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 간의 장기 후원협약을 통해 우리나라 중진작가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태도와 가능성을 제시하고, 중진작가 층을 보다 공고히 지탱하기 위해 기획된 본 시리즈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를 후원함으로써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작업활동에 있어 다시 한번 전환의 계기를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불(1964년생)
2014년 올해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가 개시되는 해인데, 그 시작을 알리는 작가로 이불(LEE BUL, 1964년생)이 선정되었다. 이불은 1990년대 후반부터 뉴욕현대미술관, 뉴뮤지엄, 구겐하임미술관, 베니스비엔날레, 파리 퐁피두센터, 도쿄 모리미술관 등 해외 유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현대미술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미 1980년대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사고를 통해 시대, 사회라는 보다 보편적인 맥락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탐구를 지속하였다. 오랫동안 국내보다 국외에서 많은 활동을 해온 이불은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대규모 신작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첫 작품이자 이불의 국내 발표 신작인 < 태양의 도시 II> 와 < 새벽의 노래 III> 는 우리 관객들에게 차원 다른 경험과 기억을 이끌어낼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4: 이불> 전 관람 유의사항
- 청소년 및 어린이는 전시실 입구에서만 관람이 가능합니다. 관람선을 지켜주세요
- 전시공간 전체가 작품입니다. 천천히 거울 사이 통로로 걸어주세요.
- 통로 주변 거울 모서리에 다칠 수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관객의 안전을 위해 내부 관람인원을 매회 5명으로 제한합니다.
- 1시간 간격으로 전시실 내부에 연기 안개가 발생합니다. 작품의 일부이오니 놀라지 마세요.
괴물
1980년대 한국에서 전통적인 조각교육을 받은 이불은 작업 초기부터 한국미술계를 장악하고 있던 관습화된 아카데미즘에 반발,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 말에는 도발적인 퍼포먼스와 설치작업, 조각오브제와 같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사회적, 정치적 권력 구조가 어떻게 가부장적 문화를 구축하는가 살펴보았다. 작가는 완전히 벗은 몸으로 줄에 거꾸로 매달려 낙태의 고통을 연출하는가 하면, 샤먼 분장에 부드러운 재료로 제작된 거대한 촉수가 달린 괴물옷을 입고 논밭을 누볐고, 인간도 아닌 괴물도 아닌 모습으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것은 인간과 괴물,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논리와 비논리 등 이분법에 대한 반발이자 불온한 배제의 대상과 동일시 되어온 여성성에 대한 패러디였고, 작가는 이를 통해 기존의 인습화된 가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사이보그
1997년 화려하게 장식된 채 부패하는 날생선 작업 < 화엄 Majestic Splendor> 의 뉴욕현대미술관 전시는 이불에게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한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으며, 이는 1998년 구겐하임미술관이 수여하는 휴고 보스상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 수상은 이불로 하여금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던 ‘사이보그’를 실현 가능하게 했다. 백색 폴리우레탄의 사이보그 연작 < 사이보그 W1-W4 Cyborg W1-W4> 에서 처럼, < 사이보그> 시리즈는 기술, 완벽,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믿음과 신화, 그리고 절망을 표현하였다. 1999년 개최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제전과 더불어 한국관 대표작가로도 참여했던 그는 < 노래방>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문화, 그리고 기술 간의 상호관계성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처럼 이불은 다양한 예술적 모색을 거치면서 최근에 들어서는 < 나의 거대서사> 라는, 그러니까 문학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장편에 몰두하고 있다.
나의 거대서사
작가가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 나의 거대서사 Mon grand recit> 시리즈는 2005년 처음 선보였다. 이전 작업들에서 신체와 사회의 억압적 상관관계, 과학기술문명의 우울한 미래에 이어 20세기 초 건축을 지배했던 담론을 다루며 마치 이를 풍경으로 재구성하듯 대규모 공간설치작업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2007년 카르티에현대미술재단 개인전을 비롯해서 < 나의 거대서사> 는 작가의 개인적 기억과 경험을 반영하며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 열망과 실패들을 상상 속의 지형으로 구현하였다. 이 시리즈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거대 담론, 즉 메타서사가 불가능하다고 본 철학자 리오타르의 사고에 대한 이불의 시각을 반영한다. 작가는 거대서사의 불가능성을 인식, 이에 파편화되고 완전하지 않으며 미해결된 채 지속적으로 부유하는 ‘작은’ 이야기들을 다루고자 했다. 역사에서 드러난 부패의 흔적, 모더니즘 이상주의의 실패,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들의 의식과 일상에 등장하는 모던 망령들에 대해 관객들이 새삼 숙고하게끔 하고자 했다.
