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15
프랑스 철학자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뉴욕의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세계무역센터(2001년에 9.11테러로 붕괴)에서 거대 항구도시 맨하탄을 내려다 보며 감각이 실종된 시대의 걷기를 이야기 했다. 그는 도시계획자들에 의해 디자인된, 기능에 기반한 그 도시를 내려다 보면서 감각의 재정비로 도시가 일상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으로 변환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글, 사진 | 강미정 d_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그 말인즉슨, 우리가 판 옵티콘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 도시에 종속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차원’에서 다시 도시를 내 것으로 하고, 왜곡, 변형, 재가공하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30년 전, 그가 그렇게 도시를 내려다 봤듯이 나는 우리 근대사 이후 빼곡한 이야기를 품은 듯한 관악, 그 곳에서 가장 높은 멀티 쇼핑몰 ‘Egg yellow'에 올라 관악로를 바라보았다. 멀리까지 트인 광대한 거리, 그 곳곳을 바라보다가 내려와서 눈으로만 바라본 곳들을 일일이 걷기 시작했다. 감각으로 거리를 느끼기를 원하며. 그리고 감각을 즐겁게 하는 디자인을 만나기를 원하며.
1. 관악의 뒷면 -Egg yellow에 올라서...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가장 높은 15층 건물이 바로 에그 옐로우이다. 잘 닦인 넓은 도로 주변에는 새로 지어진 높은 오피스텔 건물들과 상가건물들이, 도로변 건물 바로 뒤로는 매일 밤 화려하게 빛나는 모텔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저 끝에 보이는 관악산은 굽이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 산자락은 국내 엘리트들의 전당인 서울 대학교를 품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전국의 고시생들이 모여있는 일명 신림동 고시촌이 나란히 붙어 있다. 산의 맞은 편을 바라보자. 과거 달동네라 불리던 봉천고개로 주택들과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차 또 하나의 산을 형성하고 있다. 봉우리가 준수한 관악산과 아파트로 덮인 봉천동 봉우리 계곡 아래의 이 지역은 참으로 다양한 공간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다. 등산객, 서울대학교 학생들, 연인들, 고시생들, 봉천 고개 높은 곳의 주민들이 분주하게 각자의 갈 길을 서두르는 이 교차로에 서니 이 모든 움직임이 빚어내는 기운들이 몸에 와 부딪친다. 세르토는 이러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걷기를 ‘보행발화’라는 개인의 고유한 걷기의 미학으로 표현하였다. 관악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속한 삶의 길을 따라 흩어진다. 이러한 삶의 길은 어쩌면 걷기를 통해서만이 간신히 이해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관악산
관악구라는 지역이름으로 정해질 만큼 관악산은 이 지역의 자연 명물이고, 이는 서울대학교가 이 곳으로 부지를 옮긴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서울의 어느 산이나 다 그렇듯이 관악산의 주말은 항상 붐빈다. 대표적 풍수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인간의 주거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인간 생활의 조화로운 반영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들고 있다. 산을 끼고 동네가 형성되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퇴계 선생은 경치 좋은 자연을 두루 돌아보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한편, 심기(心氣)를 단련하는 묘법을 수련해서 인성을 함양하고 산에 올라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고 한다. 이처럼 산은 한국인에게 있어 삶의 일부이자 의로움(義)과 도(道)를 기르는 수양의 장소였다.
