소리, 몸의 언어, 몸짓을 통해서 자기를 응시하고, 스스로를 사진과 삶의 경계면에 부단히 위치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진령의 사진-몸짓의 세계에서 그동안의 관습과 진부한 도식에 구속되었던 수직적 사고가 말랑말랑한 시적 잠재성으로 변환되는 마법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해의 불가능성과 신체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사진-몸짓의 세계는 ‘지금시간’에 몸이 밀고나가 기존에 ‘있었던 것’을 깨워내 촬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영육이 솟구쳐 오르는 무한한 집중과 열린 틈 사이에서 작동하는 셔터들의 단호한 선택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1) 갈수록 쇠락해가는 서커스단의 가설무대는 공연장소를 구하기 마저 어려워져 변두리의 벽돌공장 부근이나 김장시장이 열리는 시장 옆 공터에 막을 올리며 천막무대는 늙은 창부처럼 몰락해 갔다고 한다. (한수산,『부초』, 1986, 민음사, pp.252~253)
2) 조윤경,『초현실주의와 몸의 상상력』, 문학과 지성사, 2008, p.9
Laugh Series_40x50inch_Archival Pigment Print_2014
출판기념회
오진령 사진집 < 몸짓 Zi-it> 이 IANN 출판에서 출간된다. 4월 15일 오프닝 행사 시 이 신간의 출판기념회가 함께 열린다.
사진가의 서재 02 _ 오진령 편
류가헌 사진책도서관 내 자리한 < 사진가의 서재> 에 3월 25일부터 두 달 여간 사진가 오진령 편이 펼쳐진다. 오진령의 초기작인 ‘곡마단 사람들’ 시리즈를 중심으로 < 거미여인의 꿈> 과 < 몸짓> 의 전시작 일부가 오리지널 프린트로 전시되고, 사진가의 서가에서 옮겨 온 책 일부와 소품들이 함께 갖추어진다. ‘작가와의 만남’ 포럼이 연이어진다.
* 류가헌 사진책도서관 안에 꾸려진 < 사진가의 서재> 는, 한 사진가의 정신과 정서가 형성되기까지 책이 관여한 부분을 살핌으로써 사진과 인문학의 만남을 도모한 기획전이다. 전시실이라기보다 실재 사진가의 방처럼 아늑한 이 공간은 해당 사진가에게 전시기간 내내 개방된 공간으로서 일종의 레지던시의 성격을 띤다. 두 달에 한 번씩 1년 동안 총 여섯 사진가의 서고 중에서 담론화 할 책 일부를 < 사진가의 서재> 에 옮겨서 나누어보고, 그 책을 중심으로 작가와의 만남, 포럼 등을 이어가는 형식이다. 전시 오프닝이 아니고서는 좀체 만나기 어려운 사진가들과 일반인들이 좀 더 친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의 역할을 해나가는 공간인 것이다.
■ 오진령
2013 |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사진학 전공 | 2009 |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 석사, 순수미술(사진) 전공 | 2003 | 국민대학교, 예술학사, 입체 미술(조각) 전공 | 1999 | 서울예술대학, 예술학사, 사진 전공
주요 전시경력 | 2014 | [개인전] 웃음 ' 말 없는 말' , 류가헌 갤러리, 서울 | 가장 높은 미술관, 가장 낮은 이야기, 기획 ART제안, 북정미술관, 서울 | 2013 | The Story of Creative, 기획 아파쳐, NYC Gallery, 뉴욕 | Interactive Action, 콜로라도 주립대학 미술관, 콜로라도 | 2012 | C’est l’ete, Galerie CAMERA OBSCURA, 파리 | Discoveries of the Meeting Place, 10명의 예술가 지원전시, | Wendy Watriss기획, FotoFest2012, 휴스턴 | 2011 | NO.45금호 영 아티스트 전, 금호미술관, 서울 | 2010 | [개인전] 몸짓, De Santos Gallery, 휴스턴 | 2009 | National Juried Photography Exhibition 2009, 전시기획자 Julian Cox, 1212 Gallery, 리치몬드 | 2008 | [개인전] 자유변형, Diego Rivera Gallery, 샌프란시스코 | 2007 | Friends of Kumho,금호미술관, 서울 | 2006 | [개인전] 거미 여인의 꿈, 금호미술관, 서울 | 2004 | Desrencontred' Arles,ArtFestival, 아를르, 프랑스 | [개인전] 내가 만난 그들, 강남 교보문고 1층 전시관, 서울 | 2003 | [개인전] 어릿광대와 사랑에 빠지다, 룩스 갤러리, 서울
출판물 | 몸 짓 Zi-it, 사진집, IANN 이안출판 | 거미여인의 꿈, 사진집, 금호미술관 | 곡마단 사람들, 사진에세이, 호미출판
소장 | 콜로라도 주립대학 미술관, 콜로라도 | Galerie CAMERA OBSCURA, 파리 | De Santos Gallery, 휴스턴 | 금호미술관,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