태양의 도시, 새벽의 노래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이불》전의 < 태양의 도시 II Civitas Solis II> 와 < 새벽의 노래 III Aubade III> 는 이불의 < 나의 거대서사>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설치” 작품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의 < 태양의 도시 II> 는 길이 33미터, 높이 7미터의 전시공간 전체를 작품화하였다. 사방 벽을 거울로 덮고, 바닥 역시 거울이 깔려있는 공간 속에서 관객은 무한으로 확장된 공간을 경험하며, 그 경계를 상실하게 된다. 통제할 수 있는 감각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환경 속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발생한다.
< 태양의 도시 II> 는 이불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철학자이자 공상적 공산주의자인 톰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의 저서 『태양의 도시 The City of the Sun』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하였다. 유토피아론의 고전(古典)으로, 책에서는 저자의 개혁적 이상이 반영된 이상도시를 다루고 있다. 이불은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형태와 그에 내재된 의미를 차용, 거울의 반사를 이용한 은유로써 제작하였다. 거대한 불덩이 같기도 한 전구들은 거울 면에 부착되어 반사되는데, 형태의 반전이 일어나면서 글씨를 드러낸다. ‘CIVITAS SOLIS 태양의 도시’라는 글씨는 불규칙하게 점멸을 반복한다.
감당할 수 없는 규모감과 인식의 범주 너머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더 나아가 경외를 경험하게 된다. 고요함 속에서 반사광이 가득한 공간은 실상 매우 정적이다. 그런데 바닥의 파편들과 그 이미지가 거울에 비쳐 분절되면서 엄청난 절규를 쏟아내는 듯하다. 무수한 거울 파편들의 선이 갖는 불완전한 움직임과 흐름은 거대한 평안 아래 묻힌 외침들을 상기시킨다.
또 다른 신작 < 새벽의 노래 III> 는 기존의 라이트 타워 구조를 발전시킨 작품이다. 중세에서 16세기까지 유행했던 서정시의 양식으로 보통 이루어지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의 극적 표현으로써 새벽의 이미지를 차용한 “오바드(Aubade)”의 개념을 담고 있다. 15m 높이의 수직적 전시환경을 활용한 < 새벽의 노래 III> 는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의 < 새로운 법령을 위한 기념비 Monument des Neuen Gesetzes> (1919)와 1900년대 초반 모더니티의 상징물인 힌덴부르크 비행선(Hindenburg Airship)의 기체 구조 등에서 시각적 영감을 얻어 재해석한 대형 설치 작품이다.
일정 시간 간격을 두고 구조물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수증기는 이내 전시공간을 가득 채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얀 공간 속에서 우리는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공간 위쪽에서는 붉은 점과 같은 빛들이 점멸하며 마치 이정표 역할을 했을법한 그 무엇의 흔적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증기가 걷히고 다시 트인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황홀하지만 처절하다. 허공에 떠있는 기념탑과 비행선은 빛의 반사로 인해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러나 사선으로 누운 형태의 기념탑이 마치 속도를 내며 비행선을 관통한 듯한 양상은 그 반짝임의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비행선에서 떨어져 나간 거대한 파편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언제든 내려앉을 듯이 우리의 허공을 떠돈다.
이불은 인류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한 근대 기획의 모든 서사들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보고 이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완벽’에 대한 환상에 대해 언급한다. 완벽에 대한 헛된 열망과 그 적나라한 실체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어쩌면 외면하고자 하는 현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불의 작품세계는 삶과 죽음, 추와 미, 세속과 신성, 실재와 꿈이 무수히 교차하는 현실 속으로 차갑고도 뜨겁게 그 근원 혹은 경계를 찾아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