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7
“루드비히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술관이라던데 내 생각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라는 당찬 한 마디를 던지며 양혜규가 독일 대중 앞에 섰다. 은근슬쩍 풍겨내던 독일인들의 우월감에 찬물을 끼얹는 농담(?)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녀의 볼프강 한 수상을 힘차게 축하했다. 가진 자의 여유와 자신감만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Haegue Yang: ETA 1994-2018. Wolfgang-Hahn-Preis 2018 전시 전경, 루트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 Haegue Yang, 사진: Museum Ludwig, Saša Fuis, Köln
〈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 Seven Basel Lights〉, 2007
Haegue Yang: ETA 1994-2018. Wolfgang-Hahn-Preis 2018 전시 전경, 루트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 Haegue Yang, 사진: Museum Ludwig, Saša Fuis, Köln
지난해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양혜규 작가의 볼프강 한 상(Wolfgang Hahn Prize) 수상 소식과 함께 루드비히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에 큰 관심이 쏠렸다.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을 후원하는 근대미술협회가 1994년부터 매년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한 중견작가에게 수여하는 매우 명성 있는 이 상의 수상자로 양혜규가 선정되었다. 아시아 여성작가의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금으로 약 10만 유로(한화 약 1억 3천만 원)가 작가에게 돌아가고 그 일부는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이 수상자의 작품을 소장하는 데에 쓰이게 된다.
오랫동안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양혜규 작가의 작품 활동의 정점을 찍는 사건과도 같은 볼프강 한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독일은 물론 대한민국의 주요 미술계 인사들도 개막식을 찾았다. 루트비히 미술관 설립자인 루트비히 부부(Peter and Irene Ludwig)을 비롯하여 쾰른 시의 정치인 및 컬렉터들, 국립현대미술관장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i), 그 외 대다수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들이 참석했다.
우연히 개막식을 마치고 나오던 길 만나게 된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은 당장 내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도 양혜규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쾰른을 찾았다고 했다. 그만큼 국내를 비롯한 전 세계 미술계 인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오늘이었다.
Haegue Yang: ETA 1994-2018. Wolfgang-Hahn-Preis 2018 전시 전경, 루트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 Haegue Yang, 사진: Museum Ludwig, Saša Fuis, Köln
Haegue Yang: ETA 1994-2018. Wolfgang-Hahn-Preis 2018 전시 전경, 루트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 Haegue Yang, 사진: Museum Ludwig, Saša Fuis, Köln
Haegue Yang: ETA 1994-2018. Wolfgang-Hahn-Preis 2018 전시 전경, 루트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 Haegue Yang, 사진: Museum Ludwig, Saša Fuis, Köln
루드비히 미술관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전시인 만큼 약 5개 이상의 전시장에 작품을 배치하였고 설치에 특히나 어려움을 겪었을 그녀의 작품들을 더욱더 빛나게 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매표소에 들어서기도 전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비릿한 향기에 뒤를 돌아보면 입구 기둥에 옹기종기 절여진 새우, 젓갈 종류로 보이는 용기들이 전시 입장을 환영한다.
이 작은 디테일에서 시작된 전시는 1990년대 초기 오브제 작업에서부터 래커 페인팅, 사진, 종이 작업, 비디오 에세이, 의인화한 조각, 대형 설치까지의 시간 여행으로 이어진다. "동화 속 신비로운 여행을 하는 것 같아 정말 경이롭다"는 쾰른의 문화국장(cultural affairs director) 수잔 라우윗비츠-울바흐(Susanne Laugwitz-Aulbach)이 남긴 짧고 굵은 전시 관람 소감처럼 전시장을 지나는 내내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다.
〈The Intermediate - Pair Incarnate, Gwynplaine and Ursus〉, 2015
개인컬렉션, Stuttgart © Haegue Yang, Courtesy Galerie Barbara Wien, Berlin, 사진: Nick Ash
〈Medicine Man - Indiscreet Other World, aus der Werkgruppe Medicine Men〉, 2010
Zabludowicz Collection, London © Haegue Yang, 사진: Nick Ash
〈Mountains of Encounter〉, 2008
Haegue Yang: ETA 1994-2018. Wolfgang-Hahn-Preis 2018 전시 전경, 루트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Haegue Yang, 사진: Museum Ludwig, Saša Fuis, Köln
한국인 관람객들이라면 눈으로 시대의 향기를 느낄 법한 90년대의 서울 거리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들, 반가운 한국 글씨들은 정감을 더했다. 사진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에 더해 마구 쌓인 맥주 박스들과 함께 묶여 있는 미술품 포장박스들로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을 반영하면서도 예술시장의 어떤 부분을 비평하고 있는 작품 〈창고 피스(Storage Piece)〉, 이번 회고전을 통해 재 탄생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블라인드 설치 작품 〈조우의 산맥(Mountains of Encounter)〉까지 몰입감 있고 감각적인 경험으로 한 다양한 작품이 이어진다.
쾰른에서 열리는 전시의 특성을 놓치지 않고 탄생된 〈VIP's Union〉(2001~)은 쾰른의 유명 방송인, 정치인, 스포츠 선수들의 집에서 하나씩 가져온 의자들을 나란히 배열하여 완성됐다. 동시에 바람, 향기, 빛 등 도시를 통한 예술가의 여행을 담은 비디오 에세이는 관람객들이 앉아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주는 동시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작가의 고립 및 탈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Portrait Haegue Yang © Haegue Yang, 사진: Danh Võ
양혜규 작가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회고전답게 작은 드로잉에서부터 대형 설치 작품까지 보는 내내 오감을 자극했다. 관객들은 사진 한 장에서 느끼는 정서적 공감을 마주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재미에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ETA’는 ‘Estimated Time of Arrival’의 약자로 1994년부터 서울과 베를린의 스튜디오를 오가며 작업을 이어나가는 양혜규 작가의 앞으로도 계속될 국제적인 예술 활동의 끊임없는 일정을 예고한다.
글_ 남달라 독일 통신원(namdalr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