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춘 展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 Mer
2015. 2. 4(수) ▶ 2015. 2. 10(화)
Opening 2015. 2. 4(수) PM 6:30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 T.02-730-5454
www.gallerylamer.com
과감한 다양성 안에서 진정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모습
소녀시절 화가를 꿈꾸지 않은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나중에 성장하여 그 꿈을 이룬 여성은 또 얼마나 될까? 이러한 질문들이 장희춘의 작품을 만나면서 생뚱맞게 떠올랐다. 장희춘의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느낀 작은 충격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필자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작가와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고, 나중에 작가가 보내준 작품 사진들을 되풀이해서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보여왔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처음부터 화가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던 작가는 먼 길을 돌아 결혼과 출산을 지나서 비로소 붓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긴 미술의 긴 역사를 되짚어보면 정규 미술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가들 가운데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근대 서양미술사는 아카데미의 정식 교육을 거부한 진취적인 작가들이 미 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장희춘은 정규 미술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가다. 우리는 이러한 작가를 독학(self-trained)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희춘이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사실은 전업 작가로서의 활동에 있어서 장단점을 동시에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장희춘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색감은 아마도 그녀가 정규 미술과육과정을 거쳤다면 지금처럼 드러나기 이전에 스승들로부터 지적되고 수정되어서 그 모습과 느낌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작가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장희춘은 물감을 많이 섞어쓰지 않는 편이다. 색채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습관은 색의 채도를 감소시키는 과정이 최소화됨으로써 화면이 밝아지게 된다. 거기에다가 장희춘은 화면 안에서 빛의 작용을 강조하여 사물의 색상이 명암법적으로 대비되거나 미묘한 그래데이션(gradation)을 이루어 화면에 생기를 더해주게 만든다. 여기에 더하여 정희춘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활기는 작가가 원색에 가까운 색상들을 과감하게 대비시키는 데에서도 부분적으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초록과 빨강, 노랑과 보라색 계열의 병치와 충돌은 작가가 선택하는 모티브의 종류에 관계없이 화면에 생기를 더해주게 된다.
장희춘이 다루는 소재는 제한이 없지만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빈 의자와 테이블이 배치된 실내 공간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테이블은 회동을 마치고 뒤처리를 해야 하는 어질어진 테이블이 아니라 이제 곧 누군가를 맞이할 것같이 잘 정돈된 모습이다. 작가는 이러한 소재를 선택하게 된 배경으로 개인사의 일부분을 이야기한다. 어린 나이의 외동딸이 외국 유학을 떠나면서 갖게 된 어머니로서의 걱정과 그리움을 작품 속에 풀어낸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을 듣고 나면 이러한 작품을 반복해서 제작하는 장희춘의 마음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주제 면에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이루게 되는 만남의 기쁨을 기대하면 작품을 제작해 온 것이 장희춘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를 시각화하는 공간으로 실내의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을 선택한 것은, 미술사적으로 일상적 대상을 개인적인 정감을 강조하여 그리는 앙티미스트(Intimist)들이 즐겨 채택해 온 소재로서 우리에게 익숙하다. 예를 들어 보나르(Pierre Bonnard)의 식탁이나 정원 풍경은 이러한 앙티미스트들의 대표적인 소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희춘의 정서에 이러한 소재와 주제는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장희춘의 작품을 통해 소재면에서 앙티미스트들을 떠올렸다면 기법이나 구도 면에서는 미술의 긴 역사 속에서 여러 작가들과 여러 경향들이 작품에 따라 부분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발견이 곧 작가의 창의성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조형예술의 속성상 선배의 작업에서 부분적인 영감이 도출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이런 전제 아래서 우연한 유사성에 대한 관찰은 허용 것이다.
장희춘의 작품의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과감하고 다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작가는 붓과 물감의 성질을 활용하여 다양한 질감의 표현에 도전하고 있다. 장희춘은 안개꽃과 대리석, 양탄자와 나무 의자와 같은 다양한 질감의 소재들을 거침없이 표현해내고 있다. 구도 면에서도 작가는 때로는 고전적인 좌우대칭을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엄숙성을 깨는 과감한 표현이 동시에 드러나기도 한다. 붉은 장미꽃이 한다발 가득 담긴 항아리는 녹색 테이블과의 색상 대비와 함께 색채의 과감성을 통해서 화면 전체의 엄숙성을 유발하는 대칭적 구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밖에도 의자와 테이블의 배치에 있어서 어떤 작품에서는 고전적인 배치를 따르다가도 다른 작품에서는 바로크적 공간감을 강조하는 비스듬한 배열을 시도하기도 하고, 대리석 테이블의 원근법적 파괴나 기물들의 배열에서는 상징주의 작가들의 작품이나 세잔의 시각을 읽을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테이블 판을 넘어 허공으로 약간 뻗어나온 책과 팔레트에서도 바로크 작가들이 즐겨 이용했던 운동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하며 화면 속의 그림자를 비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은 모더니즘으로의 길을 열어준 작가로 이야기되는 마네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장희춘의 작품은 색채면에서 독특하면서도 주제면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각각의 화면에서 표현되는 구도나 표현에 있어서는 미술사의 다양한 측면을 읽게 해주는 종합선물세트같은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이 곧 자신의 인생이며 치유의 수단이자 희망인 것처럼 장희춘의 작품은 다양함 속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진지함이 읽혀지기 때문에 아마도 필자에게 그것이 작은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다.
하계훈(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