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7
현대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 그는 새로운 ‘창조’를 만들었고 ‘해석’의 의미를 다시 썼다. 작가의 손재주 대신 아이디어를 정면에 내세웠고, 기성품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레디메이드 개념으로 미술의 역사를 바꿨다. 지금의 현대미술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샘〉은 뒤샹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변기 작품은 당대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초기작 제작연도는 1917년.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소변기에 예술적인 의미를 부여할 생각을 했는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놀랍다. 뒤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어떤 사고를 가졌었는지, 이 파격적인 작품의 제작 배경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 전시장 입구
뒤샹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샘〉과 함께 〈자전거 바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 등의 대표작들이 한국에 왔다.
‘마르셀 뒤샹’전은 전 세계에서 뒤샹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을 집중 조명하며 회화, 레디메이드, 드로잉 등 150여 점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선보이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다. 전시는 그의 삶의 여정에 따른 작품 변화를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전 전경
1부 ‘화가의 삶’에서는 그가 청소년 시절부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프랑스 화풍을 공부하며 그린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화가 뒤샹의 작품에서도 역시 비자연주의적 표현주의 등 심상치 않은 시도들을 볼 수 있다. 1913년 아모리 쇼에 전시돼 논란을 일으키며 뒤샹을 유명하게 한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도 전시된다. 누드 형상을 움직이는 기계로 묘사한 것으로, 뒤샹은 입체파의 추상, 기하학적 공간에 관한 현대 수학 개념, 과학 사진에서 빌려온 운동을 재현하는 발상을 결합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뒤샹은 1912년 가을 회화 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했다. 2부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는 이 이후의 시기를 조명한다. 뒤샹이 ‘미술작품은 망막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여기며 선보였던 작품들이 전시된다. 큐비즘의 양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초콜릿 분쇄기(No.1)〉, 새로운 기술적 시도를 위해 캔버스를 재봉실로 꿰맨 〈초콜릿 분쇄기(No.2)〉, 기념비적인 구조물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유리) 등이 전시된다.
디지털 방식으로 구현된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유리). 작품 제작 방식, 필라델피아미술관 설치 전경 등이 영상을 통해 전달된다.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유리)는 과거에 이동 중 파손이 있었다. 뒤샹이 조각난 유리들을 붙였고, 이후 작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영구 설치됐다. 이동이 어려워 이번 전시에 가지고 오지 못했지만, 대신 디지털 방식으로 구현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설치된 원작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큰유리’의 모티브가 된 작품 〈통풍 피스톤〉도 전시된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기하학, 수학 등 관심사의 책들을 섭렵한 뒤샹이 작품에 대한 생각을 적어놓은 노트와 아카이브도 볼 수 있다.
〈자전거 바퀴〉, 〈샘〉, 〈병걸이〉 등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이 전시된다.
공간을 이동하면,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이 전시된다. 뒤샹이 선보인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 〈자전거 바퀴〉를 시작으로, 〈샘〉, 〈병걸이〉 등이 전시된다.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샘〉은 뉴욕 독립예술가협회의 이사직을 맡고 있던 뒤샹이 협회가 민주주의와 수용성의 가치를 얼마나 수호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1917년 협회의 첫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었다. 평범한 화장실 소변기를 가져다 방향을 바꾸어 놓고, 이미 유명해진 자신의 이름 대신 가상의 예술가 R. Mutt의 서명을 한 후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내놓았다.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샘〉은 결국 전시되지 못했고, 뒤샹은 이에 항의해 이사직에서 사임하기도 했다.
1917년 제작한 〈샘〉은 분실됐다. 한국에 온 전시작 〈샘〉은 뒤샹이 재제작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샘〉이다. 참고로 〈샘〉은 총 17회 재제작됐으며, 뒤샹은 자신이 작품이 재제작되는 것에 대해 레디메이드라는 개념의 의미가 더욱 커지는 것으로 봤다.
3부에서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뒤샹이 파리로 돌아와 작업하던 시기가 펼쳐진다. 프랑스 체스 대표팀 선수로도 활약하며 체스에 몰두하기도 한 그는 ‘프랑스 체스 선수권 대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체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하학적 공간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3부 ‘에로즈 셀라비’ 전시전경
그는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사진을 통해 에로즈 셀라비의 모습을 담았고,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제3의 성을 추구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는 작품에 자신의 본명과 ‘에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을 함께 적거나 에로즈 셀라비의 이름을 단독으로 새기며 에로즈 셀라비와의 활동을 시작했다.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혹은 마르셀 뒤샹에 의한, 또는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여행가방 속 상자)〉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혹은 마르셀 뒤샹에 의한, 또는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여행가방 속 상자)〉이 특히 눈길을 끈다. 뒤샹의 작품을 총망라한 미니어처 이동식 미술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프랑스를 여러 차례 오간 뒤샹이 전쟁 때문에 작품이 훼손돼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2차원과 3차원의 미니어처 복제품으로 만든 뒤 전시용 상자에 모아둔 것이다. 미니어처로 제작된 〈샘〉도 들어있다. 두 가지 에디션의 ‘여행가방 속 상자’가 전시되는데, 1941년 에디션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다.
4부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로로 널리 알려져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작품을 선보이던 시기를 다루며, 세계 여러 곳에서 전시를 했던 뒤샹의 아카이브가 전시된다. 노년에 뒤샹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20년에 걸쳐 최후의 작업 〈에탕 도네〉를 제작했다. 죽기 전까지 비밀리에 작업한 〈에탕 도네〉를 제작하기까지의 배경, 과정, 습작, 크로키 등이 공개되며, 기호학적 분석, 설치과정 등을 보여준다. 역시 필라델피아미술관 영구 설치작품으로 한국에 오지 못했지만, 필라델피아미술관과 동일한 크기의 방을 만들어 〈에탕 도네〉의 느낌을 전달한다.
전시에서는 만 레이, 프레데릭 키슬러,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 리처드 해밀턴 등 당대 작가들과의 협업 모습도 볼 수 있다.
전시만큼 공들여 제작한 도록에는 뒤샹이 직접 쓴 글 〈창조의 행위〉가 한국어로 최초로 번역돼 실렸다. 또한, 필라델피아미술관 큐레이터 매슈 애프런, 뒤샹 연구자 알렉산더 카우프만이 다룬 뒤샹의 작품 개념과 제임스 존슨 스위니와 뒤샹과의 인터뷰 등은 지금까지 수수께끼처럼 남아있는 뒤샹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 2 전시실에서 2019년 4월 7일까지 열리며, 다양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과 함께 큐레이터 토크, 뒤샹 연구자와 함께하는 학술 대담회 등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국립현대미술관