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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뉴스

디자인 저널리즘의 현실

2014-01-29


디자인 통섭 강연을 하게 된 경향신문 아트디렉터 윤여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디자인 저널리즘’이라는 내용으로 강의를 할 것입니다.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제 경험을 예로 삼아 진행할 것이며, 먼저 저널리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디자인계에 저널리즘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후 디자인 저널리즘의 형성을 위한 방향에 대해 제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ㅣ 윤여경 (경향신문 아트디렉터)
정리 ㅣ 신혜란

디자인 토론의 장에 대한 갈증과 그 첫 시작 ‘디자인 읽기’

디자인을 공부하다 보면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저 또한 ‘예술과 디자인은 무엇이 다른가?’라든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등의 아주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저와 마음 맞는 친구인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이지원 교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채팅 창에서 2-3시간씩 이야기를 하면서 논쟁을 했었는데, 그러다가 이러한 논쟁들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 할 수 있도록 확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논쟁을 확대시킬 수단이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잡지사에 글을 보냈었는데, 증명된 필자가 아니란 이유로 퇴짜를 맞았습니다. 물론 SNS도 있지만, 이곳이 쌍방향 커뮤니티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성격이 크다 보니 우리의 계획을 담을 매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이지원 교수님이 ‘디자인 옵저버’라는 사이트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이트는 미국 디자이너들의 글쓰기 커뮤니티 입니다. 현직 디자이너들이 이 사이트에 글을 쓰면 다른 유명 디자이너들이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공간인데요. 한번은 유명한 디자인 평론가 릭포이너가 이 사이트에서 “디자인 역사는 우리가 할 테니, 디자이너는 역사에 신경 쓰지 말고 디자인이나 잘해라”라는 글을 남겼다가 굉장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디자인 옵저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보면서 “우리도 토론할 수 있는 게시판을 만들자”는 생각에서 이지원 교수님과 만든 것이 “디자인 읽기”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면서 시작했는데, 점차 블로그 사냥을 다니기도 하고, 주변 디자이너들에게 글을 올리도록 권유하는 등 토론장이 넓어지도록 노력해 나갔습니다.
2008년 11월 시작한 게시판에 현재 466개의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어느덧 이렇게 많은 텍스트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기에 댓글까지 더하면 굉장히 많은 텍스트가 축적되었습니다.

디자인 읽기가 첫 번째 텍스트 저널이라면, 두 번째는 바로 디자인 말하기 입니다. 디자인 말하기는 디자인 읽기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친구들이 디자이너들이 글 쓰는 것을 어려워하니 말로 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도 처음에는 5-6명이 모여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했는데, ‘두려움’, ‘공포’, ‘자만심’ 등 하나의 단어부터 시작한 주제가 나중에는 ‘디자인에 박사가 필요한가?’, ‘디자인 서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등 거시적인 내용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디자인 말하기를 팟 캐스트에 올리면서 콘텐츠가 쌓여 하나의 방송이 되고 또 하나의 저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디자인 읽기와 말하기를 운영하다가 최근 새로운 방식의 세미나에 대한 아이디어로 만든 매체가 ‘디자인 짝꿍’ 입니다. 발표자의 프리젠테이션을 듣는 지금까지의 세미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자는 취지에서 만든 것입니다.
처음 이지원 교수님이 생각 했던 것은 파티의 개념이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발전시켜 만든 것이 TV 프로그램 <짝> 을 패러디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반응이 굉장히 좋아서 두 번째 짝꿍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각기 다른 매체들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맨 처음 시작한 디자인 읽기가 진보된 것일 뿐 입니다. 채팅 창에서 시작해서 이것이 게시판이 되어 텍스트로 쌓이고, 말하기가 방송이 되고, 또 세미나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이지원 교수님과 저 둘이 아닌, 김을해, 김선미, 정기원 선생님 등 다양한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매체들이 제가 참여해 만들어 온 저널입니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 저널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주체적 사고’

저널리즘(journalism)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활자나 전파를 매체로 하는 보도(報道)나 그 밖의 전달 활동, 또는 그 사업, 어원은 라틴어 ‘diurna(나날의 간행물)’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언론에서 말하는 저널리즘 제1원칙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진실성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성은 외압으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저널리스트의 자의적 문제로 그 본질이 훼손되기도 합니다.

저는 국내 신문사에서는 유일하게 아트디렉터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제자신의 능력이라 말하기 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환경이 이러한 직책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조형적 의미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언론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주체적 사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에서 레이아웃, 그래픽, 색상 등의 비주얼은 매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기사의 시각적 효율성과 현장성을 더하기 위해 첨부한 사진은 그 자체로 기사의 전부가 되기도 합니다. 어떠한 것을 선정하고, 어떻게 트리밍 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제 디자인을 넘어 매체의 진실성에 대한 사실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사와 논평에서도 사건의 왜곡이나 굴절, 사견 없이 사실 그대로를 담아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널리즘의 본질적인 문제는 기사와 논평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저널리즘 제1원칙에 포함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진실성’이 오늘날 언론이 취해야 할 저널리즘의 본질이라 할 때, 디자인저널리즘의 본질에서도 윤리의식이 요구됩니다.