근대화 이후 도시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도시인들의 주거환경은 ‘자연’과 점차 유리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은연 중의 그리움, 혹은 열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나 열망은 산이 주는 묵묵한 호연지기의 도와 무언의 가르침보다는 산의 ‘소비’를 통해 자신의 건강 찾기와 스트레스 해소에 열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치달리는 듯하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자연을 핑계 삼아 지인이나 새로운 만남을 찾고, 막걸리에 취해 산을 내려오기도 한다. 형형색색의 모자와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끊임 없이 관악을 오르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자연을 코드로 삼는 디자인 역시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적 보다는 실질적이고 기능적인 건강 컨셉 하나로 용해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텔촌
“세속의 도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침대는 정신보다 육체를 더 많이 요구하는 침구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숙박업소의 침대는 더욱 그랬다.” - 양귀자 『모순』 중에서
자연과의 소통 보다는 자연에 대한 소비에 집중했던 이들의 해소되지 못한 욕망은 또 다른 공간으로 수렴된다. 바로 서울대학교 근방 유흥거리인 모텔촌에서 말이다. ‘유명 브랜드 등산복을 걸친 채 산에 오르던 이들이 칸칸이 비치된 숙박업소에서 마지막 남은 하루의 열정을 소비한다’는 것으로 모텔 촌을 바라보면 지나친 비약 일까? 아주경제신문의 김지나 기자는 52개의 숙박업소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모텔촌, 그리고 신촌, 광진구와 같은 대학가가 최근 유흥업소의 천국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서 탄생한 모텔(motel)은 자동차 여행자가 호텔보다 간편한 시설과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고 자동차의 주차 편의도 받을 수 있는 곳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모텔은 불륜과 쾌락의 소비 공간 ‘러브호텔’로 통용된다. 만약 모텔이 진정한 본래적 의미에 충실했다면 과연 고층 빌딩과 오피스텔 뒤로 자신의 몸집을 숨겨야 했을까, 그리고 차 번호판을 알아서 가려주는 ‘서비스’를 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원래적 목적을 상실한 채 자연을 소비함으로써 안위를 챙기는 등산객들과, 하룻밤 편안한 수면과 아늑한 휴식 공간이라는 모텔의 본래적 의의를 상실한 채 쾌락적 욕망에 함몰된 모텔 이용자들. 산과 모텔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을 찾고 있지만, 어쩌면 이 둘은 같은 목적에 사로잡혀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모텔 디자인은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소설가는 모텔촌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동네로 묘사하고 있다.
“밤 늦은 시간, 모텔 바깥에서 바라보는 러브호텔 밀집지역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동네처럼 보였다. 건물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기교들을 뽐내 고풍적이거나 초현대적으로 지어졌고 하나같이 다 밝은 네온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 『모텔 알프스』, 김인숙
소설가가 본 고풍적이거나 초현대적인 분위기- 건물과 사인, 건물을 둘러싼 갖가지 물건들이 자아내는 초현실의 감각, 그 감각의 형상화, 우리는 혹시 이것을 디자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좀 더 화려하고 다르게 하는 것, 감각을 자극하여 눈에 띄게 하여 수입성을 높여주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인식으로, 서양의 궁전식 모텔디자인이 나오고, 야자수 네온으로 반짝이는 디자인이 횡행하는 지도 모른다.
서울대학교
1975년 서울대학교는 동숭캠퍼스에서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하여 100만여 평의 자리를 차지했다. 서울대학교는 국내 일류대학이라는 간판을 달고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한국에서 최고의 사회적 권력과 경제적 안정을 얻기 위한 보장된 통로로 여겨지기도 한다. ‘서울’, ’국립’, ’대학교’라는 의미를 상징하는 교문의 ㅅ,ㄱ,ㄷ은 ‘권력’, ‘돈’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서울대 시지푸스』, 민혜숙) 이라는 의미로 전도될 만큼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가 차지하는 의미와 상징성은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얻으려는 한국의 모든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마음은 관악구 신림동을 향해 있다. 실제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중앙일보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한 법관 133명 중 82.7%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재벌기업 간부들까지 서울대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관악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거대한 서울대학교 교문 앞에 서면 사회에서 일등을 하는 집단이 주는 위압감에 눌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교문은 마치 저 아래 산자락 모텔촌의 본능(Id)과 여기서 발판을 마련할 현실계의 거대한 초 강력 에고(Ego)를 이어주는 수퍼에고(Super Ego)의 상징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이 문 앞에서는 ‘공무수행’이라는 문구가 써져 있는 서울대학교 셔틀버스는 마치 강을 건너는 배처럼 전철역과 서울대학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학생들을 실어 나른다.
