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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디자인 비평

2012-03-19


2005년 10월 반세기 동안 갇혀 있던 청계천이 드디어 시멘트 덮개를 걷어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시민들은 되살아난 청계천의 물길을 반갑게 맞아 주며 즐거워했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옹벽 밑으로 잘 꾸며진 물길에서는 경쾌한 물소리와 웃음소리가 연일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양한 축제들이 벌어지면서 복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그간의 논쟁도 일단락되었다.

글 | 이옥분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디자인 전략의 부재

청계천 복원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의 초점은 어떠한 모습으로 ‘복원’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 있었다. 시민단체는 청계천을 예전처럼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르는 자연하천으로 복원해야 하며, 석축과 다리 등 발굴된 유적에 대해서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최대한 원래의 형태로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실제적으로 청계천의 복원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기보다는 홍수 대비와 시민 편의 제공 등, 도심 환경에 맞는 기능을 갖추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유적의 원형 복원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했다.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는 풍경의 구상은 이처럼 장기적인 시각에서 ‘생태적, 역사문화적 복원’의 진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도심 개발의 효율성 차원에서 ‘하천의 이용과 치수에 중점을 둔 복원’의 서로 다른 생각 사이에서 갈등해 왔다.

그러한 갈등을 접고 시민들 곁으로 돌아온 청계천의 모습은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깊은 옹벽에 멋진 조형물이 있고, 흙과 초록이 심겨져 있으며, 한강에서 끌어 온 물이 다시 한강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하천’인지 ‘공원’인지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청계천에 놀러 나온 시민들 대다수는 청계천이 공원 같다고 말했다.

과연 청계천이 ‘복원’된 것인지. 복원이란 ‘원래대로 회복하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그간의 논쟁이 무엇이었든 간에 ‘복원’이라고 부른 청계천에 대한 상상은 졸졸 흐르는 깨끗한 물에 수풀과 물고기가 이리저리 유영하는 그런 하천의 모습이었다. 기대와는 다른 청계천을 보면서, 복원이 아닌 ‘인공하천 조성사업’ 이라는 말이 걸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복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면 예전의 하천으로 되돌리는 상상을 접고 도심의 수변 공간으로 어떻게 꾸밀 것인지에 대한 의견들이 모아지지 않았을까? 그 동안의 목소리는 소모적인 논쟁이 되어 버렸고, 돌아온 청계천은 본질이 모호한 채 남겨진 것이 아닌지. 이러한 모든 갈등과 오류는 ‘복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복원사업’으로 호명한 데서 온 혼란, 이것은 애초에 청계천 사업의 본질에 대한 명료한 방향 설정이 없었음을, 그리고 치밀한 디자인 전략이 없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의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편한 디자인

철저하게 준비된 디자인 전략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는 청계천의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표면적으로는 청계천 5.8km의 긴 수로를 따라 크게 3구간으로 나눈 디자인 방향이 있었다. 태평로 입구의 고층빌딩 숲에서 시작하는 1구간으로 부터, 광장시장에서 동대문시장, 황학시장으로 이어지는 2구간,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3구간까지 각 공간의 특성을 담은 디자인 개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향에 따라 1구간에는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담아 옛 석축과 다리의 형태가 일부 복원되고 청계천의 시작을 알리는 현대적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2구간에서는 사람, 오토바이, 자동차 등이 얽혀 항상 복잡한 곳으로 이러한 복잡함을 단순화시키는 방향이 주어졌으며, 3구간은 수목과 수초로 무성한 자연스러운 하천 풍경에 중점이 주어졌고 철거한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일부가 전시되었다.

