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지제면 월산리에 있는 서양화가 김성호(51) 씨의 작업실은 언뜻 19세기 미국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집을 떠올리게 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자급자족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호숫가 옆 인적이 드문 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얻은 주옥같은 생각과 느낌을 ‘월든'이라는 수필집으로 엮어 유명해졌다. 김 씨의 집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있다. 옆에는 계곡이 흐르고 주변에는 숲이 무성하다. 숲 한가운데에 그의 집이 있다. 마당에는 그가 농사짓고 있는 작은 텃밭도 보였다.》그는 10여 년 전, 이곳에 들어와 혼자 나무집을 지었다. 지붕 올릴 때 며칠만 인부의 도움을 받았을 뿐, 설계에서 자재 구입, 건축까지 모두 혼자 했다. 전기, 수도 배관, 배수시설도 독학으로 공부해 만들었다. 작업실은 마련해야겠는데 돈은 없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의외로 집짓는 일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집짓기는 ‘노동과 사유가 결합된 최고의 레저'”라고까지 소개했다. 워낙 철두철미하게 사전 준비를 해 나중에는 자재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도 자랑거리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그림 그릴 때 쓰는 안료도 직접 만들어 쓴다. 캔버스로 쓰는 비단천만 구입해 사용할 뿐 자연에서 직접 채취한 흙, 자갈가루, 기왓장, 붉은 화분조각 등을 직접 곱게 빻아서 사용한다. 붓도 깃털로 만든다. 한국화 같으면서 서양화 같고, 수묵화 같으면서 유화 같은 김성호 풍경화의 따뜻하면서도 은은한 느낌은 이런 오랜 수공의 산물이다.
천연안료들은 기성물감이 흉내 낼 수 없는 옅은 중간 톤이 지닌 은은한 느낌을 주는데 작가는 때로 비단결을 따라 곱게 채색하기도 하고, 까치 꼬리털로 만든 거친 붓으로 두꺼운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자신이 만든 안료로,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먹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자연 풍경 속에서 자신과 내면을 표현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들은 한결같이 고즈넉한 시골 모습이다. 억새풀이 우거진 야트막한 동산,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 늦은 봄이나 한여름의 푸른 신록,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이 드리워진 산등성이, 신비함이 묻어나는 망초 들판, 작은 들꽃이 가득한 탁 트인 광야, 논두렁에 소복이 쌓인 눈…. 명승이나 기암괴석, 웅장한 산 대신 바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세대가 태어나고 자랐음 직한 낯익은 옛 시골 풍경들은 그런 추억이 없는 젊은 도시인들에게도 은은하고 부드러우며 소박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의 풍경화는 강렬하진 않지만 보면 볼수록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한참 보다 보면 보는 사람이 실제 갈대 속에, 숲 속에, 야트막한 산 위에, 구불구불한 길 위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문득 쓸쓸해진다.
그는 이번 가을학기부터 홍익대 미술대학원 부교수로 임용돼 작가와 교수를 겸직하게 됐다. 산에서 혼자 작업하는 야인을 알아봐 준 제도권이 고맙고 생계에 숨통이 트여 또 고마운 일이지만 쉰 넘은 나이에 시작하는 겸업이 못내 부담스럽기도 하단다.
김 씨의 열한 번째 개인전이 10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02-736-4371, 4410)에서 열린다. 비단에 그린 석채화 30여 점과 드로잉 10여 점이 나온다. 가로 4.6m, 세로 1.6m로 대작인 ‘갈대'는 갈대숲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가을 들녘과 앙상한 나무를 배치해 가을 분위기를 흠뻑 느끼게 한다.
양평=허문명 기자 ang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