신림동 고시촌
신림9동(현재 대학동)에 일명 ‘신림동 고시촌’은 서울대학교가 1976년에 관악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서울대와의 인접성과 공기 좋은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서울대학교가 부과하는 사회적 구조를 가슴 깊이 내면화한 이들이 한 공간에 집중적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특수한 성격을 지닌 마을이 탄생했다. 본능의 공간 모텔촌, 건강의 소비 공간인 산 앞에 장시간 동안의 공부로 몸이 망가져가는 젊은이들이 공존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들은 사법시험과 행정•외무고시 등 각종 국가시험을 준비하며 사회진출이라는 사회적 욕망을 품고, 동일한 미래를 바라보며 2~3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고시생활을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생활은 다가올 미래의 찬란한 영광으로 대체될 고통과 인내만큼이나 가혹하다. 소설가 박민규는 갑을 고시원에서의 체험을 이렇게 말한다.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움직이는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중엔 결국 움직임 자체가 거의 없어지게 된다… 1센티미터 두께의 베니어로 나뉜 칸 칸 마다 빼곡히 남자와 여자들이 들어차있다. 그 속에서는 다들 소리를 죽여가며 방귀를 뀌고,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자위를 한다. 살아간다… 문은 늘 잠겨있고, 창문은 없다. 그저 질식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갑을고시원 체류기』, 박민규).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좁은 공간과 밀폐된 창문, 하루라도 빨리 시험에 붙어서 뜨고 싶은 뜨내기 손님들이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환경 이외의 여유는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건축, 우리의 자화상』, 임석재). 이곳은 마치 인간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갖춘 감옥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인내력은 꽤 강인하다. 언젠가는 내가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서 사회의 주요 지도층으로 승격될 것이며,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오늘날의 비루한 삶을 모두 보상받을 것이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곧 고시합격이라는 쾌거를 이루고 과거의 미운 오리새끼에서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고시촌 생활에서 떠나 날아갈 것이다. 소설가 신승철이 말한 대로 “고시생의 조그만 고시원 쪽방은 사실상 욕망의 게토였다. 그 게토에서는 현재의 욕망을 억압하고, 미래를 기다리는 억눌린 인물들이 따닥따닥 등을 기대고 개미처럼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욕망공화국』, 신승철) 그리고 이 고시촌 입구에는 관악구가 세운 거대한 책과 필기구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쪽방의 디자인은 인간의 인간임을 배려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욕망의 구조가 만들어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달동네, 봉천동과 신림동
봉천동은 신림동과 함께 철거민 정착촌이 늘어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동네, 달과 맞닿을 만큼 지대가 높은 ‘달동네’ 였다. 이러한 결과는 1960년대 이촌향도 사회현상의 결과이며 실제로 관악구 인구는 7년 사이 17배 이상 증가하였다. 관악구는 서울 외 지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비교적 저렴한 부동산 가격과 물가로 인해 많은 외부인들이 선호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과거의 달동네, 그리고 현재 빽빽한 주택가와 원룸촌으로 까지 이어져 왔다. “우리 집은 봉천동에서도 높은 지대에 있다. 게다가 내 방은 옥상 위 높고도 높은 옥탑방이다. 달도 태양도 이웃이다. 봉천동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다.”(『국자이야기』, 조경란)라는 글의 마무리 부분은 봉천동이라는 이름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꼽히는 관악산, 대한민국 최고의 학문의 전당 서울대학교, 이 둘을 가까이 두고도 하늘을 ‘받들며’ 살아야 하는 봉천동과 신림동 주민들은 사실상 ‘외부인’에 가깝다. 이들은 관악산을 곁에 두고도 갈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삶을 살며, 교육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곳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상당수가 결손 가정이며, 부모의 대부분은 맞벌이를 한다. 서울에 첫 직장을 잡고 정착하려는 가난한 지방민과 대학생, 실업자들은 조그만 원룸방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신림동과 봉천동은 어쩌면 관악구 안의 또 다른 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관악을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2. 새롭게 만들어지는, 또 다른 관악의 얼굴
관악에는 네 봉우리가 있다. 자연의 상징 관악산과 모텔촌, 미래 권력의 상징 서울대학교, 그 곳의 또 다른 아류 고시촌, 그리고 한때 빈곤의 상징이었던 봉천 고개. 그 네 봉우리가 빚어내는 이야기는 수없이 다양한 디자인을 만들어 냈고, 그 자생적인 디자인의 한복판에서 관악의 거리는 새로운 얼굴을 위해 대대적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이른바 ‘관악 디자인 서울 거리’이다. 서울대입구역에서부터 관악구청, 그리고 서울대정문까지 이어지는 관악로에는 ‘디자인서울 거리 조성사업’에 ‘참된 걷기와 기분 좋은 머묾’이라는 주제로 2007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시 디자인 거리가 시행되었다. 서울시는 안전하고 넓은 거리,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간판들과 산발적인 공공시설물들을 정돈하면서 녹지를 조성하여 보행과 더불어 휴식할 수 있는 거리를 탄생시켰다. 이곳을 자주 다니거나 거주하는 사람들은 관악로가 디자인서울거리 정책 사업 대상지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해도 이전 보다 보행하기에 더 편리해 졌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디자인 거리 사업이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 것 같다.