이처럼 청계천 디자인은 인위적 구성에서 자연적인 구성으로 변화하는 기본 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긴 구간을 따라가며 살펴 본 청계천에서 그러한 디자인 전략을 읽기는 어려웠다. 하류로 가면서 하천 폭이 넓어 한가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을 볼 수는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인위적 구성과 자연을 살린 구성, 과거의 형식과 미래적 형식이 마구 뒤섞여 조각난 모양이었다. 다리와 다리 사이의 구간은 서로 다른 조각을 이어 붙인 듯하고, 추상화된 기하학적 형식과 자연스러운 부정형의 형식이 맞부딪쳐 어색해 보였다. 전통적 문양으로 구성된 장식물이 나오다가 현대적 도상이 갑작스레 튀어나오며, 육중한 덩어리와 번잡한 조각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청계천의 전 구간이 절벽처럼 깊은 호안에 물이 흐르고 돌과 식물, 산책로가 있는 비슷한 외양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조각나 보이고 산만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게 많은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빈약하고 궁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인지? 이런 의문은 천변을 따라 걸으며 새로운 다리를 만날 때면 더욱 뒤엉키고 뒤틀어졌다. 서울의 가장 깊은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에서 풍기는 이 느낌은 피상적이고 황량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주변과는 아랑곳없이 혼자서 튀어 보이려는 듯, 길답지 않고 다리답지 않은 모습으로 휘황찬란한 화장을 한 채 아름다움을 과시하려 아우성치는 모양새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청계천에서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기다린 청계천은 어떤 모습이었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가 기다린 청계천은 ‘다시 물이 흐르는’ 겉모습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의 특별한 공간, 우리 삶의 질곡을 담아내고 이겨낸 힘을 보여 주며, 희망과 꿈을 이야기 하는 곳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토록 많은 논의가 오가고 일부는 삶의 터를 떼어 주기도 하는 희생을 감수한 것이 아닌지. 물을 가지고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곳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정신으로부터 울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다시 열리기를 온 국민은 소원했을 것이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아름다움은 좋은 삶에 대한 기대와 서로 얽혀 있으며, 그러한 공간은 단순히 미적 수준에서 좋은 것이 아닌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적이며 긍정적인 관념을 구현하고, 우리에게 그러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고 설명한다. 대도시의 건축물을 바라보며 그는 우리의 디자인이 경쟁과 틀에 박힌 삶으로 부터 벗어나 자연스럽고 까다롭지 않으며, 올바르고 진솔하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제다움을 넘어선 장식

하천이 하천답지 않고, 길이 길답지 않으며, 다리가 다리답지 않은 모습, 보기에 참으로 거북하다. 이것은 본래의 기능과 상관없는 장식들이 과도한데서 오는 불편함인 것 같다. 새벽다리는 육중한 철골과 천막구조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장식은 다리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통행의 편리성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리의 견고함과 안정감을 방해하고 균형감을 해치면서 공간을 번잡스럽게 조각내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 사람의 보행을 방해하고 비좁은 공간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새벽다리 디자인은 애쓴 노력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공허하다.

원래 ‘~답다’는 의미는 존재가 지닌 본질적 내용에 충실한 형태를 지녔다는 뜻, 정확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대상을 일컬어 붙이는 말이다. 이렇게 ~다운 특질을 지녔을 때, 디자인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발산하며, 우리는 그러한 디자인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아름다운 다리는 끊어진 길을 연결하여 우리가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길이 되어줄 때, 우리로 하여금 그 겸손함과 성실함의 미덕에 미소 짓게 할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형식

청계천의 22개 다리에는 22개의 디자인이 있다. 이 수많은 디자인은 저마다의 특색을 주장하며 이웃하는 다리와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문살이나 성곽 등에서 일부를 인용한 디자인에서부터 미래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현대적이며 추상적인 조형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식이 마구 뒤섞여 있다. 이러한 제각각의 디자인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며, 주변과의 시각적 충돌을 일으켜 혼란스러운 공간의 이미지를 만든다.

디자인사에서 대부분의 훌륭한 작품은 매우 단순하며 심지어 반복적이기도 하다. 독특한 기본적 패턴을 규칙적으로 되풀이하는 ‘반복’은 조형의 질서 중 리듬감과 조화감을 이루어내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자칫 하나의 구조로 일관된 조형은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줄 수 있기에 변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규칙적인 동시에 복잡한 조형의 원칙, 즉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가 말하는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움의 기본 원리이다. 파격과 돌출만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아닌 복잡한 주변 공간을 배려하고 조화롭게 연결하는 친절함의 미덕이 아쉽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

제각각 다른 디자인은 각 장소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각 장소의 지역적, 역사적 특성을 말해주는 형태를 연구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특별함을 느낄 수 없는 그 형상은 화려한 구경거리로 자리할 뿐 이 곳이 청계천임을 말해주지 않는 것 같다. 세운교는 조명상가라는 특성을 고려해 빛을 표현한 형태의 조명탑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삐쭉하고 기하학적인 이 형태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원래 ‘상징’이라는 용어는 연결하다, 다리를 놓다는 뜻의 동사 'symbollein'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를 연결하는 행위’를 뜻한다. 즉, 상징의 의미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눈에 띄게 해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는데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해서 말해줌으로써 그 의미의 세계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상징의 힘인 것이다. 이야기가 흐르는 이러한 상징의 공간에서 우리는 기억과 경험, 그리고 정서에 몰입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초대 받는다. 이러한 힘은 상징이 우리의 이야기와 열망을 설득력 있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상징은 미묘하게 우리를 자극하며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상징은 의미 있는 조형을 만드는 중요한 문제이며, 어떠한 이야기를 형상화했다는 자의적인 해석과 설명만으로는 동감을 일으키기 어려운 참으로 까다로운 문제인 것이다.

