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기는 국내에서 비디오를 본격적으로 예술에 도입했던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1984년에야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데 반해, 박현기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영상 매체를 작품에 활용하며 독특한 비디오 작업을 해나갔다.
그는 1942년 식민지 시대 일본 오사카의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건너와 대구에 정착했다. 196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1964년 건축과로 전과하여 졸업하였다. 회화와 건축 분야를 두루 공부한 그는 1970년대 초 대구로 낙향하여, 한편으로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것으로 번 돈을 모니터와 카메라를 사서 작품 활동을 하는 데에 쏟아 부었다.
1974년부터 시작된 대구현대미술제의 주요 작가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면서 일찍부터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1980년대에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1990년대 한국에서도 비디오 아트에 대한 열풍이 일어나면서 박현기의 활동이 주목 받게 되었으며, 그는 1997년 이후 < 만다라> 시리즈, < 현현(顯現)> 시리즈 등 대표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국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각광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갑작스럽게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 2000년 1월 숨을 거두었다.
58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는 수많은 작품과 자료를 남겼다. 그의 사후 여러 차례 박현기를 재조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회고전이 특별한 것은 2만 여 점에 달하는 그의 자료가 처음으로 정리 완료되어 공개되는 전시라는 점에 있다. 1965년의 학창 시절 메모에서부터 2000년 임종 직전의 스케치에 이르기까지 35년간 그의 인생과 예술을 들여다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선별, 전시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을 총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자료를 토대로 그의 주요 작품을 재현(再現)해 냄으로써, 박현기의 ‘거의 모든 것’을 전시에 담아내었다.
그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비디오’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매우 동양적인 정신의 바탕 위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초기 비디오 작업은 돌탑 사이에다 돌을 찍은 영상 모니터를 끼워 넣은 것들이다. ‘그냥 돌’과 ‘모니터의 돌’은 서로 중첩되어,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지의 구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마치 하늘에 뜬 달과 강물에 비친 달을 구별하지 못한 채, 강물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을 남긴 이백(李白, 701-762)의 정신세계처럼.
박현기는 이미 1960년대 20대의 나이에 대구 근교 화원의 남평문씨 세거지인 ‘광거당(廣居堂)’에서 80대 노인으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전통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구식 교육에 ‘속았다’고 자책하면서, 그는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이 어떻게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 가는 서양의 형식언어와 결합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는 일에 평생 매달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등 세상의 온갖 극단(極端)들이 서로 갈등하고 공존하는 일종의 ‘에너지장(場)’을 형성한다.
그는 비디오를 통해 ‘하이테크’의 실현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미디어의 끊임없는 변모 속에서도 어쩌면 항구적일지 모를 인류 궁극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서 ‘미디어’는 영구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우주적 코드’를 암시하는 도구일 뿐인 것이다. 천여 점에 달하는 작품과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박현기의 진면모를 확인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