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1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가장 보편적인 행위 중에 하나였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읽고, 쓰는 것을 통해 개인의 삶과 때로는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지식의 습득과 향유라는 개인적인 행위가 삶의 태도와 관점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사회와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만든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 展은 이러한 지식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 사회에 어떤 그림들을 그려왔는지를 인문학박물관 소장품을 통해 재해석했다.
에디터 | 정은주(ejjung@jungle.co.kr)
자료제공 | 일민미술관
이번 전시는 지난 2008년 중앙 중, 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인문학박물관이 2013년 고려대학교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이곳의 소장품을 미술관의 맥락에서 재구성해보고자 기획되었다. 인문학박물관은 약 50,000여 점에 달하는 20세기 책과 문서 자료들이 소장된 곳으로서 당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인문학을 통해 조망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시각문화 연구자 박해천, 윤원화와 독립 큐레이터 현시원은 각각 그들만의 관점으로 인문학과 한국 근 현대사를 보여준다.
20세기의 책은 교육, 오락, 지식 등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넓고 광범위했다. 중요한 사회적 사건과 책의 관계 또한 깊었다. 전시를 여는 첫 번째 섹션 ‘모더니티의 평행 우주’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가상의 두 인물을 설정해, 이들의 삶을 형성해왔을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게 했다. 1930년대 초반에 탄생한 서울 토박이와 1960년대 초반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의 궤도와 이야기들은 각각 신문 기사, 책, 이미지 등으로 한 사람의 인생과 시대상을 연결시켜볼 수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우리의 삶에 시각적인 경험이 미친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이 사이에 당대의 중요한 사건들 속에 주목 받지 못했던 인물들의 목소리들을 개입시키는 한편, 1950~80년대 주요 텍스트 20개를 발췌한 복사물을 통해 전시장 안팎에서 이것을 나눌 수 있도록 했다.
첫 번째 섹션이 전시의 전체적인 구도를 보여줬다면, ‘인간의 생산’과 ‘이상한 거울들’의 경우 책이라는 매체 자체나 당시 문화의 실마리들을 풀어볼 수 있는 섹션이었다. 먼저 ‘인간의 생산’에서는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책들과 이 책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볼륨을 전시했다. 국민교육헌장독본, 농민독본 등 당시의 이상향과 사회상들이 겹쳐져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한 거울들’은 책의 부록 페이지에 나왔던 곁다리 그림들과 잡지의 표지 이미지, 근대화와 더불어 불렸던 노래 등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전시장에 불러낸다.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거나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이 이미지들은 오히려 서로 섞이고 함께 어우러지면서 20세기의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나면, 한 권의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이번 전시가 ‘보기’보다는 ‘읽기’에 가까우며, 순차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보는 방법에 따라 작품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전체적인 기획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람객들이 적극적으로 이 구도를 읽어내려고 하면 전시와 전시 사이의 틈 사이로 다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인문학박물관의 아카이브 전시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번 전시는 소장품 하나가 작품을 이루기 보다, 전시의 흐름 혹은 섹션 나아가 전시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소장품을 조사하고 파악하는 학문적인 결과물에 집중해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수집된 여러 가지 목소리를 동시에 그려낸다. 이것은 그만큼 기획자의 시각이 전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하며, 소장품이 미술관의 맥락에서 읽히는 과정과 독법에 대해서 관람객에게 또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는 9월 2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기획자, 필자, 특별 강연자들의 퍼블릭 프로그램이 마련되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도 만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http://ilmin.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번 전시와 함께 세 명의 기획자와 다섯명의 필자가 참여한 단행본 ‘휴먼 스케일’도 함께 출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