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열림 omnipresent
미술

무료

마감

2014-09-03 ~ 2014-09-26


전시행사 홈페이지
www.gallerybutton.com/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려면 대개 백담사나 오색약수, 한계령 휴게소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산 좀 탔다는 사람들도 일단 몸부터 만들고 보는 코스는 단연 한계령 쪽이다. 설악산 어느 길이 험하지 않겠는가 만은 한계령 코스가 힘든 이유는 몸이 풀릴 여유도 주지 않는 초반 급경사 때문이다. 적당히 계곡 좀 걷다가 오르막이 시작되는 다른 코스들에 비해 휴게소 뒤편으로 난 시멘트 계단을 따라 오르며 시작되는 한계령 코스는 짧으면 두어 시간, 길면 서너 시간을 그저 간신히 땅만 보고 걷게 만든다. 경치를 좀 보자고 고개를 돌려봐도 형형색색의 등산복과 무섭도록 짙푸른 숲, 그리고 덜그럭거리는 너덜바위와 암벽뿐이다. 잠깐 멀리 계곡이 보여도 들어가 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등산화를 벗는 순간 그 고개를 다시 오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헛구역질까지 해가며 겨우 발을 옮기는 등산객 모두가 안다. 어느 군대, 어느 산에나 있는 ' 깔딱고개' 지만, 설악산 한계령 코스의 깔딱고개는 격이 다르다. 산을 오르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여유 따위, 거기엔 없다.

온 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 이제 그만 올라가라' 고 농성을 벌일 즈음, 저 앞에서 경탄과 후회, 자책과 대견함이 섞인 외마디가 들려오면 겨우 힘을 낼 수 있다. 고개의 끝,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했다는 신호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는 귀때기청봉이고 오른쪽에는 대청봉이다. 그리고 눈 앞에는 방금 전 앞에서 들린 경탄, 후회, 자책과 대견함의 외마디의 이유가 있다. 그저 고개가 끝났다는 이유로 소리를 질렀다기에는 눈 앞에 열린 풍경이 너무 크다. 돌과 나무와 남의 엉덩이만 겨우 보며 올라온 이들에게 내설악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파노라마는 ' 자연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선물' 같은 수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겨우 앞 집 건물이나 보고 살던 사람들에게, 맑은 날에는 금강산 언저리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먼 풍경을 바라본다는 건 비로소 ' 나라는 존재' 가 ' 걸어온 길' 에 대한 사색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대청으로 오르는 서북능선은 사실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어려운 코스라서, 아까의 사색 따위 순식간에 남의 일이 돼버리지만 그래도 이제 ' 갈 길이 보인다' 는 사실과 ' 더 먼 곳이 보인다' 는 이유로, 적어도 욕은 좀 덜 하며 오를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눈이 트인다는 말은 그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작가는 자꾸만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건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긴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로 들리는 말이었다. 2014년에 숲과 나무를 ' 본격적으로' 그리는 젊은 작가가 몇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숫자가 많지는 않을 터, 작가가 속내를 열어주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다. 욕심에 캐묻고 재촉하기가 여러 번이었지만, 매 번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경외와 도취에 이끌려 숲을 다니다 보면 순간 내가 어디 서있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오기도 하는데, 노경희는 몇 번인가 얼핏 그런 때가 지금이라는 뉘앙스를 비쳤었다. 성급한 마음에 지도와 나침반을 던져주고 오리엔티어링을 하자고 제안하면 ' 쉴 수는 없으니 계속 오를 것이고, 걷는 속도를 늦추고 딛는 걸음에 무게를 두면 결국엔 능선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얼핏 속내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효율적으로 하산할 길을 찾아 헤매는 중이 아니라 능선에 올라가 먼 풍경을 보고 싶어하고 있었다. 나는 서북능선을 향해 깔딱고개를 오르는 사람에게 오색 코스는 하산길도 험하니 소공원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라고 떠들고 있었던 게다. 그 즈음 인터뷰도, 작업실 방문도, 술자리 제안도 그만두었다. 일생일대의 등반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손으로 슥슥 그린 지도를 던져주고 보이스카우트 놀이를 하자고 조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가 개안(個眼)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시제목은 『열림_omnipresent』가 되었다. open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란 뜻의 omnipresent가 부제가 된 것은 의미가 있다. 여전히 숲 속에서 길을 찾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작가를 다시 만난 곳은 뜻밖에도 서울 한복판이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그 증거다. 있을 법 하지만 정말 있는지 모를, 언젠가 본 적 있는 풍경이지만 어느 곳인지 특정할 수 없는 나무와 숲의 풍경을 그리던 작가는 뜬금없이 ' 길가의 나무들' 을 내놓는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먼 바다와 금강산을 한눈에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작가가 정작 보고 있었던 것은 서울의 가로수다. 그건 채비를 갖추고 길을 떠나야 만날 수 있었던 풍경을 이제 살고 있는 ' 여기' 서 발견할 수도 있었다는 독백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작업의 방향성과 작가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에 자연에서 받던 위안을 이제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노경희에게 ' 열림' 은 곧 ' omnipresent' 와 같은 의미일 수 있다. 단순히 작품 속 깊고 짙푸른 숲의 풍경이 잎과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풍경으로 변하고, 캔버스를 가득 채운 녹음이 생각대로 흘러가는 연필선을 따라 수풀이 된 것뿐 아니라, 이제 ' 어느 곳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풍경' 에서 안온함을 느낄 수 있는 작가가 된 것. 즉 작품의 구도와 이미지뿐 아니라 작업에 대한 사색과, 작가로서의 방향성에 대한 성찰이 사방으로 열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 아마도 그녀는 분명 서북능선을 타고 끝청을 지나 중청대피소에서 잠시 쉬다 대청봉 꼭대기에서 속초시내와 동해바다와 금강산과 그녀가 걸어온 모든 길과 또 걸어갈 모든 길을 보게 될 게다. 그리고 다시 숲으로 돌아가 깊고 검은 숲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대신, 동서울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와 오늘 걷는 길의 가로수와 길과 사람을 보게 될 게다. 그렇게 사방으로 열린 작업이 또 시작될 게다. ■ 갤러리 버튼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