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8
재일교포 건축가인 이타미 준은 여행과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건축에 입문했다. 그는 바다와 가깝고 바람이 머무는 시즈오카와 제주도에서 건축 활동을 했으며, 재료의 물성과 지형, 바람이 어우러지는 조형미를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건축세계와 전체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바람의 조형’ 展이 오는 7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관에서 개최된다.
글│구선아 객원기자( dewriting@naver.com)
자료제공│국립현대미술관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의 온기, 생명을 작품 밑바탕에 두는 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에센스를 어떻게 감지하고 앞으로 만들어질 건축물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다."
- 이타미 준, 『ITAMI JUN - Architecture and Urbanism 1970-2011』 중 –
이타미 준, 그의 한국이름은 유동룡이다. 재일교포 건축가인 그는 일본 시즈오카(靜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여행과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건축에 입문했다. 어릴 적부터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지녔던 그는 만지고 그리는 행위들을 매개로 건축을 익히고 표현했으며, 획일화된 산업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반근대적인 태도로 현대건축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색을 드높이며 조형의 순수함을 찾을 수 있는 백자, 불상, 파르테논 신전 등에 매료되었고 산업사회 이전의 조형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매끈하면서도 차가운 현대 건축물이 범람하는 가운데 소재 날것의 감각이 돋보이는 무겁고 원시적인 건축을 추구했던 이타미 준은 말년의 제주도 작업에 이르러 더욱 평온하고 차분한 건축을 보여줬다. 제주도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즈오카와 같이 바다와 가깝고, 바람이 불어오는 장소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이러한 제주도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했던 그는 살아있는 자연과 조응하는 건축물을 만들어냄으로써, 건축가로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이타미 준이 탐문했던 건축과 예술의 관계와 합일의 여정을 그림으로써 그의 삶과 작업을 전반적으로 아우른다. 전시의 각 섹션은 이 낯선 항해를 도와주는 이정표와 같다. 이타미 준이란 건축가의 작업 의식의 뿌리를 살펴보는 ‘근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해, 거칠고 날 선 감각이 돋보였던 일본에서의 작업과 바다의 품을 닮은 제주도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일대기가 ‘전개’된다. 어두운 방 속에서 빛나는 것은 그의 손길이 닿은 여러 기록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컨텍스트를 지워버린 부유하는 그의 작업과 조응한다. 한편 그 건축이 실제 자리하는 장소성에 대한 이야기는 비치된 텍스트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한편, 미술관에 기증된 이타미 준 아카이브와 유족 소장품으로 구성된 이번 회고전은 일본에서의 1970년대 초기 작업부터 말년의 제주도 프로젝트까지 40여 년에 걸친 그의 건축 작업뿐만 아니라 회화, 서예, 소품 등 다양한 작품 속에 담긴 건축가의 심안을 엿볼 수 있게 했다.
1부. 근원
전시의 시작을 여는 ‘근원’에서는 이타미 준의 회화 작업, 서예, 공예품, 저술 등이 전시되어 건축 외 다양한 예술 활동을 추구했던 작가의 자취를 담고 있다. 잡지와 출판물, 인터뷰 영상 등이 있는 아카이브 코너에서 건축 작업의 근원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했다.
2부. 전개 : 소재의 탐색
이곳에서는 1971~1988년에 이르는 시기의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이타미 준의 초기 작업은 모노하 운동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소재 그 자체의 물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또한 그는 “의식적으로 흙, 돌, 금속, 유리, 나무 등의 소재를 콘크리트와 대비” 시켜 서로 간의 조화와 대립을 꾀했으며, “유리를 통해 비치는 빛으로 빛나는 금속”과 같은 소재의 배치로 아름다움을 발견시켜 나갔다. 이때의 국내 대표 작품으로는 적벽돌로 지은 한국 민가에서 모티브를 얻은 ‘온양 미술관(1982)’과 그 지역에서 나온 돌을 외장재로 사용한 ‘장욱진 기념관(1986)’이 있다. 일본에서의 대표 작품으로는 이타미 준의 첫 아틀리에이자, 도시라는 거대한 바닷속을 표류하는 배를 상상해 만든 ‘먹의 집(1975)’ 등이 있다.