한편, 이러한 윤리의식이 디자이너에게도 있을까요? 저는 이 물음에는 회의적입니다. 윤리는 마음, 즉 양심에서 나오는 도덕성입니다. 어떠한 물질, 현상, 관계 등을 오감에 의한 정보를 판단하고 실천하는 문제는 주체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체란 무엇일까요?

‘코지토 에르고 숨(Cōgitō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故─存在─ )’
이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 R.데카르트가 의심할 이유가 있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여 연구한 끝에, 최종적으로 의문을 중지해야 할 일점(一點)에 도달한 후 한 말입니다. 즉, 다른 모든 사물은 의심할 수 있어도 이와 같이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즉 의심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사유(思惟)하고 있는 순간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하고자 한 말은 주체적 사고에 의한 인간 개인의 ‘존재’의식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데카르트 이전의 서양역사에서 인간의 자아의식 다시 말해서 주체적 사고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오로지 신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신이 지배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인간은 하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되돌아 볼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본인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로 세워 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주관성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켜 정신, 즉 자아로 자신의 육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인식하게 되었고,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고, 멀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사물을 보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주관성, 즉 주체의식을 확립한 시발점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사물처럼 존재해온 인간이 스스로 사고의 중심에 서게 되는 주관적 인격체로 탄생되었습니다. 이로서 개인중심의 사고는 서로 다른 소실점을 가지게 되며, 각자의 소실점에 따라 각각의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주관성은 형성됩니다. 반면, 객관성은 보통 누가 의식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관적으로 모두가 인식한 성질을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형성된 것이’ 주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체성이란 개인의 생각과 신념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당위성, 즉 지극히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체성을 가지게 되면 비로소 언론이 가능해 집니다.
언론인은 다양한 시각들로 볼 수 있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객관적 사실들을 받아들여 주체성을 확고히 함으로서 신뢰 있는 언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자인에는 오직 주관만 있을 뿐 주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저는 가끔 디자인에도 저널리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디자인에 주체가 없다?

디자인에 주체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원인으로 디자인 프로세스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어느 한 분야가 발전을 하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디자인 분야는 그 발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은 디자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윌리엄 모리스는 미술 공예 운동으로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필두로 디자인의 여러 조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우하우스로 연결이 되며 많은 교수와 공예가들이 새로운 디자인 교육체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이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오며 ‘디자인’이란 단어로 명명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초기의 디자인은 미술공예운동과 같은 일종의 예술 활동이었습니다.

이후 디자인은 정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나치의 탄압을 받게 되었고 모홀로 나기, 발터 그로피우스 등 디자인 교육을 통해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노력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으로 옮겨 간 디자이너들은 그간 자신이 일궈온 이념을 숨기고 객관적 측면에만 치중해 디자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디자인의 이념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짐작하건데, 사회에 대한 이상으로써 디자인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디자이너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감시를 받았을 테고,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주관적 판단을 숨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숨긴 채 활동을 하다 보니 결국은 디자인의 이념, 즉 디자인의 주체성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초기의 디자인에는 아마도 주체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긴 시간을 정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디자이너의 생각(주관)이 말살되면서 결국은 현재 디자인이 기능(객관)만 남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저널? 이념을 갖자

혹시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을 아시나요? 그 책을 보면 ‘새로운 군주가 되려면 자기 군대(무력)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비전(설득력)을 제시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력은 역량 즉, 자기 실력을 말하며 설득력은 이념을 뜻합니다. 실력과 이념은 사회에서 본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자인 분야는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 디자인계는 자신의 실력으로 디자이너 활동을 하는 것은 우수하지만, 생각을 말하고 설득하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은 듯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자인 저널이라는 것이 존재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은 없다고 봅니다.

현재 디자인 분야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디자인을 이념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존의 디자이너들이 실무를 통해 기능만을 담당했다면, 지금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디자이너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습니다. 릭 포이너, 스티븐 헬러 등 유명 디자인 평론가들이 등장하여 디자인 칼럼을 발표하고, 그린 디자인, 리 디자인 등과 같은 디자인 사조들이 생겨났으며, ‘디자인학’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 추세에 따라 앞으로는 디자인 저널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이란, 자신의 주체성을 객관적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이념이 있어야 하며 역사와 이상향이 분명이 확립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언어’라는 보편적 도구를 사용하여 많은 이들에게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자인 저널리즘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자기 주체성을 키워야 합니다. 잡지는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독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이념을 가지고 주관을 객관으로 인정받기 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디자인의 주체적 저널리즘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재 우리 시대에는 명확한 개념 없이 발행되는 잡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저널이라기보다는 정보지에 가까운 것이 많습니다. 저는 디자인 잡지들이 빨리 저널리즘 수준으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 잡지들이 저널리즘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 부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대부분의 독립잡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의 역량과 설득력이 없이 내 생각을 존중해 달라는 식의 이야기는 저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디자인 잡지들이 저널리즘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취재 기자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디자인 잡지는 편집자 즉, 에디터만 존재할 뿐 취재기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널이 아닌 자신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채 디자인을 표방하는 정보지 수준의 잡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디자인 저널리즘은 디자인을 학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디자인도 이론을 만들고, 이념을 만들며 많은 논쟁거리에도 참여하고, 이상향과 그 이상향이 가야 할 방법을 제시 하는 등의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디자인 분야가 발전 할 수 있는 길이며 디자인이 저널리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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