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소멸되는 것보다 한꺼번에 타버리는 쪽이 훨씬 좋다는 것을.”
90년대를 풍미한 그룹 너바나 리더 커튼 코베인의 유서에서 발견된 문구다. 권총 자살한 그는 상업성에 물들어 순수 창작 의지를 상실한 것을 비관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위와 같은 문구를 마지막으로 차라리 한순간에 타버릴 싱어로 남고자 20대 나이로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공연을 보기 전, <불의 검>을 처음 대했을 때 하필 커튼 코베인의 말이 생각난 건 왜일까? ‘불'과 ‘검'은 웬지 비장하다, 그리고 목숨까지 고사할 사랑이 연상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글이글 타오르게 할 것만 같은 <불의 검>. 그 편견 때문에 12억을 투자한 대형 창작 뮤지컬이란 문구를 달고 있어도 선뜻 다가서기가 낯설다.
그러나 만화가 김혜린의 원작 <불의 검> 소개를 읽고 나서, 우려가 잦아지는 느낌이다. 92년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무려 12년 동안이나 집필한 대작이라니. 주인공 남녀가 불꽃 같이 만나, 한순간에 태워져 버리길 원해 비운하게 자살하거나 죽는 그런 스토리를 상상했던지라 대서사와 역사, 그리고 ‘불의 검' 에 얽힌 아사와 아라의 사랑 이야기가 커튼 코베인 같다는 불온한 상상을 날려준 것이다. 12년간 집필한 작가의 집념과 인내가 내공처럼 박혀 있을 것만 같은 뮤지컬 <불의 검>, 공연 시간이 2시간 정도라 방대한 이야기가 잘 정리됐을까 하는 우려보다는 원작에 대한 믿음이 한 몫 하는 <불의 검>.
팝페라 가수 임태경, <미스 사이공>의 히로인 이소정 그리고 서범석, 진복자, 박철호 등 화려한 캐스팅과 더불어 연출 박일규, <태풍> <도솔가> 등 작곡가 김대성 씨, 국립극장 후원 작품이라니 그 규모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드디어 장막이 걷히고 웅장한 합창으로 극은 시작된다. 청동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아무르 족의 전사 가라한은 부족을 살리기 위해 카르마키 족의 <철검>의 제조법을 빼내고자 한다. 그러나 카르마키 족에게 쫓기는 입장이 된 가라한은 치명적 부상을 입지만 같은 부족 아라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뒤 가라한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산마로'라는 이름으로 아라와 한평생 같이 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카르마키의 침략, 아라는 카르마키의 장군 수하이바토르의 첩이 되고 가라한은 기억을 되찾아 아라는 잊어버리는데…….
처음 뮤지컬에 도전한다는 임태경 씨의 연기가 너무 부드러워(?) 가라한이란 인물에 몰입하기엔 부족한 점, 노래가 웅대해 가사 전달력이 떨어지는 점, 무대가 너무 뒤라 등장인물이 작게 보이는 점 결점을 뒤로하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 속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며 <명성황후>에 이은 국내 창작 뮤지컬이 활성화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들었다.
초연이라 공연 기간 초반 때, 음향 사고와 미숙한 진행 때문에 우려가 많았지만 거듭된 보안으로 한결 성숙해진 <불의 검>. 앞으로 더더욱 많은 이들이 찾는 뮤지컬로 성장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이미라 기자 mummy206@pla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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