이 거리를 전철역에서부터 서울대학교 방향으로 걷다 보면 디자인거리 사업으로 새로 생긴 거대한 가로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낮에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다가 밤이 되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가로등과 달리 한낮에도 어떤 자리에 서도 확연히 다가온다. 보통 가로등보다 훨씬 높고 굵은 형태의 철제 등은 거리의 폭에 맞춘 높이로 높게 지어진 듯한 묘한 형태감을 느껴지게 한다. 이 가로등은 어쨌거나 관악로의 그 어떤 거리 요소와도 어우러지지 못하고 크고 장대하게 서 있다.
잠깐 더 걸어가면 2007년에 완공된 유리외벽으로 둘러 쌓인 관악구청사가 눈에 들어온다. 신 관악구 청사는 자연 채광, 빗물 재활용 등이 가능한 시설을 갖춰 한국 에너지 기술원으로부터 우수등급의 친환경 건축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관악구청이 공간과 에너지가 효율적으로 쓰인다는 사실만으로 관악지역에 적합한 도시구성요소가 될 수는 없다.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요소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축물, 특히 주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많은 공공건축물 디자인은 조형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그 지역의 숨결을 같이 호흡해야만 한다. 하지만 서울시 스스로가 이야기한 지역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역사를 반영하고 미래세대에 계승될 문화공간(건축기본법 2008)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관악로에 서있는 관악구청은 단지 관악이 바라는 미래세대의 공간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네 개의 봉우리가 얽혀 빚어내는 삶에서 배어 나오는 디자인에 손을 대고, 그것을 기획하고, 간섭하기보다는 단지 그 위에 포근한 이불처럼 잘 된 디자인을 덮어 줌으로써 말이다. 이처럼 관악 디자인 거리는 서울대학교와 관악산을 찾는 외부 사람들에게 유리처럼 깨끗하고 세련된 도시 이미지를 보여주며 그동안 관악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은 숨기고 싶어하는 듯 하다.
관악은 한국이 극복해야 할 갈등이 그대로 일상의 디자인을 통해 드러나는 거리라는 보행발화의 결론을 짓게 만들었다. 디자인거리 관악로 양 옆으로 한 블록만 들어가면 디자인 거리사업 대상에 속하지 못한 건물들의 간판들, 광고 전단지로 지저분해진 전봇대와 전신줄들이 늘어서 있다. 새롭게 정비된 디자인 거리 뒤에 숨어 골목 사이사이로 내비쳐지는 이 과거의 거리는 자생적이고 치열한 삶이 만들어 낸 좁고, 비효율적이며,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이윤만을 생각한 디자인들의 집합체이다.
그리고 관악 디자인 서울 거리는 서로 융합할 수 없는 관악의 이질 공간들이 빚어낸 제 각각의 디자인 지형을 덮어버리는 포근한 이불처럼 조성되었다. 디자인의 이름 아래 제 각각 고립되어 있으나 지형적으로 얽혀 있는 저 일상의 디자인들은 과연 어떤 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인지. 해방 후 6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켜켜이 쌓인 디자인의 층위가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는 곳 관악. 에그 옐로우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관악의 잔상 속에 이러한 의문이 묻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