키치스러운 전통

유적의 복원에 관한 치열한 논쟁은 삶의 역사를 건축물을 통해 현재에 재현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는 공간의 탄생에 대한 열망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도심 하천의 기능적 측면과 유적의 복원이라는 상반된 과제 사이에서 유적은 원형을 살리지 못한 채 기형적인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현대의 공간에서 옛 스타일을 유사하게 재현하다보니 디자인은 키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조악한 느낌으로 주변의 건물들과 서로 유리된 채 그냥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수표교는 돌다리의 짜임새가 견고하고 우아한 가장 아름다운 다리의 하나였으나, 복원된 수표교는 옛 형상을 따라 나무로 난간을 만들고 철판으로 상판을 만들면서 임시 다리처럼 빈약하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오간수교는 성곽 모양의 난간을 설치해 다리의 역사성을 되살렸다고 하는데, 이 또한 보기 좋지 않다. 과연 오늘날 이렇게 전통 형식을 인용하는 것이 옛 다리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되살리는 것일까? 오히려 조악하게 표현된 옛 양식은 우리의 전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지.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의 환경에서 전통적 형식을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의 질문을 가져온다.

디자인 이론가들은 ‘전통의 현대화’는 옛 형태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문화재가 지닌 미적 감수성과 정신의 계승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조형 재료와 방법, 조형 언어와 미감이 크게 달라진 오늘날 환경에서 옛 양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옛 것의 형태와 재료, 색채를 부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여러 조형 요소들의 짜임새와 구조적으로 풀어가는 방식과 미감 등을 오늘날 환경에 맞게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통의 현대화는 특정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담는 조형의 원칙이며, 그러한 디자인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문화적 자부심을 일깨워 준다는 설명이다.

비평의 부재에 대한 비평

청계천에 관한 논의는 도심의 효율적 기능이냐 자연성과 역사성의 복원이냐 하는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청계천의 구상에 대한 실제적인 논의, 즉 공공 환경으로서 청계천의 디자인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청계천의 디자인이 기본적인 조형과 미학의 원리에서 벗어나 미적 보편성을 잃고 있는 현실을 왜 디자이너는 말하지 않았는지, 왜 청계천의 디자인을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무관심의 소치는 아닐까? 혹은 디자이너들끼리 22개 다리를 나누어 설계한 공동의 책임 때문에 그냥 간과한 것일까? 디자이너가 디자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우리 디자인계가 여전히 삶의 환경을 조절하는 역할자로서 그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생활터전을 과거와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미래 삶의 희망을 그려내는 공간으로, 그럼으로써 행복을 설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임무를 확신하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오늘의 청계천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디자이너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디자이너가 여전히 작업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분위기, 생각하고 발언하는 사람으로서의 디자이너를 불편해하는 분위기, 이러한 디자인계의 풍토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유행처럼 떠들고 마는 사회적 디자인, 공공디자인이 아닌 사회를 위해 스스로 최상의 디자인을 독려하는 풍토 그리고 자유로운 ‘비평’활동에 의해 자극되는 디자인계를 기대해 본다. 비평은 옳고 그름에 대한 시비가 아닌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발언을 통해 당대의 보편적인 가치를 모색해 가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시대의 이상과 희망을 실은 살아있는 목소리이다. 이처럼 중요한 사업에서 여러 의견이 솟아져 나오고 반박하는 과정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청계천 디자인의 가장 아쉬운 점은 그 조형의 미추를 말하지 않는 비평 문화가 척박한 현실이다.

지난 2월 28일 박원순 시장은 청계천 복원과정에 역사적 생태적 시각이 결여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전문가들의 연구와 검토를 거쳐 올바른 방향으로 다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발표는 청계천이 자연이 함께 숨 쉬는 생태 하천으로 되돌아오는, 그리고 방치된 유물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아예 이번에 생태적 역사적 복원과 함께 디자인 문제도 재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특히 다리들은 지나치게 덧붙인 장식적 구조물들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가뿐하게 제 역할을 다하는 ‘길’과 같은, 서울의 가장 복잡한 도심을 이어주며 많은 유동인구와 차량의 소통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그러한 청계천의 다리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참고 문헌

전우용외, 『청계천; 시간,장소,사람』, 서울학 연구소, 2002
홍성태, 『생태문화 도시 서울을 찾아서』, 현실문화연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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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이레, 2006
에릭 부스,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에코의 서재, 2009
카를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나남, 2008
공간, 『청계천 바로보기』, 2005년 10월
SBS, 『물은 생명이다 306회』, 2008년 1월 4일
청계천 홈페이지, http://www.cheonggyeche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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