3부. 전개 : 원시성의 추구
1988~1998년까지의 작업을 담고 있다. 1980년대 이후는 일본 건축계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리와 철을 사용한 가벼운 소재의 건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타미 준은 이를 지적하며 “현대 건축에 본질적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건축의 야성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돌을 중심으로 목재, 대나무 등 자연 소재를 사용해 철저하게 무거운 건축을 추구하였다. 특히 대지에서 채굴한 돌과 흙을 재료로 지은 ‘각인의 탑(1988)’이나 훗카이도에 위치한 ‘석채의 교회(1991)’, ‘나무의 교회(1996)’ 등은 재료 그대로의 물성을 갖고 작업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4부. 전개: 매개의 건축
1998~2010년까지의 작업기로, 이 시기에 이타미 준은 형태와 소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건축이 매개하는 ‘관계’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 그는 건축이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며, 공간과 사람, 자신과 남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재료의 날 선 원시적 감각이 돋보이는 건축에서 벗어나 온화하고 고요한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국내에서의 작업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자연 속에 묻혀 있어 사람들이 잘 인지할 수 없게 만든 제주도의 ‘롱 섀도 미술관(2001)’과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경계를 고려해 낮은 구름 형상에서 영감을 얻은 ‘오펠 골프 클럽하우스(2008)’, 북한산 산등성이에 세워진 저층 공동 주택인 ‘오보에 힐즈(2010)’ 등이 건축이 매개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5부. 바람의 조형: 제주 프로젝트
이타미 준 작업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제주도 프로젝트를 담은 섹션이다. 제주도는 이타미 준의 대표작들을 볼 수 있는 전시관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수풍석 미술관(2006. 2007)’을 비롯, ‘포도호텔(2001)’, ‘두손 미술관(2007)’, ‘방주 교회(2009)’ 등의 스케치와 모형,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와 함께 시간의 흐름에 변화하는 자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수풍석 미술관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영상이 함께 전시된다. 영상은 1부와 2부로 나뉘며, 1부는 ‘인간과 건축’(12’ 30”)이라는 주제로 어린아이와 노인의 시선에 의해 수풍석 미술관을 느끼는 영상이다. 2부는 ‘자연과 건축’(15’ 10”)이라는 주제로 해, 바람, 비, 눈 등 자연의 변화가 건축 자체에 스며드는 모습이 상영되고 있다.
6부. 이타미 준의 아뜰리에
도쿄 세다가야구 하네기에 있는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아틀리에를 전시장 한쪽에 재현해 놓았다. 그가 사용한 책상, 의자와 책, 문구류 뿐만 아니라 생전에 수집한 공예품, 현대 회화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현대민화, 전통민화, 공예품, 도자기 등의 오브제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전시장 입구와 출구, 그리고 가구들
전시장 입구와 출구에 마주하는 벽은 작가가 생전 즐겨 사용했던 자연 소재인 나무와 돌로 마감했다. 재료의 복합과 대립은 이타미 준의 중요한 건축 언어였다. 또한 1부 아카이브 코너에 비치된 의자와 복도에 놓여 있는 벤치는 이타미 준이 직접 디자인한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전시 외에도 ‘이타미 준 건축의 관계항’이라는 이름으로 건축강연도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2014년 3월부터 6월까지, 월 1회 과천관 소강당, 서울관 영화관 등에서 개최된다. 지난 3월에는 건축과 지역성(유이화_ITM 유이화 건축사무소 대표)에 대해 4월에는 건축과 문학 (박길룡_국민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이 이뤄졌으며, 이후 5월은 건축과 사진(김용관_건축사진가), 6월은 건축과 영상 (정다운_영화감독)이 있을 예정이다. 이와 함께 어린이 건축 워크숍 ‘사이의 건축’이 5월 과천관 소강당과 야외조각공원 등에서 진행된다,
이타미 준은 건축이 “나와 새로운 세계를 매개하는 그 무엇”이라 설명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장소, 공간 등의 생생한 의미를 마주하기 위한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튀는 형태, 새로운 재료, 차별화된 그 무엇을 만들어 내는 요즘이라지만 건축의 본질에 닿고 자연과 함께 하길 바랬던 그의 작업은 우리의 환경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타미 준의 말처럼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이자 자연 속에서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는 또 다른 자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